엄기호, 일상 속의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예민하게 짚어내며 조근조근 자기 발언과 활동의 공간을 넓혀온 문화인류학자 혹은 사회학자(물론 중요한 구분은 아니다). '88만원 세대'와 '김예슬 선언' 이후 20대를 둘러싼 세대론이 넘쳐나는 요즘. 오랜 기간 지근거리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함께 생활해온 그는, 남의 입을 빌리지 않고 20대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며 공명의 가능성을 살핀다. 가을이 무르익는 10월 말 어느깨 "너흰 충분히 괜찮다"며 20대를, 우리를 응원하는 그의 목소리가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에 실려 날아들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알라딘 인문MD 박태근)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 된다? 

글 이외에는 뵙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말씀이 빠르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녹취 작업에 난항이 예상되는데요. (웃음) 이번 책은 정치, 교육, 가족, 사랑, 소비, 열정… 우리가 마주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각론으로 들어가서 차례대로 짚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해보겠습니다. 그간 저작을 돌아보면 멀게는 <닥쳐라, 세계화!>, 가깝게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거꾸로 생각해 봐! 2>가 있는데요. 최근 두 권의 책에서 이번 책의 단초를 볼 수 있는데, 그간의 작업을 다른 말로 표현해보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우리 일상에 얼마나 깊이 침투해서 삶을 파괴시키느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일련의 관심이 20대에 가닿은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한데요.

굉장히 단순한 겁니다. 제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또 가끔 대안학교에서 청소년을 만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고 관찰할 수 있는 거죠. 이런 파트너십이 가장 중요해요.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1,2년 이상 만나온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만난 이야기들인 거죠. 아마 제가 노인 분들과 만나는 상황이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분들에 대해 글을 썼을 거예요.
  이유를 하나 더 꼽자면 교육과 성장에 대한 제 관심 때문이에요. 제 경험과도 관련이 있는데, 저는 전교협(전교조 전신)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교육에 냉소하던 인간이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돈을 무척 밝히는 분이었는데 저희 집이 그 욕망을 채워줄 만큼 잘살지 못했거든요. 반장을 하면서도 이런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니까 탄압이 심했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기도 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공부를 잘하면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거죠.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쓴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이란 책을 만났는데, 제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교육,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다가가고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교육에 대한 애정, 헌신, 열정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학에 와서 조한혜정 선생님을 만나서 배움과 삶이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 삶을 언어화하는 게 배움이고 학문하는 거라는 가르침을 얻었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 배우면서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게 제 삶의 중요한 지점이 된 거죠.

그렇게 만난 20대 친구들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책을 구성하셨는데, 저는 읽으면서 두 가지 느낌이 있었어요. 우선 이 친구들이 무척 솔직하다는 거,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하나는 ‘엄청 똑똑한데’라는 느낌이었는데, 아마 다른 분들도 비슷한 반응이 보일 듯한데요, 이런 반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글 잘 쓰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데 소수고요. 사실 문맥에서 떼어놓고 글 자체만 보면 무척 투박하죠. 그런데 글에 힘이 있어요. 그 힘은 솔직함에서 나오거든요. 매끈하게 글을 쓰는 거랑 솔직하게 글을 쓰는 건 다른 문제 같아요. 이 친구들의 글은 수업하는 과정 내내 고군분투한 결과예요. 자기 삶을 언어화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절하게 느끼며 쓴 이야기거든요. 저는 언어화했다는 말을 드러냈다는 말과 구분하는데, 후자는 전시하는 수준이지만 전자는 성찰이 전제된 개념이거든요. 이 힘이 단어나 문장, 문체 같은 형식을 압도했다고 생각해요.

 

초반에 ‘김예슬 선언’이 주요한 이야기로 등장하는데요. 한 친구가 김예슬을 인정하면 자신이 부정당하는 모순을 솔직하게 드러낸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386세대는 김예슬을 진정한 후배처럼 여기는데 반해 동세대들은 지지하면서도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은 상황인데요, 현장에서 바라본 동세대 친구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했을 때, 대학제도나 대학교육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나올 거라 예상했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보다는 그 선언을 둘러싼 사회와 언론의 반응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는 거예요. 사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김예슬을 지지해요. 그런데 뭔가 찝찝한 거예요. 나는 소위 ‘좋은 대학’을 들어가지 못해서 사회에서 한 번 부정을 당했는데, 너는 좋은 대학을 들어간 데다 그걸 박차고 나온 용기까지 갖고 있는 상황인 거죠. 내가 초라해지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패배감을 안겨주었던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어요. 여기에 대한 성찰은 전혀 없거든요. 학벌사회나 대학 서열 체제라는 담론은 있었지만, 이 체제 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초라해졌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구나. 이런 상황에서 대학 서열 체제가 문제라는 이야기들이 이들에게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죠.
  책에도 썼듯이 김예슬 선언 마지막에 나오는 ‘그리하여 나는 인간이 된다’는 말 있잖아요. 여기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게 뭔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서울에 가지 못하면, 서연고/서성한으로 분류되는 몇 개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는 또 한 번 인간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거니까요. 우리가 이들의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 놀랄 정도로 없다는 거, 이게 앞으로 우리가 풀어가야 할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를 폭로하고 사람을 옹호하라!

본문 주제가 7개인데요, 저는 연속한 주제들을 둘씩 묶어서 읽었습니다. ‘정치 혹은 민주주의’와 ‘교육’, ‘가족’과 ‘사랑’, ‘소비’와 ‘돈’, 이런 식으로 말이죠. 질문도 이렇게 연결해서 드려볼까 합니다. 우선 ‘정치 혹은 민주주의’와 ‘교육’을 읽으면서 이 친구들이 무척 회의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물론 선생님께서는 도피를 위한 무관심이나 무력감 하고는 다르다고 하셨지만 말이죠. 이 주제는 제도적 부분하고 문화-삶의 영역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을 텐데요. 이렇게 보면 문제를 조금 다른 시선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들의 삶은 제가 살던 시대보다는 훨씬 민주화되어 있어요.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가 과거처럼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거든요. 이런 부분에서 보면 생활 속의 민주주의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문제는 문화로서의 민주화가 냉소를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특히 교육의 영역에서는 엄청나게 냉소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체벌을 하는 교사가 줄어든 건 분명하지만, 이들의 태도가 ‘그래, 때리지 말라고? 알았어, 안 때리지 뭐. 얼마나 잘 크는지 두고 보겠어’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거든요.
  민주화라는 게 관계를 평등하고 동등하게 만들면서 서로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관계 자체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거죠. 관계 속에서 평등의 실천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관계 자체를 맺지 않으려는 태도거든요. 학교를 보면 선생들은 공부 못하는 친구들을 유령 취급하면서 사고만 치지 말라고 하고, 아이들도 선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상황이 되는 거죠. 이게 민주화인가요? 우리가 말하는 생활 속의 민주화가 이런 식으로 변질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비폭력 혹은 반폭력조차도 아이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비춰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맞은 건 오히려 언어화하기가 쉬워요. 그런데 이건 아예 언어 밖에 놓인 존재로 취급받는 상황이니까 언어화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냉소할 수밖에 없는 거죠.

다음 주제는 ‘가족’과 ‘사랑’인데요. 자본이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주지 못할 때,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함께 보였습니다. 우리가 상상해온 가족, 사랑은 이런 게 아닌데 말이죠.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보이는데요. 

저도 사랑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책을 쓰면서 사고의 역전을 경험했어요. 예를 들면 ‘등가교환’, 이거 너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겉으로 보면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을 보면 합리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이들이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이 바닥에는 곤궁함, 가난이라는 게 있거든요. 이 친구들은 정말 가난해요, 예전 세대들이 ‘사랑만 있으면 되지 무슨 돈이 필요해’라고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서울에서 원주로 통학하는 친구들은 버스비가 30만원이에요. 휴대폰, 인터넷. 이게 사치품인가요? 이런 필수품을 유지하는 데에도 한 달에 10만원이 들어가거든요. 강남의 중산층이 아닌 다음에야 아이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이걸 서로 배려하는 방식이 ‘등가교환’이에요. 그런데 이걸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도대체 누구의 시각인지 되물어야 한다는 거죠. 그야말로 정말 가진 자의 시각인 거죠.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거예요, 이걸 들어야 실체가 보이는 건데 말이죠.
  지금 청춘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임계치를 넘어버렸어요, 등록금은 이미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할 부분이 있잖아요. 휴대폰, 인터넷, 이런 것들이요. 그리고 최소한의 문화자본. 이런 걸 추구하는 거 자체가 임계치를 넘어선 상황이라는 거예요. 이건 이전 세대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거든요. 


최근 프랑스 학생들의 시위도 비슷한 이유에서 벌어진 거잖아요. 언론에서는 쥐 죽은 듯이 체제에 순응한다며 한국의 청춘들에게 각성을 요구하기도 했는데요.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세계화는 프랑스 안에 케냐가 만들어지고, 케냐 안에 프랑스가 만들어지는 상황이거든요. 프리드먼은 좋은 의미에서 세계는 평평하다고 했지만, 반대의 의미에서도 세상은 정말 평평해졌어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도 그러하고, 우리에게 이러한 것은 그들에게도 이러하거든요. 양쪽에서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서 프랑스 젊은이들, 프랑스 파업 등을 말하면서 프랑스를 낭만화하는 건 세계화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태도예요.
  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살펴봐야 해요. 프랑스는 고등학생들이 정치,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나라예요. 우리는 그게 없는 나라고요. 책임을 아이들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왜 들고 일어나지 않는가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진실을 폭로해야 하는 거죠. 우리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통치하고 있는지를 말이죠. 저는 사회과학과 좌파의 목적은 사회를 폭로하고 사람을 옹호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는 반대로 사회를 옹호하고 사람을 폭로하고 있거든요. 저는 이 부분이 진보와 좌파가 가장 보수적이고 우파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데모를 하다가 도망쳤다, 이런 경우에도 그렇게 도망치게 만들 정도로 끔찍한 통치의 폭력성을 폭로해야지 그 사람을 비겁하다고 몰아세울 문제는 아니거든요. 

    

프랑스 파업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학자로서 굉장히 분개했어요. 한편으로는 프랑스라는 나라를 낭만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시민, 학생, 젊은이를 폭로하고 있거든요. 이러면서 무엇이 감추어지는가 하면 바로 한국사회의 폭력성이거든요.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 사회의 폭력성도 감추어지는 거죠.
  이 책을 내고 인터뷰를 하면서 왜 청춘들을 옹호만 하느냐, 이들에게도 따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요. 이거야말로 저와 인연이 없는 발언이에요. 저는 아이들을 옹호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폭로하고 있는 거예요. 이 친구들의 세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들과 함께 우리 사회를 폭로하는 게 제 위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도 끊임없이 20대에 대한 이야기로 읽고 있어요. 신기할 정도로 말이죠, 무슨 도돌이표처럼. (웃음)
  

길들여지지 않은 열정

다음 주제 ‘소비’와 ‘돈’은 앞선 주제들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 세대들은 이런 가치가 만연한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셈이니까요. 차례를 보고 이 친구들이야말로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세대겠구나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글을 읽으면서는 이 친구들이 정말 괴롭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이 논리를 잘 알고 있는데도 벗어날 수 없고, 이용도 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가슴이 아팠어요.

그렇죠, 아이들도 돈 쓰는 거 좋아하죠. 사실 안 즐거운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말씀처럼 아이들이 돈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죠. 그런데 뒤집어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어요. ‘요즘 아이들이 돈 귀한 줄 모른다, 막 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과연 그 아이들이 누구냐 하는 거죠. 돈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쓸 수 있는 그들은 누구냐 하는 게 아까 말씀드린 사회의 폭로인 건데, 이게 아니라 뭉뚱그려서 소비세대라고 이름붙이는 건 하나마나한 이야기거든요. 이 책에는 사는 집 아이들 이야기가 간단하게만 언급되는데, 들여다보면 잘 사는 집 아이들 이야기가 더 재미나죠. 어렸을 때부터 돈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가 하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돈이 흘러간다’는 걸 알게 돼요. 바꿔 말하면 돈이 자본이라는 걸 알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 책에서 바라본 아이들은 돈의 실체를 깨닫는 거예요,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 써야 하는데 이건 부모가 주는 용돈과는 무게가 다르잖아요. 돈을 경험하는 두 가지 경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런데 계급 좋아하는 좌파들이 왜 이 문제를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혜교라는 친구는 이번 방학 내내 돈을 벌어서 중국 여행에 다 썼어요. 이걸 어른들이 보면 미쳤다고 하겠죠. 물론 이 친구는 삶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여행을 다녀왔지만, 많은 경우 유럽 배낭여행은 일종의 필수 문화자본이 되었거든요.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에 이게 얼마나 막강하게 작동하는지 혹은 이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경제자본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돈을 낭비하는 걸로, 허투루 쓰는 걸로 보이는 거죠.

2부의 마지막 주제가 ‘열정’인데, 이 단어는 구조나 대상에 대한 태도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줍니다. 선생님께서는 열정마저도 끊임없이 착취해가는 구조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착취마저도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청춘들의 시선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에너지가 구조의 변화라는 현실적인 지점에 부딪혔을 때 상황을 바꿔내거나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거든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괴물 같은 체제이긴 하지만, 그 자체를 괴물로 만들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이들은 착취당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것이 자아실현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상황이거든요. 저는 과연 이 체제가 이들의 열정을 모두 포획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이 사회에 편입되려는 ‘순응의 에너지’를 체제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 체제는 이미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체제로 변환을 해버렸기 때문이죠. 바우만의 표현대로 노동력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상황이거든요. 과거처럼 체제 밖으로 탈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폭파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의 모습이 자본주의의 또 다른 모습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체제는 어쨌든 순응의 힘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대신 구경꾼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슈퍼스타K’가 비슷한 현상이에요. 한두 명의 성공담을 보여주고는, 다른 이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박수를 치게 하는 상황 말이죠. 그래서 신자유주의보다 무서운 게 구경꾼을 만드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물론 이 둘은 같이 가고 있지만요. 구경꾼이 되려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것보다 내가 착취를 당하지만 나는 여기에 열정을 쏟고 싶다고 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게 오히려 이 사회를 폭파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 친구들이 열정을 쏟아 붓길 바라지 않거든요. 적당히 열정을 쏟아 붓다가 탈락하면 구경꾼이 돼주기를 바라는데, 아이들이 구경꾼이 되기 싫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 체제는 더 힘들어지는 거잖아요.
  최근 유명환 딸 사건 때 정부가 급하게 수습에 나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만큼 편입되길 바라는 친구들이 많은 거니까요. 민란 수준이었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더 많은 열정을 쏟아붓는 게 전혀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착취를 감수하면서도 열정을 쏟아부으려고 하는 태도가 이 체제를 폭파시킬 거라고 생각해요. 이걸 길들여졌다고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를 너무 괴물화해서, 신자유주의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걸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 각자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교실’ 이야기를 해야겠는데요. 한편으로는 은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우리가 겪어온 공간으로도 보이는데, 은유로 읽게 되면 뜬구름 잡는 소리로 끝나버린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하거든요. ‘교실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여전히 교실을 꿈꾸는’ 선생님의 말씀을 정리해주실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저는 사회과학에서 ‘그리하여 결론이 뭐냐’는 것만큼 허망한 물음이 없다고 생각해요. 사회과학의 결론은 네 자리가 어디냐, 거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느냐,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거예요.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부터 뛰어라’는 말과 같은 의미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왜 이러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앞에 나온 이야기의 대부분이 만들어진 장소가 그곳이기 때문이죠. 모든 이야기가 상영된 극장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건 앞에 나온 이야기에 대한 배신인 거예요.
  대학은 죽었어요, 그런데 사회도 죽었거든요, 역사도 죽었고요. 어떻게 보면 다 죽은 거죠, 그런데 그 폐허 속에 조그만 틈들, 빈틈들이 남아 있거든요. 우리는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가, 많은 경우 한국의 좌파나 진보들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버리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고, 이들과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윤리고 정치의 출발이거든요. 그런데 사회를 옹호하고 사람을 폭로하다 보니까 마지막에 가서 윤리가 발생하지 않는 거예요. 자기는 사회의 뒤편에 숨는 거죠. 이런 부분에서 생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지금과 다르게, 거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결론이 뭐냐고 묻거나 낯설게 받아들일 수도 있어요.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그러니까 저는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이와는 다르게, 거꾸로,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이제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 질문 하나만 남았는데요. 인터뷰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책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여러 분들과 함께 듣고 싶은 이야기라서 질문을 드리는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조한혜정 선생님이나 지근거리에 계시는 김찬호 선생님에게는 ‘문화인류학’이라는 이름표가 붙잖아요. 두 분 선생님도 그렇고 선생님의 활동도 그렇고 보통 ‘인류학’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와 달리 끊임없이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다루시잖아요. 물론 이 자체가 인류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일 수 있지만요. 한 번쯤 설명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한국의 주류 인류학자들은 저란 존재를 알지도 못하겠거니와 안다고 해도 저를 인류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웃음) 맞는 말이기도 한데, 제 학문적 기반은 현대문화연구에 훨씬 가깝죠. 그런데 방법론으로는 조한혜정 선생님께 배우기도 했고, 인류학의 방법들을 많이 쓰죠. 의도적으로 문화연구라기보다는 인류학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도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가 점점 종족화되어가는 현상을 보이는데, 저는 이걸 ‘신종족주의’라고 표현을 하는데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전에는 보편에 대한 지향이 강했잖아요, 문명화되어야 한다는 거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보편을 주장하지 않아요, 특수를 주장하거든요. 특수할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그래서 평등에 대한 요구보다는 관용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아진 거죠. 그건 ‘너희와 상관없이 우리끼리 이렇게 살겠다’라는 문화적 특수주의를 강조하는 거예요. 문화적 상대주의를 굉장히 보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해서, 자신의 종족을 본질화하는 상황이거든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죠. 그래서 저는 그간 종족을 연구해온 인류학이 이 새로운 종족을 설명할 때도 유용하다고 생각해요.

미리 말씀드렸듯이 마지막 질문은 알라딘 인터뷰의 공식 질문, 추천해주고 싶은 책입니다.

제가 소개해드리고 싶은 책은 대개 ‘불운’한 책들인데요. 우선 올리비에 라작이 쓴 <텔레비전과 동물원>을 추천하고 싶어요. 리얼리티 쇼 부분은 별로였는데 동물원 부분은 정말 좋아요. 그리고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이란 책이 있는데 절판되었죠. 일본 외톨이 문제를 다뤘는데 저자가 임상의라 상당히 쉽게 풀어썼어요. 다른 분야에서는 논형에서 나온 ‘일본근대 스펙트럼’ 시리즈를 많이 읽으면 좋겠어요. 운동회, 박람회, 백화점 같은 작은 이야기로 전체를 조망하는 작업이거든요. 우리 학문 풍토에서는 대개 거시적인 조망을 내세워야 학문 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도 탄탄하게 설명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장서용으로는 기 드보르 선생의 <스펙타클의 사회>를 권하고 싶어요. (웃음) 현존하는 학자 가운데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우만이에요. 당대를 깊이 있게 바라보면서 쉽게 풀어내거든요. 바우만의 책들도 함께 추천하고 싶네요.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조만간 강연회(http://blog.aladin.co.kr/culture/4267014)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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