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시그널
브리스 포르톨라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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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언젠가부터 북적이는 도시를 벗어나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서의 삶을 꿈꾸게 되면서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에 담긴 사람들의 삶은 그런 나의 바람을 고스란히 반영한 '소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편리함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기를 선택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자칫 도시생활보다 단조롭거나 심심할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 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 다른 환경에서 저마다의 꿈을 꾸며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상이상의 다채로움과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총 10개국, 10명의 '비정형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소로'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 에세이로 담아낸 책이다.

단순히 작품으로써 담아내기 위해 찍은 인위적인 사진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해당 지역을 여행하며 그 삶에 녹아들어 담아낸 사진들이라 생생한 현장감과 생활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상할 수 없는 공간과 삶을 엿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깊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공간 자체가 예술이 되고 꿈꾸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자연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 이들을 만나러 알래스카의 섬에서 파타고니아 평원까지 카메라를 들고 여행한다. 그리고 이들이 사는 집과 주변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냈는데 살펴보면, 숲속, 섬, 등대, 알래스카 양식장, 초원, 자급자족의 형태 등 다양하다.

대부분 폐가를 고쳐 사용하거나 기존에 있던 건물들을 수리해서 사용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보다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매력적인 공간과 풍경들이 가득하다.

삶에 치여 피로와 스트레스, 부조리함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나만의 삶을 찾아 나선 이들이 보여주는 자연, 공간, 가치는 도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경이로움과 삶에 대한 충만함, 여유 등을 보여준다.

만약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을 단순히 '시골생활'로 생각하고 했다면, 이제 그 생각은 그만 접어두기로 하자. 이 책을 펼치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되고, 환상은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면서, 오직 '살아가기'에만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신호'없는 삶 속을 이제부터 자세히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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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동료들과 같은 리듬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건 아마도 다른 북소리를 듣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음악이 어디서 들려오든, 그 템포가 어떠하든,
그가 듣는 음악을 따르도록 내버려 두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혹은 숲속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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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브리스 포르톨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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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모험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프랑스의 사진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자연과 가까워지기 위해 생활방식을 바꾼 사람들의 삶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장기 사진 프로젝트를 진행한 결과물로 <노 시그널>을 내놓았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소로처럼 각자 양심에 따라 자기만의 길을 선택해 자신의 깊은 정체성과 조화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이 꿈을 추구하게 해준 너무도 소중한 자유를 그들 모두가 마음껏 향유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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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냐
핀란드, 이나리 → 핀란드, 라플란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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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통나무집에 사는 삼십 대의 젊은 핀란드 여성 티냐는 홀로 자연 속에 살며 지루할 틈 없는 매일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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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가장 가까이서 살겠다는 결심, 자신이 자란 고향 이나리로 돌아가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도시에서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일상의 부조리함을 경험하면서 이루어졌다. 바깥 날씨가 추운데도 음식을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이 젊은 여성에게는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강에 가면 손쉽게 물을 길어올 수 있는데 굳이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사용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티냐는 핀란드 남부에 있는 이위베스퀼레 대학교에서 6년 동안 생물학을 공부한 뒤, 도시의 부조리한 삶을 미련 없이 청산했다. 직업생활과 자연 속 삶에 대한 열정을 병행하기 위해 선택한 그 길은 결국 티냐에게 자연 중심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 중심인 것으로 드러난다.
1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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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수도도 전기도 없다. 화목난로로 요리와 난방을 모두 해결하며, 매일 아침 강가에 가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와야 한다. 계절에 따라 삶의 리듬이 달라지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별로 없다.
(...)
숲속에서 티냐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18~1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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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생활을 하다 부조리함을 여러 해 경험하면서 마침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살기로 결심한 티냐. 자연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기에 물질적 행복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

비록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지루할 틈이 없어 행복하다 말하는 티냐의 삶을 마주하며 떠오른 단어는 바로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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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
영국, 컴브리아 → 영국, 북부 멜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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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내가 익숙해진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지요. 내 시간과 존재를 희생하기보다는 없어도 그만인 사치스러움과 안락함을 희생하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
느림과 관조, 길에서 발견하는 의외의 것으로 이루어진 삶. 화덕에 고기를 굽고 강에 가서 물을 길어오고, 채소밭 한 뙈기로 가족을 충분히 건강하게 먹일 수 있는 삶. 배추, 감자를 사냥해온 고기와 맞바꾸는 등 이웃이나 친구들과 즉석에서 물물교환을 하는 삶. 하루 중 어느 때고 불가에서 혹은 키 큰 떡갈나무 그늘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삶.
(...)
바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 위의 삶을 선택했다.
(...)
다른 한편으로, 자발적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매우 사교적인 성격이라 시골생활을 체험하러 오는 방문객을 정기적으로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 그의 생계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생활 양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선택에 가치와 정당성을 부여해 줍니다. 때때로 확신을 잃고 스스로에게 의문을 제기할 때도 있기 때문이죠.

전통적인 교육 시스템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시스템이 우리의 지평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제한한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무엇이 되었든 다양한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런 삶이 가져다주는 작은 광채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그들도 본격적으로 꿈을 꿀 수 있도록요."

남들과 다른 길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면서 그런 삶의 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바니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들만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때때로 트레일러에서 사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더라도 말이다. "나는 결심한 대로 매우 단순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의 개인적 선택이죠. 그 선택대로 사는 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66~6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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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스러움'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얻은 '시간'과 '존재'의 중요성을 깨달은 바니는 경계의 삶을 오가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전통적인 교육시스템에서 벗어나 나를 구속하거나 제한하는 것 없이 스스로 선택한 삶을 매우 단순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택 덕분에 바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와 같은 고민이 들거나 의문이 들 때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는 오로지 나의 의지로 선택한 내 삶의 방식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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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그리스, 레프카다 → 그리스, 섬(루파키아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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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두 살인 실비아는 마흔 세 살의 남편 마리우시와 함께 이곳에 살고 있다.
(...)
그들은 스트레스 많고 과로에 시달리던 예전의 삶에서 벗어나 끝이 없을 탐색을 계속하고 있다.
(...)
루파키아스는 그녀에게 안도감을 선사해 주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새 집을 꾸미고, 이어서 다른 집들도 꾸미면서 도전과 함께하는 새롭고 열광적인 삶을 살게 되었고, 힘들었던 과거의 폐허 위에 삶을 다시 지어올릴 수 있었다.
(...)
"더 이상 잡다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자연에 둘러싸인 채 계획한 것을 실천해갔어요 확신을 갖고 실천했어요. 나는 이 장소에 깊이 뿌리박혀 있답니다. 그 사실이 나를 진정시켜주고 내가 나 자신과 조화를 이루게 해줘요. 처음으로 마침내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10년 전의 나라면 모든 것을 버리지 못했을 거예요. 시간이 곧 돈이라는 말에 사로잡혀 여기서 사는 걸 시간 낭비로 여겼을 거예요."

"자연과 좀 더 가까이 사는 삶이 나에게 과거로의 회귀를 뜻하진 않아요. 오히려 전진,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는 자연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진보를 뜻하지요."
136, 1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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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와 과로에서 벗어나 새로 선택한 루파키아스에서의 삶은 이들에게 안도감과 함께 새로운 도전과 열광적인 삶을 선물했다.

실비아는 폐허를 머무는 공간, 작업 공간,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꾸미기 시작하면서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되었다.

자연 속에 깊이 머물며 조화를 이루는 삶은 잡다한 것에서 벗어나 계획한 것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마음을 진정시켜줌으로써 뿌리 깊이 이 장소에 박혀 있다는 안정감 또한 주었다.

자연과 가까이 사는 삶에 대해 사람들은 후퇴나 회귀를 말하지만, 실비아에게는 오히려 전진과 진보를 의미한다는 말에서 자연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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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노 시그널'의 삶을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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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이탈리아, 토스카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몇 시간 떨어진 폐농가


■스카이
아르헨티나, 네우켄주 → 파타고니아 북부
남편 차노, 아들 레오와 함께 가축을 키우며 살고 있음


■벤
미국, 유타주 → 자급자족의 삶
미국 농산물 가공업의 현실을 깨닫고 자신이 소비하는 음식의 대부분을 직접 생산해서 생활하고 있는 벤!


■제리
미국, 알래스카주 → 알래스카주 굴 양식업자
번아웃을 겪고 알래스카에 정착해 굴 양식업자가 되었다. 지금 그는 잘 보존된 대자연에 둘러싸인 외딴 작은 만에 살고 있다.


■엘레나
노르웨이, 베스테롤렌제도 → 노르웨이 북부, '리틀뢰야'라는 작은 섬의 등대
그녀는 그 섬의 유일한 주인이다. 리틀뢰야는 독수리와 가마우지가 사는 67헥타르의 바위섬으로, 글자 그대로 노르웨이의 '작은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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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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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이 없는 노 시그널의 풍경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힐링하는 기분이 든다. 다른 나라, 다른 장소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연과 가까이 사는 10명의 사람들을 보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운다.

막연히 자연과 가까이 산다고 생각했을 때 떠올렸던 생각들이 하나 둘 부서지기 시작하면서 참신하고 유니크한 공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와 삶의 목적, 방향에 따라 혼자, 또는 부부, 가족이 함께 살아간다. 자연과 가까이 사는 것이 후퇴나 과거로의 회기가 아닌, 전진과 진보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 책 곳곳에는 소로의 문장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자연과 어우러지는 삶을 선택한 이들의 삶을 더없이 긍정해 주며 조화를 이룬다.

10명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신의 선택과 주관에 의해 자연과 가까이하는 삶을 선택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어디에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이 표정과 행동 곳곳에서 묻어난다.

덕분에 보는 내내 부러운 마음 반, 언젠가 나 또한 그런 공간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반으로 내내 지켜보게 되었다.

'소로'의 삶보다 21세기 '소로'의 삶은 한층 더 풍성하고 다채롭게 느껴진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나를 위한 시간을 온전히 즐김으로써 '행복'이 무엇인지를 삶 그 자체로 가르쳐 준다.

덕분에 나에게 맞는 삶,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해 깊이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오직 '살아가기'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충만함을 가져다주는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듯 매일이 특별한 하루로 채워지는 이들의 삶은 우리가 어떻게 삶을 대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함께 나만이 풀 수 있는 숙제를 제시한다. 이제부터 천천히 이 숙제를 풀어가며, 나에게 가장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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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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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마음이 전하는 눈부신 안부!"


주기적으로 하는 책 수집을 통해 알게 된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 틈틈이 시간 될 때마다 그 리스트를 마치 도장 깨기 하듯 읽어나가며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접하고는 하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왜 이제서야 이 작가를 알게 된 걸까?'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런 한편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유는 꽤나 작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슬픔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다양한 시각에서 풀어내며 표현한 방식, 여기에 더해 이 마음을 할퀴거나 상처내기보다 오히려 따스하게 감싸주듯 품어준 방식 등이 꽤 인상 깊게 다가왔는데, 한동안 그 정서에 감화되어 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듯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아끼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된 '거짓말'이 어떤 모습과 형태를 띠고 부풀려지는지, 또 어떤 그림자를 생성하고 이로 인해 어떤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지 살펴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의 장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이해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누군가를 위한 하얀 거짓말이 어떤 식으로 번져나가는지, 또 이것이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지가 주요 관건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성장 드라마이자 보살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여기에 더해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자, 오랜 시간을 지나 마침내 다다른 안부가 전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우연히 다시 만난 우진과의 인연을 계기로 용기를 얻어 시작하게 된 <K. H 찾기 프로젝트>로 말미암아 해미 자신은 물론 누군가의 마지막까지 보듬을 수 있게 된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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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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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미
-신문사 기자였다가 퇴사했음
-열세 살 겨울~열다섯 살 겨울까지 독일에서 살았음
-언니의 죽음 이후 아빠를 제외한 엄마, 동생 해나와 함께 독일 중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 G시로 이주함
-이모가 독일에서 살고 있는 데다 엄마가 대학 시절 독어교육을 전공했던 경험을 살려 독일로 유학 가기로 결정함
-언니 해리는 등교 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가스 폭발 사고로 갑자기 사망
-해미는 언니의 죽음 이후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다양한 거짓말을 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김
-이런 거짓말을 유일하게 알아챈 사람은 이모로, 이 일을 계기로 이모는 독일에 해미가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
-덕분에 레나와 한수라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빠르게 독일어를 습득하는 한편, 적응하는데도 도움을 받게 됨
-한국어 편지를 써달라는 한수의 요청으로 인연을 이어가게 되면서 한수와는 한때 특별한 사이가 되기도 함
-세 친구가 남몰래 한수의 엄마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면서 거짓말의 스케일은 더 커지고, 이후 이 일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함


■우재
-대학 때 문학 동아리에서 해미와 인연을 맺게 됨
-약대 나와서 현재 제주도에서 약사로 근무 중
-대학생 시절 연애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지만 몇 번의 우연과 엇갈림 끝에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음
-2월 중순 어느 금요일, 폐관 시간이 가까워졌을 즈음 전시장을 벗어나는 해미를 알아본 우재가 그녀를 알아보면서 재회하게 됨
-해미가 과거를 돌아보고 맞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자, 재회 후 적극적으로 대시함으로써 둘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옴


■이해리
-12월 가스 폭발 사고로 갑자기 죽은 해미의 친언니
-꿈은 환경운동가
-전교 십 등 안에 들 만큼 똑똑하고 모범생이었음
-누구보다 해미를 챙겨주고 이끌어 주었던 언니


■이모(=오행자)
-해미의 친이모
-전라남도에서 손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한 수재
-파독 간호사로 1973년 스물한 살 독일로 건너옴
-독일로 건너온 이후 처음엔 간호조무사, 나중엔 의사로 일함
-독일에 온 해미 가족을 살뜰히 챙겨주는 것은 물론 타인이 알아채지 못한 해미의 감정 상태를 누구보다 빠르게 캐치하는 유일한 사람


■레나
-독일에서 만난 한 살 위의 친구로 중등학교에 다님
-엄마는 한국인, 아빠는 독일인
-추리소설 마니아, 아르센 뤼팽을 이상형으로 생각
-한수의 엄마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에 함께 동참


■마리아 이모(=최말숙)
-레나의 엄마
-1973년 스물한 살 독일로 건너와 파독 간호사가 됨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어 다른 파독 간호사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음
-자유를 찾기 위해 독일행을 결심
-월급으로 모든 돈으로 자동차를 사서 휴가 때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유럽 전역을 다님(첫 자동차는 빨간색 중고 폭스바겐 비틀)


■한수
-레나가 소개해 준 친구로 한 살이 많음
-엄마 아빠 모두 한국인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한글로 글을 대신 써줄 사람을 찾던 중 해미를 소개받음
-한수의 아빠는 한국에서 독일로 일하러 온 광부 출신으로 몇 년 전 이혼을 해서 같이 살지 않음
-누나 한 명 있음
-엄마가 아픈 것이 아빠 탓이라고 생각. 엄마가 더 아프기 전에 첫사랑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으로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됨
-속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는 아이이며, 그만큼 입이 무거움


■선자이모
-한수의 엄마
-1973년 독일로 건너왔을 때 나이가 열아홉
-파독간호조무사 출신
-뇌종양 수술을 함. 수술 경과는 좋았으나 언제든 재발의 위험이 있음
-홀로 두 명의 자식을 키우며 생계를 유지


■한미
-한수의 친누나
-한수보다 네 살 위
-아마추어 축구팀의 미드필더
-신중한 성격으로 말수가 적은 편


■김말자 이모
-한수의 친이모
-선자 이모의 이종사촌
-선자 이모보다 삼 년 앞서 베를린에 도착해 살고 있었음
-키가 크고 남자처럼 짧은 머리의 외향을 가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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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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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를 한순간에 잃고 인생의 비극을 너무 빨리 깨달아 버린 해미. 이 일을 계기로 가족은 흩어져 따로 살게 된다. 열세 살 겨울, 아빠는 한국에 남고, 나머지 세 가족(엄마, 나, 동생 해나)은 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 중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G시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이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초반에는 독일에서 적응하는데 꽤 애를 먹는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친구를 사귀는 일이 쉽지 않았을뿐더러 언니의 죽음 이후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소극적으로 변하게 되면서 타인과 섞이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주변 사람들이 슬퍼할 것을 우려해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 숨기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서, 해미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이런 해미의 거짓말을 눈치챈 행자 이모는 세심한 부분에 신경 써주며 해미를 빛으로 이끌어 준다.

가상의 친구가 아닌 진짜 친구를 사귀게 도와주고,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려주는 등 독일에 적응할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준다. 또 공부하느라 바쁜 엄마를 대신해 해미와 따로 시간을 보내면서 해미의 마음속에 자리한 아픔을 조금이나마 희석시켜주려 노력하게 된다. 덕분에 해미는 어느 정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미는 이모가 소개해 준 한 살 위의 친구, 레나와 급격히 가까워지면서 언어는 물론 독일 생활도 빠르게 적응해 나갔고, 그러면서 레나를 통해 한수라는 친구도 소개받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과도 자주 어울리게 된다.

사실 두 친구를 비롯해 자주 어울리는 이모들은 행자 이모와 같이, 한국에서 독일로 온 파독 간호사들로 상황이나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었다. 때문에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레나와 한수, 해미가 가까워진 계기는 사실 한수의 부탁으로 인해 똘똘 뭉치게 되면서부터인데, 사정은 이러하다. 독일에서 나고 자라, 겨우 의사소통하는 것 외에는 한국어를 할 수 없었던 한수는 뇌종양 수술을 받은 엄마를 위해 한국에 있는 엄마의 첫사랑에게 한글로 편지를 써줄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 일을 해미에게 부탁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첫사랑이 누구이며 또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이 사정을 모두 들은 두 친구는 한수를 돕기로 하고 마침내 '선자이모(한수엄마)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가 발동되게 된다.

아이들은 선자 이모가 쓴 일기를 중심으로 첫사랑을 유추하게 되고, 해미가 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이모들을 인터뷰하며 첫사랑에 대해 수소문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러다 돌연 해미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세 식구는 아빠가 부산에 구해놓은 남천동 아파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초반에는 자주 오가던 편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독일 친구들과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온 뒤 계절이 세 번 바뀐 늦가을 어느 날, 한수의 소포가 도착하게 된다. 그 안에는 편지와 함께 선자 이모의 일기장 열세 권이 들어 있었는데 편지 속에는 엄마가 입원했다는 말과 함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절박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국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아 미뤄두던 중 1998년 겨울, 한수가 두 번째로 국제 전화를 걸어 울먹이며 엄마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으며, 자신이 엄마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자 해미는 한수의 절박함에 공감하며 선자 이모가 과거에 다녔던 교회를 가볼 계획이라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이내, 교회에서 K. H를 찾았다는 거짓말을 하고, 여기에 더해 계속해서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하면서 상황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후회는 밀려왔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수습을 위해 K. H가 편지를 보낼 거라는 말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해서 편지를 썼고 그것을 마침내 한수에게 보내게 된다.

편지를 보내고 한동안은 아주 그럴듯해서 한수와 선자 이모가 기뻐할 얼굴을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며칠이 더 지나자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이내 한수로부터의 전화를 피하기에 이른다.

이후에는 레나의 편지에도 더 이상 회신하지 않게 되면서 독일 친구들과는 이내 연락이 끊기게 된다. 해미는 한수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죄책감이 너무 컸고 또 친구들에게 원망을 들을까 봐 너무 겁이 나 그렇게 상황을 회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막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레나의 편지를 통해 선자 이모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는데, 한수가 보낸 것이었다. 우편물에는 해미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와 K. H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한수가 쓴 편지 속엔 엄마의 일기장과 K. H에게 쓴 답장을 K. H에게 전해달라는 엄마의 마지막 부탁을 전하는 말이 함께 쓰여있었다.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도, 거짓말로 인해 벌어진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과 독일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모아 봉인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모든 것을 묻어둔 채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퇴사 후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전에서 우연히 대학생 때 동아리 멤버였던 우재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모른 척 지나가려던 해미를 우재가 발견하게 되면서 이 둘은 재회하게 되고 다시금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하게 된다.

우재와는 대학생 시절 연애 감정을 느꼈지만, 몇 번의 우연과 엇갈림 끝에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던 사이였는데, 이번 재회를 계기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게 된다.

우재는 매일같이 해미에게 연락해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들려주었는데, 이 때문에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해미는 독일에서 보낸 시절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한다.

특히 선택한 이야깃거리는 이모에 대한 이야기로, 정확하게는 파독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즈음 무엇보다도 파독 간호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싶어 국회도서관에 출근도장도 찍고 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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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언젠가 이모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는 우재의 말이 나를 국회도서관으로 이끈 것만은 틀림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시절 '이모들'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자라는 걸 느꼈다.
6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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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모에 대한 이야기와 독일에서 보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잊고 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오래전 봉인해 두었던 하나의 장면이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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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올린 건 그 편지를 박스에 담고 밀봉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독일에서 쓴 비밀 노트들과 몇 개의 수첩 그리고 그간 독일에 있는 이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상자에 한꺼번에 담고 두 번 다시 열어보지 않을 것처럼 테이프를 몇 겹씩 붙여나갔던 장면.
(...)
나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드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이것뿐이었다. 당장 그 상자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 그 상자를 찾아야만 했다. 그 안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11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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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현듯 그 상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서 해미는 그 상자를 마침내 찾아 개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때 멈췄던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를 홀로 다시 시작하기에 이른다. 해미는 열 세 권의 일기장을 처음부터 다시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고, 비밀수첩에 기록된 내용과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다시 추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또 보다 적극적으로 주변을 탐색하기에 이르는데, 예상되는 대학교에 연락해 사람을 찾아본다거나 선자 이모가 다녔던 교회를 방문해 문의해 보기도 하고, 2주간 집에 머물렀던 이모와 대화를 이어가며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것은 물론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단서를 추적해 나가는 상황이라 중간에 게을러지는 마음이 들거나 멈추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우재로 인해 이 다시 한번 도전할 용기를 얻게 된다.

우재는 끊어질 뻔한 인연을 적극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애썼고, 마침내 이것을 알게 된 해미는 더 이상 거짓말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거나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로, 늘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짓누르고 있던 선자 이모의 일을 바로 잡기로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죄책감으로 남은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 일을 제대로 마무리해야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재에게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발로 뛰며, 정보를 끌어모으고, 이모의 일기장을 수십 번 되짚어 나가면서 마침내 해미는 열세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보이는 진짜 단서들을 수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거쳐 마침내 진짜 K. H를 만나게 되고 이로써 오랜 숙원과도 같았던 이모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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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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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후부터는 내가 언니의 언니가 될 것이다. 언니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나 혼자 살게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물론 해나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나에게는 거짓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5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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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하고 또 아껴주었던 언니의 죽음은 해미에게 있어 큰 충격이자 상처였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겪는 일이었기에 누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해미는 그저 속으로 삭이고, 숨기며, 거짓말하는 것으로 버텨냈다. 그것이 오로지 당시의 해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통해 해미가 나이에 비해 얼마나 성숙한 아이였는지, 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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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는 빈도수는 줄어들었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비밀노트를 들고 다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선 무엇보다 철저한 통제와 검토에 기반한 일관성이 중요했으니까.
5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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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비해 얼마나 성숙하고 조숙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열세 살, 초등학생이 엄마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슬픔을 감춘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해미는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비밀노트를 만들고, 철저한 자기 통제와 검토를 통해 일관성을 유지했다. 오죽하면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상상 친구를 만들어 여기에도 캐릭터를 부여했을까.

이런 성격이었기에 누군가는 이미 잊어버리고도 남을 일을 해미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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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고 하거든."
10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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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걷다가 한국 사람인 자신들을 보고 '곤니치와', '니하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고 동생 해나가 엄마에게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묻자 엄마가 하는 대답으로, 꽤 철학적으로 다가오는 말이다.

요즘도 해외로 여행을 떠나보면, 아무렇지 않게 이런 인사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몰라서라기보다 제대로 알려는 생각이 없어서 대충 건네는 인사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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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했던 오 년간 깨달은 건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는 거였어.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그리고 또 하나는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라는 것."
225~22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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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파독 간호사와 의사로 일을 하며 죽음을 목도하고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는 이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죽음과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고, 또 나와 내 주변의 일이 될 경우 갑작스럽게 여겨진다는 점, 더불어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다는 점과 같은 것들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삶에서 죽음을 멀리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도한 이들에게 있어 죽음은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을 더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모의 다정함은 어쩌면 거기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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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22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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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독일에 이들 가족이 도착한 이후부터 이미 해미의 깊은 슬픔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유달리 해미를 눈여겨보고 챙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모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에 이모는 이런 말로 그 마음을 대신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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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짝에 쓸모없는 나 대신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모두가 더 행복했으리란 생각은 새까만 연기처럼 내 안에서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2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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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죽음 이후 해미의 마음속에 뿌리 깊이 박힌 검은 속내는 어쩌면 이것이 아니었을까?

'아무짝에 쓸모없는 나', '언니가 살아있었으면 모두 행복했을 텐데' 하는 마음.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 없어 차곡차곡 담아두며 거짓말로 착한 아이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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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는 몰랐겠지만, 그 후로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은 내가 그날 이후 조금씩 우재의 연락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피했다고? 피한 것이다. 달아난 것이다.
(...)
그때 내가 원했던 건 누군가의 삶에 내가 또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으니까.
2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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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해미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대학생 때 둘은 인연이 닿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미가 피해서, 달아나서 인연이 맺어지지 않은 것이다. 독일 친구들과 멀어진 그때처럼 말이다.

이미 한번 겪은 것처럼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 가능성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것이다. 우재는 재회한 이후 그 마음을 꽤 뚫어보고 마지막 기회를 잡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대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히 해미는 그런 우재의 시그널에 응답함으로써 오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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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H와의 만남을 계기로 마침내 해미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했던 거짓말들, 그리고 그 거짓말을 또 감추기 위해 고립되었던 마음들을 비로소 내면세계 밖으로 풀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년이 지난 일이기에, 어쩌면 묻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해미는 우재와의 재회를 통해 비로소 자신 안에 묶어두었던 죄책감을 털어낼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K. H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통해 과거를 마주하는 한편 그림자에서 벗어나 보려는 진중한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선뜻 내보일 수 없었던 상처와 진심, 그것을 잠깐이나마 알아준 사람은 행자 이모가 유일했다. 하지만 행자 이모에게조차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 되었음에도 해미는 여전히 자신을 고립시키고 타인과의 관계에 서툴렀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더불어 회피하거나 숨기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아무리 꽁꽁 숨겼다고 해도 아이가 건네는 거짓말을 어른들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모들은 성심성의껏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줬고, 또 답해주었다.

거짓말에 대해 반박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선자이모 역시 거짓으로 쓴 편지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에도 해미를 나무라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밀을 지켜주고 평생 듣지 못할 말을 건네준 해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함으로써 해미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K. H는 자신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당도한 전 연인의 편지를 해미를 위해 서슴없이 오픈해 주었다. 현재의 가족들을 위해 이 모든 일이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원문을 그대로 전해준 것이다.

해미는 이 마지막 편지를 계기로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년이 지난 후에야 만나게 된 눈부신 안부가 해미에게는 더없는 사면이자 선물이 되어 준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겪은 삶의 갖가지 비극으로 인해 해미는 슬픔의 터널을 줄곧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한 통의 편지가 건넨 안부 인사로 인해 비로소 환한 빛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마지막에 K. H가 원문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별다른 변화 없이 또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키맨이 되어 준 K .H(천근호) 덕분에 해미는 비로소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화해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에게 건네지는 다정한 마음 덕분에 독일에서 함께 지냈던 이모들도, 한수도, 레나도, 해미도, 마지막으로 K. H도 행복할 수 있었다.

이 마음은 어쩌면 홀로 타국으로 건너가 파독 간호사로 일하며 지냈던 이모들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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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동유럽 4개국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 #해시태그 트래블
조대현 지음 / 해시태그(Hashtag) / 202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보통 동유럽 패키지여행을 가게 되면 묶어서 많이 가게 되는 독오체헝(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그래서인지 이 책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는데, 만약 어떤 형태로든(패키지, 배낭, 자동차 여행)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사전조사 및 준비를 해보면 어떨까 한다.


동유럽의 경우 보통 인접 국가들을 함께 여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다녀오는 이 여행 코스에서 내가 가보고 싶은 관광지는 어디인지, 또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국가는 어디인지를 미리 책으로 확인하다 보면, 군더더기 없는 나만의 루트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4개 국가 중 앞서 살펴본 나라는 제외하고 이번에는 '독일'을 중점적으로 다루어보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독일 도시는 총 5곳으로, 프랑크푸르트, 뮌헨, 퓌센, 하이델베르크, 로텐부르크다. 이 중에서 가보면 좋을 곳, 가보고 싶은 곳 위주로 선정하여 정리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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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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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명: 독일 연방 공화국

▶수도: 베를린

▶언어: 독일어

▶국기: 위에서부터 검정, 빨강, 노랑인 3색기이다. 공식 명칭은 '연방기'라는 뜻의 'Bundesflagge'이며, 독일인들은 일반적으로 간단히 독일 국기라는 뜻으로 'Deutschlandfahne'라고 부른다. 검정은 인권 억압에 대한 비참과 분노를, 빨강은 자유를 동경하는 정신을, 노랑은 진리를 상징한다.


▶'부르크'라는 이름의 도시들

독일의 도시들 중에서 아우크스부르크, 룩셈부르크, 함부르크 등 유서 깊은 도시에는 부르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성곽'이라는 뜻이다. 중세의 유럽 도시들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성곽으로 만들어진 '부르크'이름의 도시들은 지금도 그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유럽의 도시들은 작은 아름다운 도시들이 많이 있다. 특히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독일 남부의 도시들은 '로맨틱 가도'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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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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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 강 유역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의 경제 수도로 유럽 중앙은행이 위치해 있다. 유럽의 경제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는 독일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서, 세계적인 박물관과 독일 유일의 마천루로 유명하다.



■파울 교회

▷19세기의 루터파 교회인 파울 교회에서는 1848년 최초의 민주주의 의회가 개회되었다.


▷최초의 독일 의회가 개회된 파울 교회는 널찍한 홀과 역사적 예술적 감각을 갖춘 다채로운 색상의 교회로 커다란 타원형 홀과 암적색 사암 시계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홀은 오늘날 더 이상 교회로 사용되지 않으며, 이곳에서는 각종 행사가 열린다.



■뢰머 광장

▷3개의 박공 구조로 된 프랑크푸르트의 거대한 시청사인 뢰머는 6세기 동안 시청사로 운영되었으며 1405년부터 정기적으로 시의회가 개회된 곳이다.


▷중간에 있는 건물은 '춤뢰머'라고 불리며 여기에서 '뢰머'라는 이름이 비롯되었으며, 이는 프랑크푸르트가 세워지기 전 이곳에 건설되었던 로마 주거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뢰머 광장을 산책하며 12세기부터 무역 거래가 이루어진 프랑크푸르트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괴테 하우스

▷프랑크푸르트 올드 시티 중심에 위치한 마인 리버에서 조금만 걸으면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생가가 나오는데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이 집에는 독일의 가장 존경받는 작가의 삶뿐만 아니라 18세기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의 생활 모습까지도 엿볼 수 있다.



■대성당

▷신성 로마 제국의 의식을 거행하던 프랑크푸르트 성당은 프랑크푸르트의 고대 유적지 중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성당에는 보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도시의 전경을 조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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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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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은 세계적으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알려졌다. 아늑한 맥주 집에서부터 화려한 궁전, 여기저기 뻗어있는 정원 및 최첨단 박물관까지. 바이에른 주의 수도 뮌헨은 전통과 현대의 다양한 매력이 공존하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축제인 옥토버 페스트의 본고장은 뮌헨은 세계 최고로 여겨지는 양조장과 열정적인 맥주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뮌헨은 중요한 국제적인 회사들이 모여 있기도 하다. BMW의 고향인 뮌헨에는 독일 자동차 기술의 어제와 오늘, 미래를 볼 수 있는 매력적인 단지인 BMW 월드도 있다. 도심에서 가까운 오아시스와도 같은 정원에는 수풀이 우거진 평화로운 공간과 강이 흐르는 광대한 초원이 있다.



■카를 광장

▷카를 광장은 뮌헨의 고대 성문을 면하고 있는 넓은 광장이다.


▷현대적인 백화점과 쇼핑몰 가운데에서 중세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카를 광장은 1970년대의 큰 분수대로 장식된 분주한 보행자 전용 도로이자 현지인과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마리엔 광장

▷뮌헨의 심장부로 여겨지는 마리엔 광장은 언제나 보행자, 길거리 공연자, 관광객들로 활기찬 곳이다.


▷중심에 위치한 광장은 관광을 위한 베이스캠프로 삼거나 뮌헨 사람들을 구경하며 뮌헨의 유명한 카리용 연주를 감상하기에 좋다.


▷마리엔 광장의 이름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기 위해 1638년 광장에 세워진 기둥인 마리엔조일레에서 따왔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마리엔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선다.



■오데온 광장

▷역사적인 뮌헨 중심부의 오데온 광장을 거닐면서 도시의 몇 가지 랜드마크 건축물과 고대 이탈리아 지구를 살펴볼 수 있다.


▷우아한 바로크 양식의 교회, 피렌체 홀, 르네상스 시대 궁중 스타일의 정연한 정원이 아름답다.


▷대형 광장은 둘러보면 모여 있는 흥미로운 건축물, 이를테면 펠트헤른할레, 바이에른 군 기념관, 테아티너 교회 등을 볼 수 있다.



■신 시청사

▷1867~1909년에 지어진 신 시청사의 웅장한 외관은 네오고딕의 복고풍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카리용인 글로켄슈필은 1908년에 신 시청사에 지어졌다.


▷신 시청사는 바이에른 왕국의 부강함을 알리기 위해 시작되었다.



■성 미하엘 교회

▷기독교 내부가 분열된 당시 천주교의 힘을 나타내는 대담한 상징을 넣어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된 예수회 교회이다.


▷지금은 알프스 북쪽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르네상스식 교회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이라이트는 내부 벽에 그려진 어린 예수의 모습이다.


▷성 미카엘 교회에는 비텔스바흐 왕가의 수많은 유명 인물들의 무덤이 있는 왕립 지하실도 있다. 루트비히 2세와 바이에른의 오토 왕을 비롯하여 비텔스바흐 왕가의 40명이 잠들어 진다.



■프라우엔 교회

▷주로 붉은 벽돌로 구성된 교회는 15세기 건축가인 요크 본 할스바흐에 의해 독일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어 지어졌다.


▷르네상스 양식의 녹색 반구형 지붕은 1525년에 추가된 것이다. 원래 이 지붕은 비싼 첨탑이 건설될 때까지 임시로 타워를 덮는 용도로 지어졌지만, 사람들이 이 모습에 익숙해지면서 지금은 뮌헨 하늘의 친숙한 풍경으로 남게 되었다.



■성 페트리 교회

▷뮌헨 전체에서 기록상 가장 오래된 교회로서 정교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 거대한 타워, 보석이 박힌 으스스한 분위기의 해골 등이 인상적이다.


▷교회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 세대에 걸쳐 여러 건축 양식이 추가되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중앙 제단에 에라스무스 그라서의 조각 작품인 성 피터의 모습이 눈에 띈다.


▷성 문디치아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는 측면 제단은 기독교 순교자의 유해가 백 년 이상 보관 되었다가 1675년 로마에서 뮌헨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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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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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근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는 퓌센이다. 중세 시대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로맨틱 가도에 끝자락에 있는 도시이다.



■노이슈반슈타인 성

▷동화 속에 나오는 섬처럼 아름다운 노이슈반슈타인 섬은 월트 디즈니가 성을 모태로 하여 디즈니랜드 성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가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이 사는 성처럼 로맨틱한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호엔슈방가우 성

▷노란색 외관이 하얀색의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대비되는 호엔슈방가우 성은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1832~1836년에 지은 네오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바이에른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쓰였다가 루트비히 2세가 17세까지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조명에 따라 반짝이는 별 장식이 특이한 루트비히 2세의 방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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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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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보이는 도시이다.


▶이 도시는 도시 주변의 낭만적인 자연을 즐기거나 역사를 공부하고, 네카어 강을 따라 행복한 산책을 즐기고 싶은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이델베르크는 가장 눈에 띄는 전통 있는 대학 도시이다.



■하이델베르크 성

▷르네상스가 낳은 걸작으로, 원래의 구조물은 화마와 전쟁에 의해 파괴된 후 여러 차례의 재건축을 거쳤다.


▷이 성은 도시의 상징적인 랜드마트이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낭만주의 유적지로 손꼽힌다.



■성령 교회

▷하이델베르크 성을 올라가기 시작하는 지점에 위치한 교회는 1344~1441년에 지어져 현재 하이델베르크를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톨릭 성당이었지만 루터파의 종교 개혁 후 개신교회로 바뀌었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

▷옛날 다리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다리는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철학자의 길과 연결되어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하다.


▷목재 다리였지만 홍수와 화재로 소실되면서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가 1780년에 석조 다리로 연결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교 중 하나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오랜 전통과 노벨상 수상자도 수십 명을 배출한 독일의 명문 대학으로 유명하다.



■학생 감옥

▷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싸움을 하거나 학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을 경우 학생 감옥에 수감하고 3일 동안 빵과 물만을 주며 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던 곳이다.


▷하이델베르크에서만 누릴 수 있는 대학 시절 낭만이자 통과 의례로 인식하기도 한다.



■철학자의 길

▷괴테를 비롯해 헤겔, 하이데거 등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사색에 잠겨 걸었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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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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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보석 상자라고 불리며, 마을 전체가 마치 중세의 박물관 같은 구시가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거리와 골목 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중세로 되돌아 온 기분이 든다.



■뢰더 문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뢰더 문은 로텐부르크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주변으로 성벽이 보존되어 중세 도시의 느낌을 바로 받을 수 있다.



■시청

▷시청은 로텐부르크의 랜드마크로, 중세풍의 시청사는 중세 제국 도시의 자부심과 영혼을 반영하는 건물이다.



■의원연회관

▷시청사 옆에 붙어 있는 건물은 술을 들이키는 인형으로 유명한 의원연회관이다.


▷10~22시까지 매시간 시계 옆 창문이 열리면서 시장과 장군 인형이 나와 술잔을 들이키는 장면이 반복된다.



■성 야콥교회

▷고딕 양식의 건물로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조각상과 14세기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와 5500개의 파이프로 만들어진 파이프오르간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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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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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여행하지 못한 유일한 곳이 '독일'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책으로 하는 독일 여행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한때 독일을 스쳐 지나가며, '여기는 공원에 앉아 있기만 해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을 했었는데, 위에서 살펴본 중세도시들을 걷고 구경까지 할 수 있다면, 더없이 멋진 여행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소개한 독일 도시들이 전반적으로 생각보다 크지 않아 하루 혹은 이틀 일정을 잡고 도보로 여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터벅터벅 걸어 다니며 눈길이 머무는 곳곳을 눈으로, 사진으로 담아볼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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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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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었던 <방구석 미술관> '서양'편을 재밌게 읽으면서, 다음 편인 '한국'편까지 섭렵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한국편이 더 좋았다는 도서관 사서분의 추천도 한몫했는데, 그래서인지 호기심을 가지고 더 적극적으로 읽게 되었던 것 같다.


모두 읽고 난 후의 소감부터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개인적으로 더 흥미롭고 재밌게 읽었던 책은 한국편보다는 오히려 앞서 읽었던 서양편이었다.


서양편의 경우 익히 알려진 유명 화가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시대의 화가들을 다루고 있어 그만큼 다양한 작품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화가의 일대기보다 특정 작품의 설명을 더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 인상 깊게 다가오면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때문에 후에 이 책에서 한번 만났던 작가나 작품을 다른 미디어나 책에서 만났을 때 더 반가웠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척도가 되어 주기도 했다.


반면, 한국편의 경우 특정 시대에 국한된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데다 삶의 일대기에 더 집중하듯 풀어내고 있어 작품보다 오히려 작가의 삶이 더 부각되어, 마치 전기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살짝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마치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인연들이 다뤄지면서 오히려 앞선 서양편보다 신선한 느낌은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방구석에서 관람한다는 설정으로 바라봤을 때, 작가의 삶에 대해 다룬 일대기는 줄이고 작품에 얽힌 비화나 특징들에 대한 비중을 더 많이 다뤘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한편 어쩌면 먼저 읽은 서양편이 강렬하게 다가와서 혹은 서양편에 다뤄진 화가들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나 격정적인 일화가 한국편의 화가들에게는 발견되지 않아서 이렇게 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없는 일화를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물 흐르듯 삶의 일대기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간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10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살펴보면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다루고 있어선지 서로 얽히고설킨 인연들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 미술을 전공한다는 것,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이런 관계들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도 함께 다뤄지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작가의 일대기에 대한 내용들이 많아 책에서 다뤄진 내용 중심으로 인상 깊게 다가왔던 세 명의 화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여담인데, 화가 '이중섭'의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와 작품을 만날 기회를 여러 번 갖게 되면서, 보다 더 가깝게 다가왔던 인물 중 하나다. 이에 대한 콘텐츠는 후에 별도로 추가적으로 공개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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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술 하면 서양미술을 먼저 떠올리고 서양미술만 즐기게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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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닌 서구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은 과거의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며 단절되었습니다.

(...)

그런 근대화 현상은 서구에서 만든 것이 우리가 만든 것보다 좋다는 착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근대화의 잔재는 현재까지도 사회문화 전반에 남아 있으며, 미술에 대한 인식에도 역시 남아 있습니다.

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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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어느 순간 급격히 우리의 문화유산이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며 서구의 것이 훨씬 세련되고 좋다는 인식이 강력하게 발휘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한국 문화유산이 관리되지 않으면서 소실된 문화유산도 많고, 또 잘못된 인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부분 역시 인정한다.


저자는 이러한 부분을 알리는 한편, 독자들에게 알기 어려운 한국 현대미술을 전파하고 흐름의 맥을 짚고 보여주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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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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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


■미술사적 의의

서구에서 유입된 표현주의, 야수주의를 한민족의 예술적 유산과 융합해 힘찬 기상과 자신의 감정을 순도 높게 표출해 독보적 예술세계를 창조하고, 한국 현대회화에 이정표를 세움


■대표작: <흰 소>, <황소>, <도원>, <서귀포의 환상>, <길 떠나는 가족>, <투계>, <바닷가의 아이들>


이중섭은 한민족의 문화유산과 정신을 회화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리길 꿈꿨던 인물이다. 이를 위한 소재로 그는 한반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가축을 택했습니다.


중섭에게 소는 민족의 상징이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가 그린 소는 민족의 힘찬 기상이나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 따른 감정 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죠.


반면 닭은 아내 마사코와 자신의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두 마리의 닭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한 모습은 중섭과 마사코의 깊은 사랑과 재회에 대한 간절함을 자아냅니다.



*****



이중섭, 그에게는 평생 두 개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1916년 가을 무렵, 평안남도 평원군 어느 부유한 대지주 가정에 장차 화가가 될 운명을 지닌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보통학교(현재 초등학교) 때부터 '편협하리만큼 그림에 열중하거나 하나의 소재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파고드는 습성'이 옆에 있는 친구(화가 김병기)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소년이 화가로 성장하는 것은 정말 운명이었나 봅니다.


이후 열다섯이 된 중섭은 오산고등보통학교(이하 오산고보)에 입학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더 단단하게 다질 기회를 얻습니다. 오산고보는 독립운동 비밀결사 단체 신민회의 일원이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기도 했던 독립운동가 이승훈이 세운 학교입니다.


단단한 민족정신과 진정성 있는 삶을 전수하는 오산고보에서는 일찍이 백석, 김소월이라는 걸출한 시인을 배출하기도 했죠. 이런 환경에서 중섭은 자연스럽게 민족 고유의 정신을 그림에 담아내는 것을 일생일대의 화업으로 삼게 됩니다.


더불어, 한국 근대 서양회화의 시작을 연 화가 부부, 임용련-백남순이 오산고보 미술 교사로 부임합니다. 이 화가 부부는 당시 유학을 가야만 배울 수 있던 인상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구성주의 등 서구의 회화 양식을 중섭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강화되며 점차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하기 어렵게 되자, 임용련은 한글 자모로 구성하는 회화를 학생들과 함께 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중섭의 작품 속 서명에서 'ㅈㅜㅇㅅㅓㅂ'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서명을 한글 외에 다른 언어로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예술이 단단한 민족정신 안에서 일구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의 첫 번째 사랑


오산고보 시절부터 그는 민족의 정서와 정신을 담는 존재로 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타국에 나라를 빼앗긴 슬픈 현실에 말문마저 탄압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이중섭은 민족의 존엄성을 그림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 존엄성을 은밀하게 담아 우리 민족만이 알아챌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할 존재는 소였습니다.


'소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내겠다'는 그의 열정은 주변 지인들이 보았을 때 미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두 번째 사랑


이중섭이 사랑하는 것은 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소를 그리던 스물셋 중섭은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3년간 꾸준히 엽서에 그림을 그려 애정 공세를 펼치는 중섭. 사랑으로 활활 타올랐을 1941년에는 무려 80여 통을 그려 보냅니다.


1943년,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섭은 원산으로 돌아옵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사랑을 나누며 가슴 앓이 하던 둘. 결국 그해 5월 마사코가 바다를 건너 이중섭을 만나러 오며 둘은 결혼합니다. 중섭은 조선의 여인이 되었다는 뜻에서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 줍니다.


조용하고 평안한 생활 속에 두 아들까지 얻게 된 중섭-남덕 부부. 행복도 잠시. 안타깝게도 시대는 중섭 가족의 평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원산에 있던 중섭 가족은 포화의 위협 속에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제주에서 버티던 시절도 잠시. 다시 돌아온 1952년 부산에서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아내는 폐결핵에, 두 아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맙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영영 이별할지도 모르는 상황. 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아내의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떠나보냅니다.


전란 속에서도 그가 삶을 이어갈 유일한 힘이 돼주었던 가족과의 생이별. 이제 중섭은 가족과 재회하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불도 땔 수 없는 작은 판잣집. 종이 살 돈도 없는데 고가의 수입 물감을 가지고 있을 리도 만무했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물어야 했던 그는 담뱃갑 속 은박지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피난지에서 그리고 또 그렸던 은지화는 초벌 그림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형편이 나아지면 유화로 옮기기 위해 미리 준비하던 것이었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은지화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소실되거나 은박지 위에만 남아 있습니다.


다행히 그 원대한 구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은지화를 유화에 옮긴 <도원>이죠.


나아가 중섭은 자신의 원대한 기상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원천을 고구려인에게서 얻어옵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서 고구려인이 표현한 산을 <도원>에 끌어온 것이죠. <도원>은 중섭이 가슴에 꽉 쥔 '희망의 불꽃'인 것입니다.


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것이 최악이었던 상황. 그러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이렇게 은지화에 이어 편지화가 탄생합니다.


분명한 의지를 전하는 선과 투명하고 맑은 색채로 자신과 가족을 새겨 편지에 담은 그림. 현실은 비참했음에도 바다 건너 가족에게 보내는 그림은 한없이 밝기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품에 안고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의 간절함이 너무 애틋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절절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가족과 헤어지고 일 년 후, 중섭은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탑니다. 수소문 끝에 체류 기간 일주일이 허락되는 선원증을 어렵사리 구한 것이죠.


일주일의 시간은 너무나 달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법,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는 마지막 기회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보고 싶던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중섭.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쳐흘렀습니다.


1953년 겨울, 그는 통영으로 갑니다. 전쟁의 상흔 없이 남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 곳. 그곳에서 그는 지금껏 쌓아온 자신의 모든 내공을 쏟아낸 소를 완성합니다.


어릴 적 호기심에 소를 그리기 시작한 소년. 이후 온갖 시련을 겪은 서른아홉의 사내는 어느덧 서양의 붓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던 '서예적 소'를 창조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통영에서 중섭은 소를 포함해 많은 걸작을 남깁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 자신이 <흰 소>가 되어 억세게 전진, 전진, 또 전진합니다.


먹을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작업을 하느라 그는 이미 깡말라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은 이미 지쳐 있었지만, 가족을 위한 마음 하나로 붓을 움직입니다.


1955년, 마흔에 접어든 그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5년간 쉼 없이 준비해온 최후의 결전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개인전을 연 것이죠. 이 전시를 위해 그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온 것입니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이 열립니다. 출품작 중 약 절반에 해당하는 20여 점이 판매되죠.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쁘지만도 않은 성과였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 작품값을 받는 데에 있었습니다. 작품을 사간 이들 중 대부분이 작품값을 치르지 않았던 것이죠.


전쟁 후 사회적 시스템이 안정되기 이전에 전시를 강행한 화가에게 돌아온 건 그 빈틈을 노린 비열한 자들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구에 내려가 남은 작품들로 전시를 열어 보았지만, 판매 성과는 보잘것없었죠.


이렇게 5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최후의 전시는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5년간 참아왔던 울분은 허무와 좌절이 되어 터져 나왔죠.


1955년 4월 대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중섭은 지인에게 자기 작품이 가짜라며 비하했다고 합니다. 시대의 오작동 속에 처참히 짓밟힌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좌절. 안타깝게도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습니다. 중섭은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1955년 4월 대구에서 개인전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남은 작품을 지인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리고 그 외 나머지는 불에 태워버립니다. 그가 그렇게 정신줄을 놓고 있을 때, 일부 속물들은 하이에나처럼 그의 방에 찾아 들어 훔치듯 작품을 가져가 유용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던 예술에 대한 비하는 곧 자신에 대한 비하와도 같았습니다. 중섭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리고 엄지손가락을 피가 날 때까지 문지르며 자학을 하기도 합니다.


우울증, 피해망상 등으로 추정되는 정신질환과 함께 음식 섭취를 거부하는 거식증으로 영양실조에 이른 그는 황달병과 간장염이 심화되며 온몸이 노랗게 물들고 맙니다. 불과 2년 전 통영의 기운을 받으며 그린 초인적 소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생명력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화면 밖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소가 중섭이 마지막으로 그린 소, <덤벼드는 소>입니다. 그 자신이기도 했던 소. 이 소의 깡마르고 처참한 모습에서 스스로 생의 마지막으로 치닫는 중섭의 구슬픈 울부짖음이 들려옵니다.


"남덕 씨에게 태현이와 태성이를 맡겨 고생시킨다는 게 너무 미안하오. 부족한 나를 널리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1955년 12월 어느 날. 중섭이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그가 그토록 꺼내고 싶지 않았던 미안하다는 말을, 그는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며 계속 쇠약해져 가던 그는 결국 스스로 걸을 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죠. 전쟁 이후 조선 땅을 홀로 떠돌며, 가족을 그리며, 소를 그린 마흔하나의 사내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어느 병원 침대 위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합니다. 시대의 혼돈이 낳은 비극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중섭을 국민화가라 부를까요? 아마도 그의 삶에서 나온 소를 비롯한 모든 그림이 20세기 한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당시 한반도 위에서 생을 이어가던 모든 이의 고난과 아픔이었습니다.


중섭과 중섭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와 '애달프면서도 따뜻한' 기억의 조각이 됩니다. 그렇게 중섭은 국민화가로 우리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56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그의 은지화 3점을 소장품으로 결정합니다.


알고 보니 1955년 서울 전시에서 한 미국인이 은지화를 구입했고, 그것이 바다 건너 뉴욕으로 가게 된 것이죠. 그가 포기한 꿈은 그의 삶 끝에서 이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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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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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913년 2월 27일 ~ 1974년 7월 25일


■미술사적 의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민족이 가진 미의 정수를 추상회화에 녹여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창조해 한국 현대회화에 이정표를 세움


■대표작: <론도>, <항아리>, <산월>, <사슴>, 점화 연작


김환기는 한국에서 아무도 추상미술을 하지 않던 때 추상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1947년 결성한 모임이 신사실파입니다. 당시 유일하게 추상을 추구하던 유영국, 이규상과 의기투합한 동인입니다.


하나의 공통된 회화 양식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추상에 민족의 미와 얼을 담아내겠다는 뜻에서는 공통점을 보였습니다. 또 순수한 조형예술을 추구하는 것 역시 공통점입니다. 이들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동인으로 기록됩니다.


진정 새롭고 경이로운 '김환기만의 추상 우주'를 창조해 세계인과 나누려 했죠. 그는 점화로 그것을 성취합니다. 현재 그의 점화는 한국을 넘어 세계의 미적 유산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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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는 바로 김환기입니다.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말년 점화 작품 <우주>가 약 132억 원에 낙찰되며 환기는 한국작가 중 가장 비싼 작품가를 기록한 주인공이 되었죠. 심지어 역대 가장 비싼 한국 작가의 작품 10점 중 9점이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왜 가장 비싼 작가일까?'


우선 환기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한국 20세기 현대회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단색화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이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미술사적 가치를 공고히 인정받는 작가일수록 작품가는 고공상승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김환기의 경우 이 이유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작품이 너무 좋습니다. 경이로움을 느낄 정도로 좋습니다. 작품이 가진 미술사적 가치도 가치지만, 환기가 그린 그림 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에너지가 있습니다.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모든 세계인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그의 그림은 '돈의 가치'마저도 무색하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품고 있습니다.


환기와 향안, 이 두 사람이 함께 창조해가는 부부의 세계 속에서 꽃 피는 환기의 영롱한 예술세계.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낳고 기른 향안. 오늘 이 아름다운 부부의 세계를 함께 만나볼까요?


일본에서 중학교 유학을 마치고 온 환기에게 아버지는 '학력은 그 정도면 충분하니 이제 가업을 이어 대지주의 삶을 살기'를 요구했습니다.


소작인들의 소작료를 받으며 쉽게 부가 쌓이는 편한 삶이었지만, 환기는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고 싶었죠.


단식투쟁을 하며 다시 유학을 보내달라는 환기에게 아버지는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유학을 보내주겠다는 협상안을 제기합니다.


이 협상안에 동의한 환기는 약속대로 아버지가 연결해 준 여인과 결혼하며 아이를 가집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비로소 아버지의 속셈을 알아챈 환기. 그렇지만 자신이 정한 뜻은 절대 꺾지 않는 환기는 아버지 몰래 섬을 탈출합니다. 그는 일본으로 가는 데 성공합니다.


타인의 간섭 없이 '자신의 정신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 고민의 끝에 '예술'이 있었고, 그 예술의 다양한 분야 중 '그림'을 택했습니다.


환기는 니혼대학 예술 학원 미술부에 입학해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본기와 유화를 익히는데요. 이때 한 활동 중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방가르드 양화 연구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곳에서 환기는 피카소로 대표되는 입체주의 회화와 거기서 진화되어 탄생한 추상회화를 접하게 됩니다.


당시 연구소의 많은 젊은 화가들은 추상 중에서도 가장 최신의 급진적인 '순수 추상'을 실험하고 있었는데요.


환기는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대세이기도 했던 순수 추상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구상과 추상을 짬뽕시킨 '반추상'을 추구했죠. 다시 말해,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는 '구상'과 화가의 머릿속 상상력으로 색채와 형태를 캔버스 위에 구성하는 '추상'을 조화롭게 섞어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창조하려 한 것이죠.


'반추상' 양식과 함께 환기는 '조선이 가진 미의 정수'를 자신의 그림에 담아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청소년 때부터 오랜 기간 동안 일본이라는 타지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보니 고향이 그리워지고, 조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거죠.


환기는 자신의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을 그림에 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환기는 틈날 때마다 고향 안좌도로 향합니다. 고향과 조국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또 바라본 환기. 그 결과 그것들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스물다섯이 되던 1937년에는 오직 '조선의 미'를 더 깊이 탐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일본을 떠나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오고, 이로써 작업에 전념합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7년이 지나 환기는 <섬 이야기>라는 참 소박하고 귀여운 작품 한 점을 남깁니다.


그가 순수 추상이 아닌 반추상을 고집한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조선의 미'를 누구든지 명확히 알아보고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죠.


이미 이때부터 환기는 동서양의 모든 미술 작품을 통틀어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참 정직하고 참 깨끗하다. 환기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는 실제로 참 그랬습니다. 1942년 환기의 아버지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아버지의 모든 재산과 이권을 내려놓습니다. 환기는 모든 소작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땅문서까지 돌려줍니다. 또 아버지 등에 떠밀려 혼인했던 아내(밀양 박씨)와도 이혼하게 됩니다.


진정 사랑해서 혼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을 만큼의 재산을 나눠주며 작별합니다. 이로써 환기는 세 딸과 함께 사는 돌싱 화가가 됩니다.


▶변동림과 이상의 만남


그리고 이 시기, 경성에 있던 한 여인은 상을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스물한 살의 여인, 변동림이 사내를 만난 건 1~2년 전인 1934~35년 무렵. 그녀의 오빠(변동욱)가 경영하던 다방 낙랑파라에서였죠.


이화여전 영문학과 학생이었던 동림은 매일같이 커피와 음악을 즐기러 낙랑파라를 찾았는데요. 그곳을 그녀만큼 자주 찾던 단골이자, 또 절친이었던 화가 구본웅과 함께 그곳을 설계, 시공했던 사내가 있었죠. 바로 이상입니다.


본명 김해경.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건축가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잠재울 수 없는 예술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죠. 이상이란 필명으로 시대의 관습을 파괴하는 기괴한 예술작품들을 발표하는데요. 그가 천재적 재능을 분출한 곳은 시와 소설 등 문학이었습니다.


그 무렵 이상은 낙랑파라에서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던 동림을 봅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하게 되죠. 상은 동림에게 '자신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으니 꼭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동림을 그 말에 끄덕이며 상과의 연애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은 동림에게 별안간 물었죠. "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


'먼 데 여행이 맘에 들었고 또 죽는 것도 싫지 않았던 동림. 1936년 상과 결혼하면서 신혼의 단꿈에 젖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결혼하고 3개월이 지난 즈음 상은 일본 도쿄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상 불온 협의로 일경에게 체포되는데요.


얼마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수년 전부터 그를 괴롭히던 폐병이 급속히 악화되며 결국 생사에 기로에 서게 됩니다. 상이 오늘 내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동림은 한걸음에 도쿄로 달려가 병실에 누워 죽어가는 상의 손을 붙잡습니다.


"무엇이 먹고 싶어?"라는 동림의 물음에 상은 "메론이 먹고 싶다" 답하고, 이후 상의 감긴 눈과 입에서 더 이상 그 어떤 언어도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동림의 첫사랑이자 한국 근대문학의 별은 26년 7개월의 생을 마감하고, 동림은 스물둘에 혼자가 됩니다.


▶동림과 환기의 만남


그 이후 동림은 한 시인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노리다케 가츠오라는 일본인이었죠. 이상 사후에 그의 시를 사용하는 문제로 동림을 만나며 시작된 인연이었습니다. 어느 날 노리다케는 동림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화가 한 명을 소개해 주는데요. 이렇게 해서 각자의 삶을 살던 환기와 동림이 한자리에 마주 앉게 됩니다.


남편 이상과 사별하며 고통을 겪었던 동림. 그렇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밝고 건강한 자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한 뛰어난 현실감각을 가진 지적이고 명석한 문필가였죠.


그런 동림과 대화를 나누며 환기 역시 짙은 매력을 느낍니다. 첫 만남 이후 동림이 잊히지 않던 환기는 고민 끝에 동림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1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글로써 대화를 나눈 둘은 정신적으로 친밀해지게 되죠.


조혼과 이혼, 그리고 세 딸을 두고 있던 환기는 고백 앞에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직접 만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무렵, 환기의 사정을 알게 된 동림은 그의 과거를 넉넉히 끌어안습니다. 그런 동림에게 환기는 시집을 와주겠냐고 물었고, 동림은 그러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집안의 반대 앞에 동림은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꿔 새로 태어나기로 합니다. 김향안. 환기의 성(김)과 환기의 아호(향안)을 받아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아호를 그녀에게 온전히 준 환기는 수화(나무와 이야기를 좋아해 지음)라는 아호를 다시 만듭니다. 이렇게 부부로 다시 태어난 둘. 앞으로의 삶을 우리들의 의사와 능력으로 이상적인 생활을 설계해서 실행, 해가기로 맹세합니다. 그 맹세를 지키며 그들만의 지고지순한 세계를 창조해갑니다.


1944년, 서른둘의 김환기와 스물아홉의 김향안은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뜨거운 낭만주의자인 환기는 '나는 그림 그리고, 너는 글 쓰며' 행복하게 살자고 말했지만,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던 향안은 그림과 글만으로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니 '생계를 유지할 일'을 찾자고 조언합니다.


향안의 현실감각과 명석함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환기는 아내의 조언 따라 종로에 화랑을 엽니다. 이곳에서 전시를 열어 작품도 판매하고, 고미술품도 판매하며 생계의 기반을 마련할 요량이었죠.


결혼 후에도 자나 깨나 '조선의 미'가 무엇인지 탐구하던 환기. 오랜 탐구 과정 끝에 '하나의 대상'이 점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조선의 백자'였습니다.


백자의 아름다움에 홀딱 반해버린 환기. 마음이 가는 것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100% 정열을 쏟아붓는 기질의 소유자 환기는 백자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10년의 세월 동안 언제나 변함없이. 자세히, 그리고 오래, 환기는 백자 항아리를 보고 품고 만지고 쓰다듬고 또 봅니다. 그 미의 정수가 환기의 마음속에 피어올라 몽우리를 터뜨리며 만발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서 배웠다." 환기는 자기 미학의 핵심을 우리 도자기, 그중에서도 조선의 백자에서 얻어왔다고 단언 합니다.


그리고 환기는 '지극히 평범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직관으로 깨닫습니다. 자연과 하나 되어 무심의 경지에 이른 도공이 빚었기에 백자 항아리가 '자연 그 자체의 미=평범의 미'를 고스란히 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조선이 가진 미의 정수이며, 우리의 미가 가진 특유의 멋임을 통찰하게 됩니다.


자연이 평범하듯 백자도 평범하고 자연이 불가사의하듯 백자도 불가사의함을. 그것이 자연미임을. 이제 환기는 자신의 예술은 그 자연미를 고스란히 반영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20대 때부터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조선의 미'를 비로소 40대가 되어서야 찾아낸 것입니다. 진정한 예술, 그것은 한 인간이 낳은 평생의 작업인 것입니다.


그 와중에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환기는 피난지 부산에서 호박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삼복더위로 숨이 콱콱 막히는 세 평 남짓한 그 다락방에서 하루 종일 허리를 구부린 채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립니다.


그렇게 백자의 미, 곧 조선의 미가 담긴 환기만의 '한 걸음 더 진화된' 반추상 세계가 세상에 뽀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 환기의 곁에는 그의 예술을 무한히 사랑하고 이해하며 지지했던 아내 향안이 있었죠. 전시 중에도 환기가 오직 화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묵묵히 생계를 책임진 향안.


백자 항아리는 이렇게 밤하늘로 둥실 떠올라 달이 됩니다.

비로소 이 항아리는 환기의 그림에 담겨 '달 항아리'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환기의 달 항아리는 그를 이은 후배 미술가들에게도 현재까지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달 항아리를 소재로 '조선의 미'를 그림에 담아내는 과제를 수준 이상 이뤄냈다고 판단한 환기. 이제, 세계를 무대로 작품 활동을 하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예술의 중심지, 프랑스 파리에 가고 싶어 했죠. 그는 자신의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쯤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향안 역시 파리에 너무 가고 싶어 했죠. 1955년 4월, 향안은 홀로 파리로 향합니다. 환기가 파리에서 화가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떠난 것이죠.


파리에 도착한 향안은 환기의 작품 포트폴리오를 손에 쥐고 파리에 있는 수많은 화랑을 두루 돌아다니며 전시 가능 여부를 타진합니다. 더불어, 향안도 미술학교를 다니며 그림을 배웁니다.


"남편이 화가인데 아내가 미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 가정생활은 다소 절름발이 격이 되지 않을까. 부부란 서로의 호흡을 공감하는 데서 완전한 일심동체가 되는 것인 줄로 안다."


그렇게 환기의 파리 진출을 타진한 지 어느덧 9개월이 지난 1956년 1월. 향안은 '파리의 명망 있는 베네지트 화랑에서 전시를 열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환기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갈 여윳돈이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수향 부부와 세 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 한 채뿐이었죠. 파리에 갈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 그 앞에서 환기는 그 집을 팝니다.


그는 파리에서 3년간 활동하며 자리를 잡은 후 가족 모두를 파리로 데려올 작정입니다. 3년 후 매매자에게 집을 내주는 조건으로 집을 판 마흔넷의 환기는 파리로 향합니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는 물론 파리지엔의 생활상도 세심하게 관찰하며 미술 작품 밖에서도 풍부한 영감을 얻죠. 그리고 그런 미적 영감의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오직 그림 그리기에만 쏟아붓습니다.


고국을 향한 그리움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그의 화면에 담기는 '조선의 미, 민족의 미'는 조금씩 더 짙어지기 시작하고, 이내 짙고 강렬한 민족의 노래가 화면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죠.


이렇게 파리에서 3년 동안 200여 점의 작품을 쉼 없이 쏟아내며 민족의 노래를 부른 환기. 베네지트 화랑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파리, 니스, 벨기에 브뤼셀 등지에서 여섯 차례 개인전을 갖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유력 매체로부터 호평을 얻게 됩니다.


고무적인 수차례의 개인전과 평단의 호평, 그리고 컬렉터들의 관심 속에 판매가 이루어진 작품들. 그렇지만, 파리라는 타지에서 안정적으로 체류를 이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파리 체류 막바지인 1959년 2월에는 수개월 간 밀린 월세도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런 중에도 환기와 향안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싣고 받은 원고료를 한국에 있는 세 딸에게 보냈습니다.


그 사이 환기의 어머니는 파리에 있는 아들과 미처 재회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아끼던 동료 중섭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59년 4월, 수향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어떤 기반도 없던 파리에 가 3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수향 부부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둘의 상호 신뢰는 더더욱 단단해졌습니다.


파리에서의 3년은 그의 내면에 무언가 전혀 새로운 영감을 생성시켰습니다. 환기는 그림 <달 두 개>를 그립니다. 그림에는 '점'이 등장하는데요. 우리네 산천으로 넉넉하게 채워진 보름달을 '두 개의 점'이 사이좋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 두 개의 점은 환기와 향안 아닐까요?


1963년 10월. 어느덧 쉰하나에 접어든 환기는 미국 뉴욕에 갑니다.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서양화 부문 참가 작가로 선정되며 브라질에 방문하게 되는데요.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뉴욕으로 가 예술인생 최후의 도전을 하기로 합니다.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한국에서는 자타 공인 추상회화 선구자였지만, 뉴욕에서는 무명화가에 불과했던 환기. 정착 초기에는 체류 경비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지만 록펠러재단을 통해 1년간 미국에서 예술 활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됩니다. 빚을 내 마련한 비행기 티켓으로 뉴욕에 도착한 향안. 이렇게 수향 부부의 뉴욕 생활이 시작됩니다.


파리에서 귀국한 지 5년 만에 다시 시작된 뉴욕에서의 도전. 그렇지만 초기 상황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뉴욕의 화랑들은 환기에게 전시 제안을 해오지 않았죠.


천신만고 끝에 1966년 한 화랑에서 전시를 제안해 30점을 출품하는데요. 화랑 주인이 작품 일체를 가지고 잠적하며 작품을 도난당하고 맙니다. 이 무렵부터 수향 부부의 경제 상황은 바닥 그 자체였습니다.


한 달 버틸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향안은 백화점 판매사원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혼자였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애정, 신뢰, 존의로 언제나 변함없이 환기를 신실하게 지지해 주는 향안이 있었습니다.


환기는 하루 종일 서서 자신의 예술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까지 가기 위해 모든 혼을 아낌없이 불사릅니다.


그렇게 뉴욕에서 7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1970년. 한없이 점을 찍고 또 찍길 반복하던 쉰여덟 화가의 화면은 어느새 달 항아리처럼 온전히 무심해졌고, 순수한 코튼 위에 무한한 '점의 우주'를 창조하기에 이릅니다.


오직 푸른 점으로 가득 찬 '점의 우주'를 짓는 무심한 창조자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조선의 도공과 환기. 그 도공이 빚은 달 항아리와 환기의 점화. 그 완벽한 미의 일맥상통! '점화 한 점 한 점'은 '달 항아리 한 점 한 점'이 품고 있는 미를 쏙 빼닮았습니다.


환기의 점화는 뉴욕 미술계를 단번에 홀려버립니다. 평단의 극찬과 함께 뉴욕타임스에 격찬의 기사가 실립니다. 이제 환기의 작품은 그 가치를 인정받고 고가에 거래되기 시작하죠. 그림 인생 40년 만에, 뉴욕 생활 8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습니다.


참 애석하게도 점화가 탄생한 1970년부터 환기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허나 부담스러운 보험료로 의료보험 가입도 하지 못한 탓에 환기는 병원도 가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며 버티기만 했죠.


하지만 영감이 샘솟듯 터져 나오며 예술세계가 활짝 꽃 피는 이 시기를 절대 놓칠 수 없기에, 환기는 매일 쉼 없이 점을 찍는 강행군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환기는 자신의 생명과 예술을 바꿉니다.


매일 하루 종일 서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온 정신을 집중한 채 점을 찍는 행위. 그것은 그의 목과 척추에 심대한 손상을 입히고 말았습니다. 1974년 7월 12일.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고통에 척추 디스크 수술을 진행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향안은 병실에서 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갑니다. 갑자기 환기의 상태가 악화되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소식이었죠. 알고 보니 병원이 실수로 낙상 방지 장치를 해두지 않은 탓에 환기가 그만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떨어지며 머리에 충격을 받아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되고, 꿈을 이루고 고국으로 향하겠다던 환기는 이렇게 갑자기, 한순간, 너무 허무하게 떠나버립니다.


환기의 그림들, 이제 아빠를 잃어버렸습니다. 엄마 향안은 그 아이들이 생명을 잃지 않도록, 가장 좋은 환경에서 건강히 잘 자라도록 잘 키우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칩니다.


"너도 같이 그림 그리면 좋지 않니?" 그렇게 넌지시 묻던 환기의 물음에도 그리지 않았던 그림. 작업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환기의 물감을 보던 향안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환기가 가장 사랑했던 그 행위를 차곡차곡 이어가며, 향안은 더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도록, 아이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뉴욕, 파리, 브라질, 한국 등 국경을 넘나들며 전시를 엽니다.


환기 재단을 설립해 환기의 작품과 예술정신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을 고국에 보내고 싶었던 환기의 꿈을 이어 1992년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엽니다.


모든 것을 세심하게 고민한 엄마 향안의 마음이 담긴 환기미술관. 그렇게 아이들을 건강하게 장성시킨 엄마는 2004년 비로소 환기 곁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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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여인상을 그린 화가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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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913년 2월 27일 ~ 1974년 7월 25일


■미술사적 의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한민족이 가진 미의 정수를 추상회화에 녹여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창조해 한국 현대회화에 이정표를 세움


■대표작: <론도>, <항아리>, <산월>, <사슴>, 점화 연작


그녀는 물감을 겹겹이 발라 진한 색을 우려내며 자신의 한을 아름답게 정화하려 했습니다. '그리기'가 곧 '굿'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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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능을 잘 이해하고 있는 화가, 천경자. 우리는 보통 천경자를 '여인상을 그린 화가'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린 여인상을 곰곰이 바라보다 보면 그녀는 여인의 말 못 할 감정을 담은 '눈'을 그리기 위해 여인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경자는 자신의 감정을 그 여인들에게 이입시켜 그렸습니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린 여인상들은 모두 그녀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자신의 감정. 그 오묘한 감정을 자신이 그리는 여인의 눈에 담아 '말없이' 전하려 했던 화가, 천경자.


그런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순간에 꼭 그리던 'X'가 있었습니다. 그리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X'였습니다. 정말로 자신이 살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려야만 했던 'X'였습니다.


도대체 그 'X'는 무엇일까요?


그녀가 회상하는 어릴 적 기억의 대부분이 '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어린 경자는 그만의 예민한 색채 감각을 기르게 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색에 대한 그 추억을 자신의 화폭에 진한 색채로 물들였죠. 그녀의 꽃다발처럼 화려한 색채 구성과 꽃잎처럼 진한 색채 밀도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의 유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 'X' 역시 어릴 적 고흥에서 처음 보게 됩니다.


1941년 열일곱 살의 경자는 일본으로 가 동경여자미술 전문학교에 입학합니다. 전공으로 서양화를 택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기질에 맞는 섬세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녀는 동양화를 택합니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에 유일한 재산이었던 논밭을 모두 탕진하게 되면서 경자의 유학 생활은 이내 궁핍해집니다.


꾸역꾸역 유학 생활을 이어가면서 주변 학생들에게 열등감도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리겠다고 혈혈단신 타지에 온 경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오직 그림 훈련에만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악착같은 노력은 실력으로 드러납니다. 유학 온 지 약 1년 후 완성한 <조부>가 제22회 조선미술 관람회에(이하 선전) 입선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죠.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선전에 그것도 열여덟 어린 나이에 입선한 것은 집안의 경사였습니다.


수많은 수재 중 그녀는 왜 선전 첫 출품작으로 외할아버지를 그린 것일까요? 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어릴 적 행복한 추억,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처럼 행복' 했던 시공간을 선물해 주었던 외할아버지, 그런 그가 경자가 유학 간 후 중풍으로 쓰러지며 반신불수가 되고 맙니다. 이 그림은 그런 외할아버지를 다시 꼿꼿하고 정정한 모습으로 살려내고 싶은 손녀의 마음이 담긴 작품입니다.


1944년, 태평양 전쟁 끝 무렵, 1941년 미국의 영토인 진주만을 습격하며 이 전쟁을 시작한 일본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그런 불안정한 일본의 정세와 더불어 몰락해버린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맏이 경자 역시 귀국을 택합니다. 그 귀국이 시련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시련 1 : 이철식과 결혼


당시 전세가 악화된 일본이 조선행 배편을 줄인 탓에 배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때, 우연히 마주친 어느 조선인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수월하게 배표를 구해 귀국하게 됩니다. 그 유학생의 이름은 이철식. 이후 그는 조선에 도착한 경자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며 마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3개월 후 조선으로 귀국한 그와 재회한 그녀는 몇 차례 만남 후 운명이라 찰떡같이 믿으며 결혼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 1945년 딸 하나(혜선), 1949년 아들 하나(남훈)가 생기게 되죠. 여기까지는 영화의 한 장면같이 잔잔합니다.


시련은 결혼 이후 곧바로 불어닥칩니다. 결혼 전 주었던 믿음과 달리 남편은 너무나 무능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 교사를 조금하다 그만둔 이철식은 특별한 일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한량 생활을 시작합니다.


상습적으로 찾아와 돈을 구걸하거나,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죠.


이런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도 경자는 포기할 수 없는 화가의 길을 잇기 위해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화업을 악착같이 이어갑니다. 이 결혼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결혼이었는지.


돈을 구걸하다 사라지는 원수, 이혼하자고 요구해도 하지 않고 사라지는 원수. 20대 초반, 너무 젊은 나이에 경자는 삶의 쓴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시련 2 : 김남중과의 불륜


1948년. 스물넷 그녀는 신문기자 김남중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남중은 유부남이었습니다.


그는 본처와 경자 사이를 오가고 있었던 것이죠.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경자는 그녀 자신을 위해 연을 끊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경자는 김남중과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끊지 않고 20여 년간 이어갑니다.


1954년 딸 하나(정희), 1957년 아들 하나(종우)를 출산하며 그 생활을 지속합니다.


자신의 삶에 비애와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그림의 재료로 써야만 하는 화가. 천경자는 그런 예술가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 그녀는 삶에서 시련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재료이기에 그녀 자신을 '비극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기를 자처한 것입니다.


▶시련 3 : 한국전쟁


1950년 한국전쟁, 일, 출산과 육아, 거기에 뒤죽박죽 엉켜버린 애정사에 치여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경자의 일상은 한순간에 모두 없었던 일이 되어 허무하게 무너져버립니다.


첫 번째 남자 이철식은 한국전쟁 발발 후 행방불명이 되며 영영 소식이 끊기게 되고, 두 번째 남자 김남중은 군에 입대해버립니다. 전쟁통에 밥줄이던 교직마저 끊긴 상황. 집안의 맏이였던 경자는 친정 부모와 두 아이(혜선, 남훈)를 먹여 살려야 하는 극한의 처지가 내몰리게 됩니다.


전쟁 중이라 더 팔릴 길 없는 그림을 경자는 악착같이 그려 직접 팔러 다닙니다. 그림뿐 아니라 글을 써 문예지에 글을 싣기도 합니다. 원고료 한 푼이 귀하고 절박한 때였습니다.


▶시련 4 : 여동생 옥희의 죽음


말 그대로 '억척스럽게' 20대를 헤쳐가던 경자. 그러던 중 정신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닥쳐옵니다. 그녀가 아끼는 여동생 옥희가 결핵에 걸리고 만 것이죠.


너무 비싸 구할 수 없었던 약을 구하고자 경자는 닥치는 대로 돈을 구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과 없이 시간만 흘렀고 결국 결핵균이 장과 후두까지 번지며 옥희는 1951년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 일은 자신이 (아버지가 하라고 권했던) 의학 공부를 하지 않아 생긴 '저주'라고 여길 정도로 경자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환하게 꽃 필 나이 20대. 그 시기에 온갖 저주를 무차별적으로 받고 있는 여인. 그녀는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기 치유'를 택합니다. 그녀의 자기 치유법은 그림(예술)이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마음마저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부어오를 때, 불현듯 X가 빠르게 그녀의 뇌리를 '스스슥'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X는 '뱀'이었습니다.


"나는 소녀 적부터 가슴속에 커다란 감상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그 주머니가 이날 이때까지 나를 살게 하는 것 같다."


소녀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 온 '감상의 주머니'.


그러나 경자에게 뱀은 행복한 추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가 산나물을 캐다 독사에 물려 죽은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는 만큼 뱀은 '저주를 불러오는 악한 것'이었죠.


자신의 삶이 저주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상의 주머니'에서 뱀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대상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저주를 물리치기 위해 뱀을 그리며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약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광주역 근처 뱀 집을 찾아가 뱀을 보고 또 보며 탐구하고 스케치합니다. 1951년 3월 여동생 옥희가 죽은 후 참을 수 없는 울분을 토해내듯 종이 위에 뱀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삶이 퍼붓는 저주를 깨끗이 씻어 이겨내려는 자기 치유의 시간. <생태>는 그렇게 전모를 드러냅니다.


독을 품고 있는 악의 상징, 뱀. 그 뱀을 집요하게 추적해, '악의 실제'가 무엇인지 밝혀, 그림 속에 포획해, 악을 소멸시키려 했던 경자. 이를 위해 매일같이 뱀을 뚫어지게 관찰하던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을 체험하게 됩니다.


악하고, 징그럽다고 여겨온 뱀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버린 모순된 상황. 경자는 뱀으로부터 발견한 그대로를 <생태>에 반영합니다. 그리고 이내 깨닫습니다.


뱀에게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저주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슬픔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서러움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저주스럽고 슬프고 서러운 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시키는 생명력, 이게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그것이 자기 예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닫게 됩니다. <생태>로 얻은 이 깨달음은 이후 그녀의 작업에 원동력이자,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자 주제로 자리하게 됩니다.


1952년, 경자는 피난지 부산의 칠성다방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생태>를 출품하는데요. 작품이 너무 괴기스러우며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전시에서 제외되고 맙니다. 이후 그녀는 <생태>를 다방 주방에 방치하듯 보관해둡니다.


오상순 시인이 '기괴한 뱀 그림이 주방에 있다'고 여기저기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이 소문은 여기저기 퍼지며 '천경자는 호주머니 속에 뱀을 넣고 다닌다'는 어이없는 루머까지 양산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런 루머가 퍼지며 <생태>는 오히려 유명세를 얻게 되죠.


이에 힘입어 곧바로 천경자 개인전이 열리고, <생태>가 정식 공개됩니다. 이 뱀 그림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며 경자의 개인전은 화제의 전시로 등극하죠. 이렇게 <생태>는 20대 신예 작가 천경자를 미술계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효자가 되어줍니다.


<생태>를 보기 위해 인파로 가득 찼던 그날, 그 서른다섯 마리 뱀을 노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어떤 화가가 있었습니다. 1954년, 홍익대 서양화가 교수였던 그는 경자에게 동양화과 교수직을 제안합니다. 그 은인은 바로 김환기.


환기는 그렇게 경자에게 서울에 올라와 예술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줍니다. 이렇게 뱀 그림 <생태>는 시련으로 점철된 저주의 20대 시절을 그녀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자기 예술의 핵심 주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954년 나이 서른에 환기의 러브콜로 홍익대 교수가 되며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사실 경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여전히 김남중과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티격태격하며 정신적 고통을 겪습니다. 또 1년 동안 학교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아 신문 삽화, 출간한 수필집 등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연명하는 등 여전히 경제적 불안정함을 겪습니다.


'채색화인 천경자의 그림은 일본화의 잔재'라는 오해를 받기로 하고, 동시에 추상미술이 유행하면서 구상미술을 하던 그녀의 그림이 저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의 화풍을 고수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갔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온 지 약 10년이 지날 즈음. 마흔을 앞둔 경자의 삶은 드디어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맞게 됩니다. 마치 그때 그린 <비 개인 뒤>처럼 말이죠.


어느덧 서른여덞. 그녀는 <비 개인 뒤>를 그립니다. <생태>를 그린 지 11년이 지나 그녀의 그림은 촉촉하게 서정적이고 몽롱하게 환상적으로 변모했습니다.


오랜 세월 바래진 원삼 자락의 슬픈 색, 그 색을 기가 막히게 아름답게 느낀 그녀는 그 색감을 어떻게 자신의 종이 위에 옮겨놓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법의 단초를 동양화가 아닌 서양화에서 찾았습니다. 1957년, 그녀는 모던아트협회에 들어가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유일한 동양화가였던 경자는 그들이 유화 무감으로 색채를 겹쳐서 독특한 색감을 만들어내는 작업 방식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그리고 진한 원색을 칠한 곳에 흰색을 겹쳐 칠하는 방식으로 그녀만의 바래진 원삼 자락 같은 촉촉하고 몽롱한 색감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경자만의 독창적인 회화세계가 꽃 피게 된 것이죠.


▶시련 5 : 슬럼프! 영감의 고갈


대학교수로 생활하며, 화풍도, 가정생활도 안정기에 접어들며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40대. 그런데 모순적으로 이런 안정된 생활은 '뼛속부터 예술가'인 경자의 숨통을 다시 옥죄어오기 시작합니다.


사회적으로나 대외적으로는 좋아 보였던 그녀의 삶. 그러나, 예술가로서 내면의 자아는 병들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죠. 가장 큰 문제는 '그림을 그릴 영감이 고갈'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껏 그녀는 자신의 삶에 놓인 '고통'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을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자신의 영감의 근원인 '고통'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창작을 지속할 수 없음에 큰 혼란을 겪습니다. 소위 슬럼프가 온 것이죠.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우울증, 심지어 자살 충동도 느꼈다고 합니다. 당시 그린 그림이 바로 <자살의 미>입니다.


화가 자신을 믹서기로 상징한 그림.


"뱀이란 주제가 내 생명과 예술을 연장시켜 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상기한 마흔다섯 경자는 본능적으로 다시 뱀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사군도>는 그렇게 폭발하듯 그녀의 영혼에서 뛰어나옵니다. 그런데 이번 <사군도>에 푼 뱀은 다릅니다. 뱀이 '무당'이 되었습니다.


경자의 삶을 옥죄고 있던 살을 풀어주는 무당으로 소환된 것이죠. 보는 누구라도 정신 놓고 무아지경이 되도록 신명 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마치 경자의 삶에 들러붙어 있는 하얀 살을 뱀이 미친 듯이 춤추고 널뛰며 몰아내는 듯합니다.


그렇게 경자와 뱀이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완성된 것이 <사군도>입니다.


<사군도>를 풀어헤치며 굿판을 마친 경자. 심신에 땀을 흠씬 흘리며 자신을 정화하고 난 후, 그녀는 예술가로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방향을 정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여행! 1969년(45세)부터 1999년(75세)까지 약 30년 동안 20여 개국을 여행하는데요.


오직 살기 위해서. 나라는 사람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영감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만 살 수 있기에. 그녀는 1~3년에 한 번씩 장기간(짧게는 2개월, 길게는 8개월)의 세계 여행을 홀로 떠납니다. 새로운 곳에 가 새로운 영감을 얻어,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것. 이것을 자신의 힘이 닿을 때까지 지속합니다.


이 과정에서 20여 년간 얽히고설켜 풀리지 않던 김남중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합니다. 주변 지인들과의 관계마저도 정리하죠. 그녀는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자유'가 되고자 했습니다.


시간의 굴레 없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야 했던 그녀에게 이제 대학 교수직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마저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30년간 세계 여행에 드는 경비는 여행을 다녀온 후 창작한 그림과 수필집 판매로 충당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경자의 세계 여행 30년. 1069년 생에 첫 해외여행지는 미국 뉴욕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녀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부 김환기와 김향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기-향안 부부의 집에 들러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후 타히티에 가서는 그녀보다 79년 앞선 그곳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고갱의 발자취를 찾아 나섭니다.


이전에는 어린 시절 추억에서 영감을 길어왔다면, 이제부터는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에서 영감을 길어와 그림을 그려나가죠.


프랑스 파리에 가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벨 에포크' 시절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몽마르트 언덕을 찾아 물랭루즈의 화가, 툴루즈-로트레크의 향기를 맡아보기도 하죠. 이탈리아 피렌체에 가서는 치밀하고 완벽한 데생을 보여주는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자신의 실력을 반성하며 고개 숙이기도 합니다.


고갱, 툴루즈-로트레크 등 자신이 사랑했던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 후, 경자는 이제껏 가보지 못해 상상만 해왔던 풍물을 직접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가보고 싶었던 아프리카 대륙으로 떠난 것이죠.


새로운 풍물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은 계속 이어져 인도, 남미까지 이어집니다. 또 자신이 사랑했던 소설, 영화 등 작품과 관련된 곳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과거를 반추해 봄과 동시에 앞으로 자신의 창작을 위한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30년 동안의 길고 긴 세계여행. 그 여행길에서 그녀가 창작을 위해 얻은 '영감'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고독'을 얻기 위해 그렇게 홀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의 덩어리를 함께 나눌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 30년간 반복되어온 그 사실은 거대한 고독이 되어 그녀의 텅 빈 가슴을 마구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독을 원했습니다.


고독이 주는 고통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가장 거대한 영감이기 때문이었죠. 천경자, 그녀는 고독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나의 슬픈 전설의 40페이지>는 1974년 다녀온 케냐의 초원을 그린 작품입니다. 코끼리, 기린, 얼룩말 등을 그려 넣고 있습니다만, 사실 중요한 것은 그것들 모두 무리를 지어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고독으로 발가 벗겨진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곧 고독이었습니다.

경자는 비로소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되고, 그 대화는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여인상 <나의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 기록됩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여인이 품고 있는 고독의 눈. 더 이상 세상에 널리 그 어떤 풍물도 그릴 필요가 없다 느낀 경자. 자기 마음속에 혼자 쭈그려 앉아 흐느끼고 있는 '고독의 여인'을 캐스팅해 무대 위에 올립니다.


꽃이 가진 황홀한 색채에 흠뻑 취했던 어린 시절, 이후 삶에서 고통이 들이칠 때마다 그 살을 풀어주었던 뱀, 그리고 결국 고독이란 고통이 있어야만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그 유쾌하지도, 달갑지도 않은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어떤 여인의 한. 눈을 통해 전해지고 있나요?


눈. 우리는 눈을 봅니다.



**********



한국 화가들을 살펴보다 보면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모두 지난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대상, 집안의 반대, 여건 등 이런저런 상황들과 맞물려 하나같이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화가의 길을 놓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의지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자신의 모든 걸을 내걸고 꿈을 향해 나아갔으며, 마침내 자신만의 '무엇'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무엇도 이들의 신념이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으며, 여기에는 경제력, 가족, 병마, 죽음 등도 포함된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열망, 여기에 더해지는 끊임없는 노력과 관찰은 세월의 흔적이 쌓임에 따라 무르익어 간다.


그리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 그렇게 이들은 현재에 이르러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남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을(이별, 사랑, 고독, 슬픔, 우울, 가족, 소, 닭, 조선의 백자, 점, 항아리, 뱀, 여행 등) 자신 안에 담고 소재로 삼으며 오로지 예술에만 몰두했던 삶에서 집요한 광기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모습들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를 통해 어쩌면 이들에게 있어 예술은 삶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예술, 특히 미술사에 있어 한국미술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데 <방구석 미술관> 시리즈를 통해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의 화가와 작품들까지 골고루 만날 수 있어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덕분에 다음에 이 책에서 만난 화가와 작품들을 어딘가에서 또 만나게 된다면, 기꺼이 다가가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의 친밀감은 이제 형성된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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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로 하는 사랑이었다 - 내가 당신과 하고 싶은 것은 세기의 책들 20선, 천년의 지혜 시리즈 7
리처드 칼슨.크리스틴 칼슨 지음, 서진 엮음, 안진환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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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살면서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단연 '인간관계'를 꼽을 것이다. 그만큼 관계를 잘, 오래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어느 한쪽만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또 약간의 불순물만(오해, 감정, 상황, 다른 성향 등) 섞여도 바로 어긋날 수 있는 게 바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한 일상의 방법들을 전하고 있는데, 특히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참고하면 좋을 내용들이 많다.


출간된 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명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사랑받고 있는 이 책은 'SBS <나는 솔로>'의 기획 및 제작자인 남규홍 PD도 추천하는 책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내용이 알차다.


실제 부부인 두 저자가 자신들의 경험과 여러 사례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의 품성은 물론 보편의 관계에서 부족한 점과 필요한 점을 함께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총 10장, 100가지 사례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을 평탄하고 평온하게 잘 살아가기 위한 여러 행동요령과 말 습관에 대한 내용을 전한다.


특히 오래된 관계에 있어 소원해지거나 함부로 대하는 행위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며, 더 끈끈하고 아름답게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법들을 간단하고 명확하게 전한다.


덕분에 평소 잘 몰랐던 본인의 습관이나 태도를 스스로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는 한편, 별것 아닌 일로 자꾸 어그러지는 관계의 원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관계가 어긋나는 이유는 결국 아주 작고 사소한 일로 인해 발생하게 되며, 조금만 서로 다른 전략을 취하거나, 마음가짐의 변화를 가진다면 쉽게 풀리는 것은 물론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며 너그럽고 포용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일상의 방법들을 적용하여 부디 매일의 일상이 행복으로 넘쳐나기를 바란다.



아래는 100가지 방법 중 특히 더 와닿았던 문장들을 위주로 선별해 보았다. 좋은 관계, 행복한 인연을 이어가는 데에도 나름의 전략과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더불어 모든 관계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 내 마음이 편안하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야 타인을 돌아볼 여유가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평온하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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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마음의 의도입니다. 파트너가 하고 싶어 한다고 언제나 해내거나 매번 진짜 시도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건 현실적이지 않은 것도 있고 좋은 방향이 아닌 것도 있고요. 결심대로 회사를 옮기거나 직업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제가 말하려는 건 파트너가 원하는 걸 나도 항상 원해야 한다거나 그 꿈이 이뤄질 수 있게 해주는 게 의무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우리가 친구를 대할 때처럼 내가 진심으로 지지 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느냐 하는 점입니다. 연인과 배우자 사이에서 이 감정을 느끼는지 여부는 매우 중요해요.

(...)

두 사람이 좋은 친구라면 서로의 꿈을 공유하고 응원하면서 어느 한쪽이 희생한다는 생각 없이도 어떤 식으로든 중간 지점을 잘 찾아냅니다. 이런 관계를 서로에게 안착시키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해도 노력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일이 돼 줄 거예요.

36~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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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이에서는 추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도 서로의 꿈을 응원해 주고 지지하는 관계가 잘 유지된다. 하지만 그 관계가 부부나 연인으로 변하는 순간, 희생을 강요당하거나 혹은 스스로 희생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단지 관계의 형태만 변했을 뿐인데, 이처럼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면서 서로를 향한 말이나 행동 또한 급격히 변화하게 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지적하며, 서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친구 사이일 때처럼 서로를 지지하고, 지지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라 말하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향한 약간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

부부와 연인 사이를 망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한 것과 상대가 하지 않은 일을 일일이 체크하는 일이에요. 더 확실하게 망치고 싶다면 파트너가 어떤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고 나는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말해주면 됩니다.

(...)

상대가 해야 했는데 하지 않은 걸 생각하는 그 '생각'을 멈추세요. 그냥 버리세요. 내가 한 일은 원래 내가 가장 잘 알아요. 상대가 한 일보다 내가 한 일을 더 잘 파악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더 꼼꼼하고 세세하게 기억하는 거예요. 파트너가 하지 않은 거 말고, 한 걸 생각해 보세요. 어쩌면 진짜가 아니라, 예전에 그랬던 과거사를 지금까지 끌고 와서 현실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따져 보시고요. 사실 '이건 불공평해.'라는 생각을 버릴 때마다 관계는 더 좋아집니다.

(...)

서로 편안하고 애정이 느껴지는 어느 때 소박하고 진솔한 대화로 두 사람 사이 문제를 이야기하면 더 쉽게 개선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이런 과정에서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회복되거나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요.

37~40페이지 中

=====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쉽게 겪거나 행하고 있는 '관계를 망치는 예시'가 아닐까 한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한 것과 상대방이 한 것을 일일이 체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감정이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이런 카운팅을 하며 서서히 상대가 하지 않을 것을 체크하게 된다.


특히 신혼 때나 신혼에서 벗어날 때쯤 이런 일로 다투는 경우가 많아지는데, 상대가 하지 않은 일을 '생각'하는 것을 이제 그만 멈추자.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인간관계에서 최악의 실수 중 하나는 상대가 내 마음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는 겁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채기를 기대한다는 것이고요.

(...)

저희가 배운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게 있다면 상대에게 알리는 게 좋다는 거예요. 다만 두 사람 모두 평화로운 상태일 때를 골라서요. 상대를 존중하며 과장된 감정 호소를 낮추고 비난 없이 상대의 무엇이 괴롭게 하고 있는가를 말한 다음 결과를 지켜보세요.


보통의 경우에 내 마음을 읽어주기를 기대하던 때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은 훨씬 높습니다. 가급적 '저 사람이라면 내가 뭘 원하는지, 뭐가 필요한지 다 알 거야!'라는 손해 볼 게 뻔한 생각은 하지 않기로 해요. 상대에게 말해야 상대가 압니다. 그럴 때 두 사람의 사랑도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54~56페이지 中

=====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착각 중 하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라는 생각이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절대 알지 못한다. 이것이 팩트다!


그러니 부디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로운 상태에서 원하는 것을 직접 말로 부드럽게 전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상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소통할 때 관계는 더 부드럽게 이어질 수 있다.



=====

상대가 달라지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우리는 불만족이 쌓여갑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정당화하고 자신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걸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

우리 대부분은 파트너가 변하기를 갈망하고 상상하며 때로는 변화하기를 요구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변하기 전까지 난 행복할 수 없을 거야."

(...)

하지만 명심하세요.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만약 그(그녀)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 나는 더 행복할 거야."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는 것처럼 틀림없는 일이에요.


아주 드물게 파트너가 변한다고 해도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행복이 파트너의 변화에 달려 있다면 또 다른 변화를 원하는 건 시간문제니까요.

(...)

지금 당장 그(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방법을 찾아보세요. 관점이 바뀌면 극적인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나의 요구는 부드러워지고 불만은 사라지기 시작할 거예요. 더 수용적이고 비판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방어적이지 않은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되고 파트너의 장점을 끌어내는 능력도 향상되고요. 사랑은 더 진실하고 무조건 변화될 겁니다. 내가 기다려 온 사랑은 내 손에 달려 있어요. 해야 할 일은, 그(그녀)가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멈추는 것뿐입니다.

57~60페이지 中

=====


우리는 아주 쉽게 타인이 변하기를 갈망한다. 그(그녀가) 관계를 망친다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생각을 하는 내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은 어떤 식으로든 나는 나의 갈망을 채우기 위해 계속 요구하고 지속적인 불만족이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약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지금 당장 타인이 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멈추자. 그래야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을 멈추고 포용할 수 있다.



=====

사소한 생각은 하루에 몇백 번이나 떠올랐다가 사라집니다. 생각은 아무렇게나 떠올랐다 사라집니다. 생각은 아무렇게나 떠오르고 사라지는데 그중 어떤 것을 부여잡고 늘어지면 다양한 상상력과 케케묵은 감정들이 한 그릇에 담겨 버리는 꼴이 되고 말아요. 이런 필요 없는 생각과 더해진 상상 덩어리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생각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

흐르는 생각을 부여잡고 생각에 '부풀려짐을 당하는 것'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내가 아닌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충동질 당하는 꼴이 됩니다.

(...)

짜증이 난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생각일 때가 많다는 걸 인정해 볼까요? 생각을 지나치게 부여잡는 습관 때문일지도 몰라요. 오늘 떠오른 생각을 모두 기억할 수도 없으면서 생각이란 걸 너무 신뢰하고 있지 않았는지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겁니다.


대부분은 그냥 사라지거나 지나가요. 생각이란 건 꼭 필요한 때 사용하면 되는 도구입니다. 일상에서 생각이란 그냥 떠오르고 지나간다는 걸 알면 됩니다. 정말 중요한 생각이라면 반드시 다시 돌아옵니다. 그동안은 스치는 생각이 던진 문제와 싸우지 말고 지나가게 두고, 지금 현실에 에너지를 쓰는 걸 선택해 보세요.

74~7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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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싸움의 원인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아 스스로 부풀리고 과장하다 만들어낸 허상 때문에 벌어진다.


이렇듯 상상 속에서 계속적으로 확장되는 허상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는 방향으로 기울게 되고 이 마음이 충동질 당하면서 결국 싸움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디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흘러가는 생각들을 굳이 붙잡아 부풀리거나 감정을 담는 행동은 그만하자.


만약 도저히 떠오르는 생각들에서 해방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담백하게 상대방과 대화를 나눠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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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났거나, 확인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을 더해 거기에 감정을 혹사시키는 게 얼마나 사람 사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과거는 지나갔어요. 이미 사라져서 이 지구상에 없어요. 그런 과거를 붙잡고 잊지 않는 게 모든 인간관계, 특히 연인과 부부 사이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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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문제가 아니어도 인간관계는 힘들어요. 이미 지나간 일에 사로잡혀 있으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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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좌절감은 보통 다른 영역으로 번지게 되고 결국에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내게 만듭니다. 머릿속 기억을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완벽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 가끔은 판단 착오를 하지만 용서하고 비판하지 않는 분위기에서는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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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문제를 여전히 붙들고 있다면 이제 놓을 때가 됐어요. 어제도 과거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꽉 막힌 마음으로 지내는 대신, 용서하고 잊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더 풍부하고 개방적인 깊은 사랑과 진실한 관계로 서로 보상받게 됩니다.

160~16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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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흘러간 것은 놓아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1일년 전, 어제, 1시간 전 모두 흘러간 과거다. 우리 삶은 과거 문제가 아니라도 충분히 힘들고 복잡하다.


그러니 쉽지 않겠지만 이제 그만 과거는 놓아주자.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서로를 상처 주고, 상처받기보다 현재의 관계에 더 충실해 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새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는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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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든 칭찬에 인색한 건 관계에 심각한 결함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칭찬이 필요해요. 또 칭찬을 받으면 성장하고 감사한 마음을 배우고 느낍니다. 부분적으로는 칭찬으로 동기부여도 받아요. 상대가 나의 어떤 점을 좋아하고 고마워하는지 모르면 기쁘게 해주는 일이 어렵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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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하기 쉽고 간단해요. 해야 할 일은 칭찬의 중요성을 깨닫고 칭찬을 시작하는 거예요. 칭찬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라면 절대 실패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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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을 원하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칭찬은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231~23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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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칭찬에 다소 인색한 부분이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속담도 있는데, 이제부터라도 하기 쉽고, 돈도 들지 않는 칭찬에 보다 후해져 보자.


칭찬의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칭찬을 받으면 성장하며, 감사한 마음을 배우고 느끼게 된다. 또 동기부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물론 상대를 기분 좋게 해줄 수도 있다.


이외에도 칭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니 부디 나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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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자기 행복을 책임지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에요. 이렇게 자기 행복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 곁에 있는 사람은 행복을 나눠 받기도 하고 행복을 배울 수도 있는 장점이 있죠.


삶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변화를 주거나 상황을 다르게 바라보세요. 어려운 선택을 하거나 고통스럽고 불편한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식으로든 타협해야 할 수도 있지만, 자기 행복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 일을 해줄 만큼 좋은 관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건 슬픈 일이 아니라 나와 내 연인에게 큰 힘이 돼 주는 통찰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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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에 책임을 지는 건 정직과 책임감, 용기와 지혜가 바탕이 된 새로운 유형의 관계로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을 택하면 평생 기분 좋은 놀라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행복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때, 얼마나 더 행복해지는지 직접 경험해 보기를 권합니다.

280~28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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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서 찾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은데, 부디 이 시간 이후로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떠넘기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보자.


특히 결혼을 하거나 연인이 있는 경우, 행복의 기준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역시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지운다.


이 때문에 집착의 원인이 되거나, 불행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상황에 도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행복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다. 그렇기에 행복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 또한 나 자신밖에 없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이라 객관식 지문처럼 찍을 수 없고, 어느 누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 부디 내 행복에 적극적이 되어 보자. 용기를 가지고 부딪히며 나의 행복을 책임져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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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상황에서 '미안하다'라고 사과하는 건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사과한다는 건 약하고 부족하다는 걸 나타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하고 성숙한 표현입니다. 두 사람 관계에 사랑을 주는 말이고 신뢰와 진정성, 겸손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한꺼번에 만들어 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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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일이든 일상적인 사소한 일이든, "미안해."라고 말하는 건 일반적으로 스스로에게 먼저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이 말은 관계를 좋게 해주는 마법 같은 단어거든요.

400, 40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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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칭찬에 인색한 만큼, '미안하다'라는 말에도 인색한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지는 것 같다고 여기거나 약한 사람, 부족한 사람으로 비칠까 봐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칭찬의 말보다 더 많이 피하거나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결코, 미안하다는 말은 지거나 약함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성숙함의 표현이자 강함의 표현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인정하는 성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이, 성별, 직급 등과는 무관하다. 필요하다 느끼면 언제, 어디서든 건넬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상대의 마음을 열어주고 관계를 원활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 같은 말이다. 그렇기에 일상의 언어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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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 오래된 사이에서 더 잦은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결국 이 책에 거론되는, 관계를 망치는 여러 행위와 말을 서슴없이 자주 주고받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나하나 예시를 살펴볼 때마다, 어쩐지 뜨끔하게 되는 건 아마도 우리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일상에서 사용하고, 또 행하는 행동이기에 더 그렇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관계를 오래 좋게 유지하기 위해 약간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생각하기에 따라 쉬울 수도, 혹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긍정의 신호를 가져오는 관계의 변화는 결국 내가 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는 것, 칭찬의 말과 사과의 말을 필요할 때마다 자주 하는 것, 내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것, 타인이 변하기를 희망하지 않는 것 등등.


보통 타인에게 미루고 탓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끌고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상대를 존중으로 대하고, 꿈과 원하는 것을 진정으로 지지해 주며 서로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분명 어떤 어려운 상황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평온한 상태에서 자주 서로의 감정과 생각들을 잘 나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살펴보고 나니 새삼 사랑하는 것,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상 속에 작고 사소한 것들이 하나씩 쌓여 결국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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