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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와 입 그리고 코
곽흥렬 지음 / 맑은샘(김양수) / 2024년 10월
평점 :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과는 다르게 내용적으로는 꽤 연륜이 느껴졌던 수필집 한편을 만났다. 최근에 읽었던 여타 책들과는 다르게 처음 보는 어휘와 표현들이 그걸 증명해 주고 있었는데, 그래서 몇몇 단어들은 검색을 통해 정확한 뜻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책에 실린 내용 전반의 이야기들은 저자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찰하거나 의미를 되새겨보는 내용들이 주를 이뤘는데, 이제는 사라진 풍경과 모습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읽는 독자의 연령대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이를테면, 부모님 세대들에게는 추억과 공감이, 요즘 세대들에게는 처음 접해보는 이야기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에는, 저자의 삶과 추억, 당시의 풍광들을 비롯해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발견, 깨달음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다.
단순히 삶의 체험에 대한 내용만 서술하기 보다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사유에 대해 함께 담고 있어, 읽으면서 나 역시 함께 사유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1부에서부터 시작해 5부까지 읽다 보면, 뭔가 과거에서 현재로 서서히 넘어오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실제로 저자가 담고 있는 주제가 그러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공감 가는 내용들은 주로 후반부에 많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딱 한 가지 만큼은 '꼰대 같아!'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이후 부랴부랴 저자의 프로필을 검색해 나이를 확인해 보니 60대인 걸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나이를 감안해도 현시대와 너무 동떨어진 사상이라 받아들이기 좀 힘들었다.
이외에는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 부족한 것, 넘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한 번쯤 멈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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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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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되지만, 비록 잘 쓰지는 못해도 나름대로는 혼을 쏟아서 썼다는 것만큼은 감히 자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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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일생 동안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눈곱만큼 한 작가로서의 양심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2~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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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어도 책을 내는 작가들이 기본적으로 이런 마음가짐은 장착해야 한다고 본다. 타인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귀하게 여겨주는 마음.
그게 결국 쌓이고 쌓여 오래도록 독자와 작가를 이어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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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어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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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요하다: 재물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부유 vs 부요
부유: 재물이 넉넉함
부요: 생활이 넉넉함
●오불관언: 옆에서 일어나는 일에 모른 척하는 모습
●나타하다: 행동, 성격 따위가 느리고 게으르다.
●하마: 본래는 '벌써'라는 뜻이지만, '얼른'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음
●간구하다: 바라고 구하다.
●일쑤: 흔히 또는 으레 그러는 일
●설하다: 도리, 이치, 학설 등을 풀어서 이야기하다.
●부박하다: 천박하고 경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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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좋을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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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와 풍요는 추억이 깃들 공간을 앗아가 버렸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 어느 때라도 득달같이 대령해 주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아쉬움이랄까 결핍 같은 부족함이 갖는 의미를 더 이상 배우지 못한다.
모자람이 없으니 기다릴 것도 없다. 어렵게 만나고 어렵게 해어지던 뚝배기 식에서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냄비 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만 잔뜩 쏟아 놓다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건성으로 흘리는 인사 한마디씩을 뒤로한 채 각자 타고 온 자동차를 몰고 뿔뿔이 흩어져 간다.
깔끔한 뒷마무리, 구접스럽고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참 좋긴 하다. 하지만 어쩐지 동지섣달 칼바람 앞에 선 듯 가슴이 시려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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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요즘 시대를 꼬집는 말이 아닐까 한다. 아쉬움, 부족함, 결핍이 없으니 내가 먼저고 내가 우선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배려나 기다림을 기대할 수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참 깔끔하고 좋은데, 또 다른 면에서는 너는 너 나는 나, 대면하고 있어도 왠지 따로 노는듯한 기분이 들어 씁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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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순간순간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존재자라고 하지만, 어찌 보면 '불편해서 치열함'과 '편리해서 나타함' 사이의 선택을 놓고 간단없이 고뇌하고 번민하는 유한자이기도 하다. 고통은 우리를 벼리는 용광로가 되지만 안락은 우리를 좀먹히는 벌레가 된다. 이러한 불변의 이치를 번연히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무모하게 안락 쪽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 또한 인간인가 한다.
영원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이 삶의 모순, 그 앞에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길을 물으며 더듬이 잃은 방아깨비처럼 갈팡질팡 헤매면서 살아간다.
8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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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이 두 가지 선택은, 모순이지만 또 잘 어우러지는 한 쌍이기에 우리 삶이 이토록 잘 굴러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람이기에 항상 치열할 수 없고, 또 항상 나타한 모양새로 살 수 없다.
때론 불편하지만 치열하게, 또 어떨 때는 편리한 것을 누리며 느릿하고 게으르게 살기에, 꿍짝꿍짝 밸런스가 맞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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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의 병으로 고통받는 이에게는 울음이 최고의 치유제가 된다. 웃음은 스트레스를 날려 주지만 울음은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이리라. 많이 웃고 나면 마음속이 허전해지는 데 반해 실컷 울고 나면 가슴속이 후련해진다. 이것이 울음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가치가 아닌가 한다. 웃음이 엔도르핀을 자아낸다고 하지만 울음이 생성해 내는 엔도르핀 수치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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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흔한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때가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임이 분명할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진실한 울음에서 가슴을 녹여내는 순정한 인간상을 만나곤 한다. 분별없이 웃음이 헤픈 사람치고 생을 진지하게 사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나이 들면서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생에 대한 진정성이 높아 간다는 방증일 터이다.
울어야 할 때는 마음 놓고 실컷 울어 볼 일이다. 울고 있는 모습처럼 인간적인 것이 없기에.
84~86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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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많아진다고 한다. 어쩌면 공감, 연민, 경험들이 어우러져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눈물이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한다.
과거에는 눈물을 아껴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고는 했는데, 요즘 시대에는 오히려 필요할 때는 속시원히 펑펑 울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마음에 차곡차곡 채워두지 말고, 눈물로 속시원히 씻어내라며, 그렇게 비워내고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라 이야기한다.
웃음은 때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 하지만 눈물만큼은 무언가를 비워내기 위해 사용된다. 만약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피를 키워가고 있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때까지 버티지 말고 이제 그만 비워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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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물일지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어 내지만 뱀이 마시면 독을 뿜어낸다고 <화엄경>은 설하여 놓았다. 이를테면, 투입 조건은 똑같더라도 산출 결과는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평소 삶을 영위해 가면서 별 의식 없이 주고받게 되는 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편으로는 칼처럼 요긴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칼같이 위험한 것이 말이라는 무형의 에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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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무릎에 탈이 나서 찾았던 어느 병원의 접수대 옆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 있었다.
"개에 물린 사람은 반나절 만에 치료받고 돌아갔고, 뱀에 물린 사람은 사흘 만에 치료를 끝내고 돌아갔다. 그러나 말에 물린 사람은 아직도 입원 중이다."
아!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이 촌철살인의 경구라니....
무릇 그 무엇이든 소중한 것일수록 함부로 다루어서는 아니 되리라. 이것이 세상사의 엄숙한 이치 가운데 하나임을, 말을 통해서 새삼 가르침 받는다.
134~1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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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입 조건은 같은데,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칼처럼 요긴하게 쓰지만, 또 어떤 이들은 칼같이 위험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데, 요즘 말을 사용하는 이들을 보면 '곱다, 예쁘다'라는 말보다, '위험하다, 날카롭다'라고 느껴지는 때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이제는 나의 말은 조금 아껴두고, 타인의 말에 경청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필요한 때에 적절한 말로 마음을 나눠보면 좋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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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프랭클린의 명언을 인생살이의 교분으로 환치시켜 보고픈 충동을 느낀다. 둘 사이에 유비가 서로 썩 어울림직 하다는 전제를 세우고 들어간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이야기쯤이 될 것 같다.
'많이 사귀어라, 그러나 많은 사람을 사귀지는 마라.'
이래 놓고 보니 이 말은, 사람을 사귀되 어중이떠중이 덮어 놓고 사귀지 말고 진정 사람다운 사람을 깊이 있게 사귀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거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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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이면, 지금껏 수십 년 세월 동안 그리 적달 수 없는 책을 읽었으되 과연 얼마만큼 가려서 읽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육십갑자가 넘도록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친구를 사귀었으되 그 가운데 정작 몇이나 제대로 사귀었는지 곰곰이 되짚어 보게도 된다.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영 자신이 서지 않는다. 나의 독서도 그리고 교우도는, 모르긴 모르지만 그예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제까지의 부끄러움에다 또 다른 부끄러움들을 보태게 될 판이다.
사람살이, 이래저래 호락호락하지 않은 화두다.
228~22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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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질'이다. 독서든, 교우관계든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특히 나이를 먹어갈수록 절실히 느끼게 된다.
제대로 아는 것, 제대로 사귀는 것, 제대로 읽는 것! 그것을 지금부터라도 실천하면서 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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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스럽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이가 생각이 깊고 의젓하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이는 어른처럼 영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순수성을 잃은 어른 같다는 뜻도 아니다.
어른들의 노래를 멋도 모르고 불러 대는 아이들의 행동은 절대 어른스러움이라 할 수 없다. 그냥 어른 같음일 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런 어른 같은 모습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잘한다" "잘한다"며 박수를 쳐 댄다. 참 한심스럽고도 서글픈 사회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른스러움'은 긍정의 어감으로 쓰이는 말인 반면, '어른 같음'은 부정의 어감을 지닌 말이 아니던가.
24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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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며 문득 얼마 전에 본 유튜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삼대가 한 카페에 머물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아이는 할머니의 차와 함께 곁들여 나온 쿠키를 탐낸다. 그리고 이내 가져다가 반으로 쪼개고서는 작은 조각을 할머니에게 건네며 할머니 작은 거 먹으라고 말한다.
이를 보고 아이의 엄마는 '자기 몫을 야무지게 챙긴다'라며 칭찬한다. 보면서 '헛'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댓글은 더 가관이었다. 칭찬 일색!
'아이가 귀엽다'와 같은 댓글을 남기는 것을 보고 '요즘 엄마들은 다 이런가' 싶었다. 저자가 말하는 '어른스러움'과 '어른 같음'과는 조금 벗어난 주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위의 글을 읽고 잘못된 어른들의 태도와 행동이 눈에 많이 밟혔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배운다. 아이들은 기억 못 할 거라고, 잘 모를 거라고 이야기하는 어른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름 속으로 잘하는 행동이구나, 이렇게 하니깐 어른들이 칭찬해 준다고 느끼지 않을까?)
트로트를 잘 부르는 아이를 보고 박수 치고 좋아하는 어른들, 할머니의 쿠키를 가져다가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는 아이를 보고 칭찬하는 엄마를 보고 배운 아이는 후에 어떤 어른으로 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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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재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그 풍경 너머, 공원에는 무료를 달래는 노인들로 넘친다. 자연 노인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귀하면 대접받고 흔하면 괄시당하게 마련인 세상사의 엄숙한 이치는 어느 누구라도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장수가 과연 축복일까 재앙일까. 단순 논리로 따지면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쨌든지 오래오래 생을 누리다 떠나는 것이 지상 최대의 축복일 수도 있으리라. 마르고 닳도록 살고 싶은 욕망은 인간 존재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초저출산 추세가 이어지는 한, 장수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점점 재앙으로 이행될 개연성이 커지는 것이 피치 못할 현실이다.
노인이 예전처럼 공경 받을 수 있는 시대는 이제 영영 물 건너간 것인가. 나날이 떨어져 가는 출산율 추이를 지켜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세상의 흐름이 자못 걱정스러워진다.
26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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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사라지고, 노인이 급격히 늘어나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한다.
남이야 어떻든 자신의 권리만, 나의 이익만 추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보이기에, 어쩌면 지금 세대들은 노인들을 괄시하고 천덕꾸러기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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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아냐?'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던 존칭어에 대한 저자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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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안팎의 청소년들이 팔구십 노인에게 뻣뻣이 선 채로 고개만 까딱거리며 인사랍시고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해댄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 제 친구인가. 연세 지긋한 어르신한테는 당연히 "안녕하십니까"라는 정중한 표현을 써야 제대로 된 인사말 아니겠는가.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지 않는 무람없는 행동이야 차치하고라도, 그처럼 예의에 어긋난 말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으니 훗입맛이 씁쓸하다.
26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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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어에 대한 다른 내용은 나 역시 공감하는 부분들이 꽤 많았다. 어색하게 극존칭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물건이나 상황에 존칭을 중복으로 사용하는 어설픈 존칭어 사용이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만큼은 공감이 안 갔다. 요즘 시대에 인사라도 하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구 사이, 지인 사이, 제자 사이 등등 인사말조차 생략되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친족 사이에서도 그런데 길거리 노인에게 인사를 인사할리 만무하다. 여기에 더해 존칭어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 큰 욕심 아닐까?
'안녕'이라고 인사한 것도 아니고, 단지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이 욕먹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너무 강건하게 이에 대해 저격하는 글을 보고는 홀로 갸우뚱했다. 나는 인사는 말 그대로 그냥 반갑게 서로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한다. 여기에 극존칭과 존칭어는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글로벌 시대, 노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이'하고 인사하는 나라도 있는데, '안녕하세요'는 양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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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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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을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어, 읽으면서 나도 함께 사유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미디어나 매체에 노출되는 것들을 보며 가끔 나 홀로 '저건 좀' 하던 것들을 누군가도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며 나 역시 공감받는 느낌을 받는다.
과거에 비해 많이 풍족해진 요즘이라고 하지만 실상 가만히 들여다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 풍족해졌지 진짜 중요한 것은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결핍이 있기에 더 해내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 바로 소통이 어렵기에 만나면 더 느껴지는 애틋함, 그래서 함께 하는 순간만큼은 서로에게 더 집중하려는 태도와 같은 것들 말이다.
관계도, 일도, 사랑도 무엇 하나 쉽게 포기하고 제대로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을 볼 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의지일까? 결핍일까? 노력일까?
아니 어쩌면 너무 넘치게 가지고 있어서 진짜 발휘해야 할 것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어릴 적 묻어둔 추억이 새록 떠올랐다가 어느 순간 삶을 되돌아보는 방향으로 꺾였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가, 사람이, 풍경이 그다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아 실망스럽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 무엇에 힘을 쏟아야 할까 생각해 보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사람의 얼굴에는 눈과 귀, 입 그리고 코가 붙어 있다. 이것이 진정 더 아름다워 보이려면, 더 아름다운 얼굴이 되려면 우리는 이것의 쓰임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이것들이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더 예쁜 것들을 눈에 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내뱉으며 그리고 좋은 향을 맡아야 비로소 우리는 완성형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
인위적으로 보이는 척, 들리는 척, 말하는 척, 느끼는척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탈만 날뿐이다. 그러니 부디 이 모든 것들을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
유한한 삶이 더 빛날 수 있도록, 후회가 남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