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독서일기>가 출판사와 제목을 바꿔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으로 모습을 바꾼 두 번째 책이다. 서문에서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과 <빌린 책 / 산 책 / 버린 책 2>로 세 가지 책의 구분을 쉼표에서 빗금으로 바꿨는데 별다른 설명이 없어 단순한 실수인지 다른 의미를 의도한 건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표지에서는 두 권 모두 빗금으로 표현했기에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겠다. 어떻든 최근 <시사IN>과 '프레시안BOOKS'에 꾸준히 서평을 올리며 의미의 확대재생산에 열심을 다하는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1년 만에 돌아오니 반갑기 그지없다. 게다가 이번 독서일기는 '사회적 독서'의 흐름을 더욱 강조하여 각 장의 제목을 '인권의 역사는 시민권의 역사와 동일하다', '뇌관이 제거된 사회주의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시대가 달라도 인간문제는 늘 보편주의를 찾는다', '지성인이라면 거의 본능적으로 소설을 피한다', '근대는 오는가, 왔는가, 도로 갔는가'로 구성하였다. 책은 금요일에 나왔는데 등록과 판매는 월요일에 시작한다. 반가운 소식을 알리고자 책 뒷표지를 위해 따로 쓴 장정일의 글과 서문을 올린다.(빨리 알리고픈 마음에 직접 타이핑을 했는데, 짧아서 다행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가 책장이 휘기 시작한 걸 알았다, 불행이다.)
-뒷표지 글-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안에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
1994년에 출간한 첫 번째 <독서일기> 서문에, 내 꿈은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 뒤를 따르는 말이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 없이 읽는다”였습니다. 저 문장 가운데 오늘까지 제게 의미 있는 대목은 “책을 쌓아두고 원 없이 읽는다”란 소원이 아니라,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다는 것과 “딱딱한 침대”군요. 어릴 때의 제 꿈은, 수도사가 되는 건 아니고, 수도사처럼 사는 거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책을 쌓아 놓고 그 속을 파고들게 된 것이나 작가 노릇을 하게 된 것도, 다 수도사처럼 못 산 것에 대한 울분이나 앙갚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수도사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도 분명히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한 게 아니라 한창 시를 쓸 그때도, ‘나는 딱 한 권’ 혹은 ‘딱 한 번만’ 시인이 되고, 시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첫 시집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 서문에 “유고시집” 운운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므로 한 권의 시집을 낸 직후, 혹은 젊었을 때의 몇 년간만 시인으로 살고나서 곧바로 문학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문학판을 떠나지 못한 채 어정거리다보니 문학이 그만 직업이 되어버렸습니다. 떠날 때 못 떠나면 항상 이런 횡액을 당합니다.
저는, 책을 읽는 일에서 처음으로 쾌락을 느낀 어느 때부터 다른 사람의 글이나 책을 읽는 행위가 마치 제가 그 글이나 책을 쓰는 것인 양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각 속에서는, 제가 읽어주기 전에 그 글이나 책은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 게 되죠. 유아적이고 독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방식으로 ‘나’를 바쳐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에 공감하고자 했습니다. 예의 <독서일기>tjansdp "나 아닌 타자의 동일성에 간섭하고 침잠하는 일“이라고 썼던 게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저는 많은 책들의 의사 저자가 되고 양부가 되었습니다. 저에겐 그게 쾌락이었습니다.
쾌락이란 어떻게 보면 모순되고,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전체에 몰각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고, 전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명료하게 느끼는 쾌락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느끼는 쾌락이 전자라면, 신비주의에 귀일해서 얻는 쾌락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생각에 완전히 녹아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반성적이 되거나 자각을 얻기도 합니다.
-서문-
책은 파고들수록 현실로 돌아온다
이번에 출간하는 <빌린 책 / 산 책 / 버린 책 2>는 1994년부터 내기 시작한 <독서일기>의 아홉 번째 책이다. 새로 책을 낼 때마다 서문이랍시고 써왔으니, 서문을 쓰는 일 또한 아홉 번째다.
서문은 그 책의 요약이자 지은이의 집필 목표 내지 동기를 적고, 아울러 자기 작업의 한계와 차후의 계획을 밝히는 글이다, 여러 장르의 책을 내면서 그런 일에 숙달됐다면 숙달됐을 텐데, 이 연작물은 특별히 매 권의 서문을 달리 할 게 없는 책이다. 그런데도 편집자는 항상 깅고 멋있게 써주길 바란다. 그렇게 어렵게 쓴 게 <독서일기>에 쓴 서문들이다.
세상사는 고진감래던가? 언젠가 모처로부터 독서에 대한 강의를 해 달라는 청을 받고, 16년 동안 쓴 여덟 권의 <독서일기>에 쓴 서문만으로 두 시간 강의를 메운 적이 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그 서문들이 나의 독서관을 잘 요약하고 있으면서, 시간에 따라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내 생애를 지배한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독서론은 ‘독서는 극히 개인적인 쾌락’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흔두 살에 이르러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독서론에 당도하게 됐다. 그 차이를 매개한 것은 개인적이고 문학적으로 겪게 된 적지 않은 변화였고,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회적 영향 탓도 컸다.
지난번에 나온 <빌린 책, 산책, 버린 책>의 서문은 “무릇 책을 읽는 일은 도가 아니다. 이번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로 난 길이다”라는 말로, 변화된 내 독서론을 다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16년 동안 쓴 여덟 권의 <독서일기>에 쓴 서문만으로 두 시간의 독서론을 펼친 자리에서, 나는 이런 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자문하며 독자 인민들의 조언을 구했다. 작가의 독서론으로서는 마치 초등학교 학생들의 초보적 윤리와 같은 ‘독서는 현실 돌아오기 위해서다’보다, ‘독서 쾌락론’이 훨씬 낫지 않은가? 장고 끝에 악수도 있고, 죽 쒀서 개준다는 말도 있다. 수십 년이나 책을 읽고 나서, 고작 상식과 계몽에 낙착하고 보편주의에 투신한다? 어디로 더 나갈 데가 없을까?
이번 서문으로 원래 하고픈 말은, ‘인문학 붐’이나 ‘고전 읽기’ 대신, ‘사회적 독서’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또렷이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라고 쓴 2004년부터, 나는 사회적 독서를 해 온 셈이다. 또 실제로 이번 책은 거기에 부합하는 책과 주제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독서론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앞서 살짝 비췄던 내 마음 속의 번민과 좀 더 부대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