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몸이 힘들었다. 침대에서 나오기도 싫었고, 집밖으로 나가기도 싫었다. 그런데 아직 편지를 쓰지 못했단 게 떠올랐다. 내일이 올케 생일이라 오늘 부모님댁에서 모이기로 했다. 나는 선물 대신 현금을 준비했다. 현금을 선물로 만들려면 편지를 써야 한다. 한번 해야할 일이 떠오르면 더는 침대에 누워있을 수 없다(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다). 진심과 애정은 가득 담되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일어났다(언감생심 글로 웃기겠다는 꿈은 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편지지 세 장을 버리고서야 목표 설정이 과했단 걸 깨달았다(더는 버릴 편지지도 없어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의 굿즈로 받은 편지지를 헐어야 했다). 내용은 이쯤에서 타협하고 포장에 신경쓰기로 했다.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 편지지를 묶고 있던 노끈을 보니 영감이 떠올랐다. 이게 또 알라딘 굿즈로 받은 '암모나이트 화석 실링 스탬프'와 기가 막히게 어울릴 것 같았다.



원래 밀랍 녹이다 불도 붙고, 촛농도 여기저기 떨어지고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제법 그럴 듯한 모양이 되어 짐을 부려두고 도서관에 상호 대차 도서를 찾으러 다녀왔다.



햇살도 좋고 책도 참 좋은데 내 체력이 문제다.


일단 집으로 후퇴해 바닥에 누워있다 간신히 일어나서 부모님댁으로 출발했다. 어머니가 아직 올케 선물을 사지 못했다고 함께 골라달라고 하셔서 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로 한 역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려서, 출발하면서 미리 카톡을 보내두었다. 사람이 많았는데도 운이 좋아서 지하철에서 앉아서 이동할 수 있었다. 오늘 빌린 책을 정신없이 읽다가 내릴 역이 되어 카톡을 확인해보니 어머니가 카톡을 이제 봤다고 준비하고 나갈테니 백화점에 있으라고 하셨다. 식품관을 한 바퀴 돌고 커피를 사도 핸드폰이 잠잠하기에 백화점 안의 교보문고로 이동했다. 편지지가 다 떨어진 게 생각나 핫트랙스에서 고르고 있으려니 전화가 왔다. 주차할 자리가 없어 헤매고 계시다고, 일단 다른 데 들러서 꽃부터 사오시겠다고, 근데 교보문고에 있지 말고 백화점 1층에 있으라고. 책도 좀 보고 싶었으나, 부랴부랴 계산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시질 않고 아예 연락도 되지 않아서, 새로 생긴 빵집을 구경하다 몇 개를 골라 계산하고 아예 백화점 밖에서 기다렸다. 정확히 어디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마음이 조급했다. 계속 연락이 되지 않으면 그냥 버스를 타고 부모님댁에 가 있을 생각으로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체념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어머니 전화가 왔다. 백화점 1층이라고 하셔서 다시 되돌아갔다. 역에 세시 반쯤 도착했는데 어머니와 다섯시에 만났다. 뭘 사기엔 너무 늦어서 바로 동생 부부를 데리러 갔다.





1차로 수산시장에서 킹크랩과 회를 먹고, 당이 제로라는 '새로' 소주도 마셨다. 2차로 부모님댁으로 가서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자르고, 과일과 케이크를 안주 삼아 처음엔 조지아산 화이트 와인, 두병 째는 리슬링을 마셨다. 열 시쯤 되어 동생 부부가 일어나기에 나도 따라 일어났다. 맛있었고, 즐거웠고, 행복했지만, 잠은 집에서 자고 싶었다. 몸이 힘들어서 더, 혼자,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었다. 월요일부터 또 일을 해야 하니 차라리 오늘 무리하고 일요일은 온전히 쉬고 싶었다. 그래서 늦은 시간이니 자고 가라고 부모님이 만류하시는데도(내일이 보름이니 남아서 부럼도 깨고, 부모님과 함께 찹쌀로 지은 잡곡밥과 나물도 먹고 했으면 훨씬 좋아하셨을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한시간반의 여정을 반복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를 다 읽었다.



아니다. 생각하는 여자는 누구와도 함께 잠을 자지 않는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서운하게 만들고 걱정을 끼치게 될 걸 알면서도 혼자 있고 싶어한다. 아프고 힘들수록 더 그렇다. 나는 기대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랐고, 기댈 자리조차 박하게 내주는 이런 이기적인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럴 수밖에 없는 내가 쉽게 용서되지 않는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면서 속이 상해서 쉽게 잠들지 못한다.


내일은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을 꺼두고 잠을 오래 잘 것이다. 집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않을 것이고, 나간다해도 그건 오로지 스스로를 위한 일이 될 것이다. 아무런 의무도 이행하지 않을 것이고, 푹 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잘 도착했다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고, 내일 잠수를 타도 되냐고 짝꿍에게 미리 허락받았다.



이 책은 꼭 지도 같아서,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있는지 그 좌표를 찍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독자는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 해러웨이, 시몬 베유,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알게 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무릇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다시 제시하는 것'과 '대표하기'를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이 걸출한 여성 사상가들의 대표적인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맞으나 그게 이들의 전부를 보여주진 않는다. 독자로 하여금 소개된 이론에 매력을 느끼게 해서 이들의 저서를 찾아 읽고 싶게 만든다면, 그게 이 책이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이 될 것이다.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 해러웨이, 시몬 베유,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읽고, 나름대로 소화해서, 입문자가 읽기 좋게 요약해 낸 저자의 두뇌가 부럽다.

젠더 규범이 누군가의 삶을 지워버린다면, 그러한 삶이 살 만한가 물어야 한다. 젠더의 문제는 살 만한 삶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고, 사회적 죽음이나 실제 죽음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에 직접 맞닿아 있다. 문젯거리로 등장한 젠더는 몇몇 사람만의 논쟁거리가 아니며, 분명 보편적 삶의 맥락 위에 놓여 있다. - P79

버틀러는 이삭이 어렸을 때, 여자 둘이 부부인 우리 가족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삭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저에게 이상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고요, 진짜 어려운 건 집안에 두 명의 학자가 있다는 거예요."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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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2-05 07: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편지지 세 장을 버리면서 정성스럽게 쓴 편지라니... 그런 편지 받는 분은 너무 기분이 좋겠어요. 돈도 좋지만 요즘 세상에 이런 편지 받는 게 더 힘들다! (둘 중에 고르자면 돈이긴 하지만 먼지님은 둘 다 선물하심 ㅋㅋㅋㅋ) 먼지님도 힘들땐 잠수타고 방에 박혀있는 타입. 저도 그렇습니다.
<생각하는 여자...> 이 책 담아갑니다! 먼지님 글 잘 읽고 있어요. 역시 번역가셔서 남다르다고 느끼면서요. ㅋㅋㅋㅋ

책먼지 2023-02-05 10:00   좋아요 2 | URL
알라딘에 댓글다는 문화가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여기서 두분 댓글 보게 되니 너무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제가 두분 글에 먼저 반했는데 친구신청할 생각은 못하고 소심하게 좋아요만 누르고 왔거든요(누를 수만 있다면 백만개쯤 누르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두분은 용감하셔서 좋으면 냅다 친구신청해버리시는군요!!

은오 2023-02-05 16:04   좋아요 2 | URL
저도 알라딘 온지 2달도 안됐는데.... 처음에 뭣도 모르고 그냥 막 친구신청 했거든요? 근데 다 받아주세요!! 그냥 하셔도 돼요!! ㅋㅋㅋㅋㅋ 진짜 딱 한 사람.... 저 밑에 고양이 저 분.... 저 분만 안받아줘서 저분한테는 직접 댓글로 친구신청 받아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공쟝쟝 2023-02-05 07: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와 읽는 책들이 비슷해서 잠시 놀랐다가, 저랑은 다르게 너무 정갈한 글에 잠시 숙연(ㅋㅋ)해졌다가
정희진 매거진에 내적 친밀함 머리 끝까지 폭발해서 ㅋㅋㅋㅋ 친구 신청 하고 갑니다!
놀라셨음 죄송합니다. 근데 위에 댓글 단 사람 니가 왜 여기서 나와? ㅋㅋㅋ

은오 2023-02-05 07:5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빠르죠? 처음 뵙는 분이 제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가셨길래 서재 구경하러 왔다가 숙연해지는 정갈한 글빨에 반해 제가 친구신청을 갈겼습니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2-05 07:51   좋아요 2 | URL
얘 친구신청 받아주면 곧 결혼신청합니다! 책먼지님 나도 받아주세요!! ㅋㅋㅋ

은오 2023-02-05 08:1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먼지님 마음의 준비 하세요 이미 결혼하셨다는 거 알지만 그건 제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책먼지 2023-02-05 10:01   좋아요 1 | URL
헛 소심한 좋아요도 위험했던 것인가요!!

책먼지 2023-02-05 10:09   좋아요 3 | URL
은오님 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저는 이말이 너무 머쓱하더라고요)와 결혼도 아이도 싫다는 데 합의가 되어서 느슨한 형태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공쟝쟝 2023-02-05 10:17   좋아요 2 | URL
친구신청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런 선진적인 문화(?)를 먼저 수행하고계신 훌륭한 커플이군요!! 하지만 생각하는 여자는 혼자 자기 때문에 저는 부럽지 않…. 중얼중얼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

책먼지 2023-02-05 10:23   좋아요 2 | URL
저는 일단 두분이 글로 웃기시는 거 보고 와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지 하고 이미 반해버렸고요. 그런 두분이 글잘쓴다고 우쭈쭈해주셔서 막 간질간질하고 행복하고 그렇습니다. 책 취향도 그렇지만 쓰신 글에서 공감할만한 점이 너무 많아서 제 안에서도 이미 내적 친밀감 폭발.. 오늘 폰 안보겠단 결심 깬 내 자신 잘했다!!

책먼지 2023-02-05 10:2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그쵸 있어봐야 어차피 생각하는 여자는 혼자 잡니다!! 이제 막 친구된 사람이랑은 놀아도 짝꿍에겐 잠수한다!!

공쟝쟝 2023-02-05 10:27   좋아요 2 | URL
어서와요, 종종 함께 놀아요!!! 먼지님은 너무 단아하셔서 웃기기 힘드시겠지만 ㅋㅋㅋㅋ 분명 자신만의 유머코드를 계발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모두 자기만의 개그방식이 있다!💕

잠자냥 2023-02-05 10: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위의 두 인간은 정갈한 남의 집에 와서 댓글로 어지럽히는 짓은 여전하군요! 저런…..

공쟝쟝 2023-02-05 10:2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그집 고양이 여섯마리가 똥 스키 타서 우리집 보다 지저분하고 냄새난다는 소문이 자자한데요🗿
이건 아셔야 합니다.
<떠든 사람>
은오
공쟝쟝
잠자냥

책먼지 2023-02-05 10:36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최근 글을 보니 친구되기가 무척 어려운 것 같았는데 친구신청 흔쾌히 받아주시고 먼저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그저 황송..💕

잠자냥 2023-02-05 10:45   좋아요 1 | URL
먼지 님은 그 저만의 테스트에 가볍게 통과. 일단 희진쌤 강연 다녀온 글에 좋아요를 누르신 걸 보고 그날 오신 분이구나 해서 거기서 그냥 친구 신청받기로 했었습니다. ㅎㅎ

책먼지 2023-02-05 12:09   좋아요 1 | URL
강연을 못 가서 잠자냥님의 현장 스케치로 헛헛함을 달랬는데 그덕에 테스트에 통과했군요(무르기 없기입니다)!!!

잠자냥 2023-02-05 12:13   좋아요 1 | URL
네 그래서 먼지 님 북플 흁어봤는데 희진쌤 책 여럿 읽은 게 눈에 들어와서 수락(?)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희진쌤 책 읽은 사람도 제 테스트에 포함되네요. ㅎㅎ

책먼지 2023-02-05 12:30   좋아요 1 | URL
이런 면에서도 희진쌤 덕을 보는군요!!! 잠자냥님 239명의 팔로워들의 치팅을 막기 위해 이 꿀팁은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헛.. 아니다.. 사방팔방 소문내서 희진쌤 책 좀 읽게 할까봐요)

2023-02-05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5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3-02-06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먼지님이 어떤 분인지 아직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요즘 제가 좋아하는 분들과 관련하여 자주 보이셔서 친구신청합니다.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한다! 솔선수범(응?)

책먼지 2023-02-06 11:48   좋아요 1 | URL
수하님 제가 먼저 친구신청하려고 서재로 찾아가 읍소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먼저 선수쳐주시면.. 너무 감사합니다😭😭

건수하 2023-02-06 11:49   좋아요 1 | URL
앗 저를 혹시 알고 계셨다면 반갑습니다 ^^!

책먼지 2023-02-06 12:09   좋아요 1 | URL
다락방의 미친 여자 참고 도서 정리해주신 페이퍼 얼마전에 발견하고 신세지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를..🙇‍♀️

건수하 2023-02-06 13:23   좋아요 1 | URL
도움이 되었다면 기쁩니다 ㅎㅎ 자주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