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에 공부는 그만 하면 됐으니 적당한 사람을 만나 시집가란 말을 처음 들었다. 당시 내가 들었던 말의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받았던 인상은 이러했다. 지금까지의 너의 삶은 결혼을 위한 스펙쌓기에 지나지 않아.


왜냐하면 그때 내 대답만큼은 또렷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러려고 지금까지 날 교육시켰어?"


그때까지의 나는 이 사회의 공적인 영역 어딘가에 내 몫의 자리가 있는 줄 알았다. 나의 적성과 재능이 맞는 곳에서 가치를 창출하며 누군가를 이롭게 하고 공동체에도 기여하는 삶을 살 줄 알았다.


나는 늘 모범생이었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산 이유 중엔 분명 그런 목적의식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 결혼을 위한 것이었다고? 그 순간 내 온 존재는 쪼그라들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딱 사라지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엄마가 설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부는 언제든 내 방패가 되어주었기에, 그때의 나는 대학원에 갔다. 미국으로 갔다.


<캘리번과 마녀>를 읽으면서, 자본 축적 시기에 노동자와 여성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놀랍도록 유사해서 소스라쳤다.


(152) 곧 가내여성노동은 모두 "집안일"로 분류되었고, 가외여성노동에 대한 보수도 남성노동의 보수에 비해 적었으며 생계유지에도 불충분했다. 결혼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여성은 당연히 생활능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돼서, 독신여성은 설사 임금을 받고 있는 경우라 해도 마을에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가장 분통이 터지는 점은 중세 후기에 이미 인류에게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택하지 않을 기회, 여성을 공유재로 착취하지 않을 기회, 부와 계급과 젠더 면에서 보다 평등한 체제를 모색할 기회.


나는 지금도 차별 일반이 이해되지 않는다. 여성, 아이, 장애인, 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 인간 종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한 착취와 혐오는 결국 그 착취와 혐오를 가한 주체에게 되돌아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이 책에서도 그런 예를 찾을 수 있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자 노동력이 부족해졌고, 노동자들은 유리한 고지에서 반봉건투쟁과 지위 상승 투쟁을 벌일 수 있게 된다.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았던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는 노동자들의 연대와 결속을 와해하기 위해 여성 혐오 카드를 꺼내든다. 더 낮은 계급의 여성에 대한 집단 강간을 합법화하고, 매음굴을 조성하고, 재생산 노동의 가치를 격하시킨다. 재생산의 가치가 떨어지면 노동력의 가치도 떨어진다. 여기에 인클로저와 "가격 혁명"이 더해지자 노동 임금은 폭락했고, 노동자 계급 전체가 빈곤과 굶주림으로 내몰린다. 이제 당면과제는 오로지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한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뜻을 모을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이제 빵을 위해 서로를 약탈한다. 다수가 먹고 사는 문제에 허덕일 때 소수의 특권 계급은 견제없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134) 자본이 자신의 규칙을 강요하기 위해서 노동력으로부터 재생산 수단을 박탈해야만 하는 만큼, 빈민화, 반란, "범죄"의 증가는 자본축적의 구조적 요소다.


그런데 인간이 정말 이 정도로 어리석다고? 이 정도로 조작당하기 쉽다고? 본인이 저지르는 차별과 혐오의 대가에 정말 이 정도로 무지하다고? 아렌트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주변만 둘러보아도 살아 숨쉬는 예시들이 수두룩하다. 아직 본격적인 마녀사냥까지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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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2-07 17: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결혼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크게 분노한 지점은 바로 그거였어요. 대학공부까지 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월급을 받아 저축한 이유가, 시집가기 위해서라는거야? 제가 여기에 너무 빡이쳐가지고 난리난리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다들 그렇게 살아‘ 였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여태 공부하고 그걸 가지고 취직하고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돈을 벌었는데, 그렇게 벌어서 모은 돈으로 결혼을... 하는 거라니. 인생 진짜 너무 억울한거에요. 뭔가 대단히 억울해서 미치겠더라고요. 그랬더니 결국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책먼지 님의 페데리치 독서를 응원합니다. 힘내세요!!

책먼지 2023-02-07 18:40   좋아요 3 | URL
저도요 진짜 피가 차게 식으면서 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ㅠㅠ 어떻게 ‘다들 그렇게 살’ 수가 있죠?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냐고요..ㅜㅜ 억울하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데리치 읽고 여성주의 독서 모임 책들도 차근차근 따라잡아볼게요!!

공쟝쟝 2023-02-07 19: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같은 책인데 책표지가 제 책 표지보다 예쁜거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 책은 책등 분홍색임)ㅋㅋㅋ 말해봐요 먼지님 mbti 찐 j시죠? … 찐 j.. 극 j… 사진 너무 정갈해…

책먼지 2023-02-07 22:50   좋아요 2 | URL
아니.. 여기 왜 이렇게 똑똑하고 눈치빠른 분들 많으신가요!! 극 제이 맞습니다ㅋㅋㅋ (조금 더 있음 제 mbti 통으로 맞추실듯..)

단발머리 2023-02-07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데리치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가인데 책먼지님 방에서 만나니 더더욱 반갑네요^^ 앞으로도 분노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ㅎㅎㅎ

책먼지 2023-02-07 23:04   좋아요 1 | URL
너무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씀하시니 페데리치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합니다(이 책 떼면 혁명의 영점까지 쭉 달려보려고요)!! 심호흡하고 단발머리님 서재 놀러가서 정리해주신 것 참고해야겠어요!! 해제가 잔뜩 있는 이곳 너무 좋네요 진짜..💕

은오 2023-02-08 04: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먼지님도 대학원을 거쳐오셔서 날 위로하셨던 거구나....🥹
저는 제가 미자였을때 한국에서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덕에 빨간약 먹고 성인이 되자마자 세상이 여자에게 부과하는 의무와 압박에서 벗어난 마인드를 갖고 살았습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아니었으면 저 정말....(침묵) 혼자 깨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캘리번의 마녀는 안그래도 눈에 띄는 표지디자인인데 먼지님이 사진을 예술로 찍으셔서 더 눈에 띕니다ㅋㅋㅋ

책먼지 2023-02-08 10:01   좋아요 2 | URL
대학원생인 거 알자마자 안쓰러움 폭발..🥹 눈물 닦고 시작할까요.. 은오님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늦건 빠르건 분명 혼자서도 깨쳤을 거예요!! 제가 자랄 때는 여자‘도’ 뭐든 할 수 있다와 실질적인 성차별이 공존해서 그 괴리가 너무너무 힘들었거든요(시대의 한계로 주위 어른들이 상호배치되고 스스로도 모순적인 메시지를 보내시니 더 혼란과 파국)!! 억울한데 한없이 억울하고 늘 분하고 화가 났는데 그걸 제때 포착할 수도 제대로 언어로 정제해 표출할 수도 없었어요!! 그런 면에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던 용감하고 똑똑한 여성들에게 그저 박수와 감사뿐.. 책이 예쁘면 더 막 읽고 싶고 갖고 싶지 않나요? 은오님 책을 신전에 모시는 타입이란 걸 미리 예습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렇게 ㅅ 자로 꺾여있는 거에 철렁하셨을 듯..

은오 2023-02-08 09:29   좋아요 2 | URL
아 ㅠㅠ 맞아요. 그리고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요!! 제 생각 그리고 말뿐인 말/실제 현실 사이의 모순에서 갈팡질팡할 때가 있습니다. 속에 있던 묘한 꺼림직함과 분노 의아함이 페미니즘 접하고서 제대로 포착되고 언어로 정제된다는 것. 이거 정말 저도 경험했고요. 역시 여자들 이 과정이 다 똑같아....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읽으셨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먼지님의 책은 제 책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책먼지 2023-02-08 10:00   좋아요 2 | URL
여전히 갈 길이 멀죠ㅠㅠ 어떤 땐 이게 정말 나아진건가?? 그냥 교묘해진 거 아니야?? 싶기도 하고요.. 그 각성의 순간은 진짜 잊을 수가 없죠ㅠㅠ 절대로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은오님 빨간약 비유 진짜 찰떡!! 으아ㅋㅋㅋㅋ 내 책엔 엄격하지만 남의 책엔 관대하다!!! (저도 책 깨끗하게 보는 편인데 은오님 글 읽고 항복, 이게 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