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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평점 :
"다정한 마음이 전하는 눈부신 안부!"
주기적으로 하는 책 수집을 통해 알게 된 백수린의 <눈부신 안부>. 틈틈이 시간 될 때마다 그 리스트를 마치 도장 깨기 하듯 읽어나가며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접하고는 하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왜 이제서야 이 작가를 알게 된 걸까?'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런 한편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유는 꽤나 작품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슬픔과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다양한 시각에서 풀어내며 표현한 방식, 여기에 더해 이 마음을 할퀴거나 상처내기보다 오히려 따스하게 감싸주듯 품어준 방식 등이 꽤 인상 깊게 다가왔는데, 한동안 그 정서에 감화되어 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듯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아끼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된 '거짓말'이 어떤 모습과 형태를 띠고 부풀려지는지, 또 어떤 그림자를 생성하고 이로 인해 어떤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지 살펴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의 장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이해미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누군가를 위한 하얀 거짓말이 어떤 식으로 번져나가는지, 또 이것이 어떤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지가 주요 관건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사람의 성장 드라마이자 보살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여기에 더해 슬픔을 극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자, 오랜 시간을 지나 마침내 다다른 안부가 전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우연히 다시 만난 우진과의 인연을 계기로 용기를 얻어 시작하게 된 <K. H 찾기 프로젝트>로 말미암아 해미 자신은 물론 누군가의 마지막까지 보듬을 수 있게 된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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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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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미
-신문사 기자였다가 퇴사했음
-열세 살 겨울~열다섯 살 겨울까지 독일에서 살았음
-언니의 죽음 이후 아빠를 제외한 엄마, 동생 해나와 함께 독일 중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 G시로 이주함
-이모가 독일에서 살고 있는 데다 엄마가 대학 시절 독어교육을 전공했던 경험을 살려 독일로 유학 가기로 결정함
-언니 해리는 등교 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가스 폭발 사고로 갑자기 사망
-해미는 언니의 죽음 이후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시작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다양한 거짓말을 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김
-이런 거짓말을 유일하게 알아챈 사람은 이모로, 이 일을 계기로 이모는 독일에 해미가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
-덕분에 레나와 한수라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빠르게 독일어를 습득하는 한편, 적응하는데도 도움을 받게 됨
-한국어 편지를 써달라는 한수의 요청으로 인연을 이어가게 되면서 한수와는 한때 특별한 사이가 되기도 함
-세 친구가 남몰래 한수의 엄마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면서 거짓말의 스케일은 더 커지고, 이후 이 일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함
■우재
-대학 때 문학 동아리에서 해미와 인연을 맺게 됨
-약대 나와서 현재 제주도에서 약사로 근무 중
-대학생 시절 연애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지만 몇 번의 우연과 엇갈림 끝에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음
-2월 중순 어느 금요일, 폐관 시간이 가까워졌을 즈음 전시장을 벗어나는 해미를 알아본 우재가 그녀를 알아보면서 재회하게 됨
-해미가 과거를 돌아보고 맞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이자, 재회 후 적극적으로 대시함으로써 둘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옴
■이해리
-12월 가스 폭발 사고로 갑자기 죽은 해미의 친언니
-꿈은 환경운동가
-전교 십 등 안에 들 만큼 똑똑하고 모범생이었음
-누구보다 해미를 챙겨주고 이끌어 주었던 언니
■이모(=오행자)
-해미의 친이모
-전라남도에서 손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한 수재
-파독 간호사로 1973년 스물한 살 독일로 건너옴
-독일로 건너온 이후 처음엔 간호조무사, 나중엔 의사로 일함
-독일에 온 해미 가족을 살뜰히 챙겨주는 것은 물론 타인이 알아채지 못한 해미의 감정 상태를 누구보다 빠르게 캐치하는 유일한 사람
■레나
-독일에서 만난 한 살 위의 친구로 중등학교에 다님
-엄마는 한국인, 아빠는 독일인
-추리소설 마니아, 아르센 뤼팽을 이상형으로 생각
-한수의 엄마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에 함께 동참
■마리아 이모(=최말숙)
-레나의 엄마
-1973년 스물한 살 독일로 건너와 파독 간호사가 됨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어 다른 파독 간호사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음
-자유를 찾기 위해 독일행을 결심
-월급으로 모든 돈으로 자동차를 사서 휴가 때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유럽 전역을 다님(첫 자동차는 빨간색 중고 폭스바겐 비틀)
■한수
-레나가 소개해 준 친구로 한 살이 많음
-엄마 아빠 모두 한국인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한글로 글을 대신 써줄 사람을 찾던 중 해미를 소개받음
-한수의 아빠는 한국에서 독일로 일하러 온 광부 출신으로 몇 년 전 이혼을 해서 같이 살지 않음
-누나 한 명 있음
-엄마가 아픈 것이 아빠 탓이라고 생각. 엄마가 더 아프기 전에 첫사랑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으로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됨
-속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는 아이이며, 그만큼 입이 무거움
■선자이모
-한수의 엄마
-1973년 독일로 건너왔을 때 나이가 열아홉
-파독간호조무사 출신
-뇌종양 수술을 함. 수술 경과는 좋았으나 언제든 재발의 위험이 있음
-홀로 두 명의 자식을 키우며 생계를 유지
■한미
-한수의 친누나
-한수보다 네 살 위
-아마추어 축구팀의 미드필더
-신중한 성격으로 말수가 적은 편
■김말자 이모
-한수의 친이모
-선자 이모의 이종사촌
-선자 이모보다 삼 년 앞서 베를린에 도착해 살고 있었음
-키가 크고 남자처럼 짧은 머리의 외향을 가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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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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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도시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를 한순간에 잃고 인생의 비극을 너무 빨리 깨달아 버린 해미. 이 일을 계기로 가족은 흩어져 따로 살게 된다. 열세 살 겨울, 아빠는 한국에 남고, 나머지 세 가족(엄마, 나, 동생 해나)은 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 중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G시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이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초반에는 독일에서 적응하는데 꽤 애를 먹는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친구를 사귀는 일이 쉽지 않았을뿐더러 언니의 죽음 이후 타인의 눈치를 보거나 소극적으로 변하게 되면서 타인과 섞이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주변 사람들이 슬퍼할 것을 우려해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 숨기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서, 해미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간다. 이런 해미의 거짓말을 눈치챈 행자 이모는 세심한 부분에 신경 써주며 해미를 빛으로 이끌어 준다.
가상의 친구가 아닌 진짜 친구를 사귀게 도와주고, 자전거 타는 방법을 알려주는 등 독일에 적응할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준다. 또 공부하느라 바쁜 엄마를 대신해 해미와 따로 시간을 보내면서 해미의 마음속에 자리한 아픔을 조금이나마 희석시켜주려 노력하게 된다. 덕분에 해미는 어느 정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해미는 이모가 소개해 준 한 살 위의 친구, 레나와 급격히 가까워지면서 언어는 물론 독일 생활도 빠르게 적응해 나갔고, 그러면서 레나를 통해 한수라는 친구도 소개받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과도 자주 어울리게 된다.
사실 두 친구를 비롯해 자주 어울리는 이모들은 행자 이모와 같이, 한국에서 독일로 온 파독 간호사들로 상황이나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었다. 때문에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레나와 한수, 해미가 가까워진 계기는 사실 한수의 부탁으로 인해 똘똘 뭉치게 되면서부터인데, 사정은 이러하다. 독일에서 나고 자라, 겨우 의사소통하는 것 외에는 한국어를 할 수 없었던 한수는 뇌종양 수술을 받은 엄마를 위해 한국에 있는 엄마의 첫사랑에게 한글로 편지를 써줄 사람을 찾고 있었고, 그 일을 해미에게 부탁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첫사랑이 누구이며 또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이 사정을 모두 들은 두 친구는 한수를 돕기로 하고 마침내 '선자이모(한수엄마)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가 발동되게 된다.
아이들은 선자 이모가 쓴 일기를 중심으로 첫사랑을 유추하게 되고, 해미가 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이모들을 인터뷰하며 첫사랑에 대해 수소문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러다 돌연 해미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서 세 식구는 아빠가 부산에 구해놓은 남천동 아파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초반에는 자주 오가던 편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독일 친구들과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온 뒤 계절이 세 번 바뀐 늦가을 어느 날, 한수의 소포가 도착하게 된다. 그 안에는 편지와 함께 선자 이모의 일기장 열세 권이 들어 있었는데 편지 속에는 엄마가 입원했다는 말과 함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절박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국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무언가를 찾아내는 게 쉽지 않아 미뤄두던 중 1998년 겨울, 한수가 두 번째로 국제 전화를 걸어 울먹이며 엄마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으며, 자신이 엄마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자 해미는 한수의 절박함에 공감하며 선자 이모가 과거에 다녔던 교회를 가볼 계획이라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이내, 교회에서 K. H를 찾았다는 거짓말을 하고, 여기에 더해 계속해서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하면서 상황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후회는 밀려왔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수습을 위해 K. H가 편지를 보낼 거라는 말을 실행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해서 편지를 썼고 그것을 마침내 한수에게 보내게 된다.
편지를 보내고 한동안은 아주 그럴듯해서 한수와 선자 이모가 기뻐할 얼굴을 떠올리며 즐거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며칠이 더 지나자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이내 한수로부터의 전화를 피하기에 이른다.
이후에는 레나의 편지에도 더 이상 회신하지 않게 되면서 독일 친구들과는 이내 연락이 끊기게 된다. 해미는 한수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죄책감이 너무 컸고 또 친구들에게 원망을 들을까 봐 너무 겁이 나 그렇게 상황을 회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막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레나의 편지를 통해 선자 이모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는데, 한수가 보낸 것이었다. 우편물에는 해미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와 K. H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한수가 쓴 편지 속엔 엄마의 일기장과 K. H에게 쓴 답장을 K. H에게 전해달라는 엄마의 마지막 부탁을 전하는 말이 함께 쓰여있었다.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도, 거짓말로 인해 벌어진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해미는 선자 이모의 일기장과 독일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두 모아 봉인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모든 것을 묻어둔 채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퇴사 후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안드레 케르테스의 사진전에서 우연히 대학생 때 동아리 멤버였던 우재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모른 척 지나가려던 해미를 우재가 발견하게 되면서 이 둘은 재회하게 되고 다시금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하게 된다.
우재와는 대학생 시절 연애 감정을 느꼈지만, 몇 번의 우연과 엇갈림 끝에 연인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던 사이였는데, 이번 재회를 계기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게 된다.
우재는 매일같이 해미에게 연락해 자신의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들려주었는데, 이 때문에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해미는 독일에서 보낸 시절에 대해 들려주기 시작한다.
특히 선택한 이야깃거리는 이모에 대한 이야기로, 정확하게는 파독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즈음 무엇보다도 파독 간호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싶어 국회도서관에 출근도장도 찍고 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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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언젠가 이모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는 우재의 말이 나를 국회도서관으로 이끈 것만은 틀림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시절 '이모들'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자라는 걸 느꼈다.
6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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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모에 대한 이야기와 독일에서 보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잊고 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오래전 봉인해 두었던 하나의 장면이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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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올린 건 그 편지를 박스에 담고 밀봉하는 장면이었다. 내가 독일에서 쓴 비밀 노트들과 몇 개의 수첩 그리고 그간 독일에 있는 이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상자에 한꺼번에 담고 두 번 다시 열어보지 않을 것처럼 테이프를 몇 겹씩 붙여나갔던 장면.
(...)
나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드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이것뿐이었다. 당장 그 상자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 그 상자를 찾아야만 했다. 그 안에서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11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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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현듯 그 상자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서 해미는 그 상자를 마침내 찾아 개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때 멈췄던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를 홀로 다시 시작하기에 이른다. 해미는 열 세 권의 일기장을 처음부터 다시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고, 비밀수첩에 기록된 내용과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다시 추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또 보다 적극적으로 주변을 탐색하기에 이르는데, 예상되는 대학교에 연락해 사람을 찾아본다거나 선자 이모가 다녔던 교회를 방문해 문의해 보기도 하고, 2주간 집에 머물렀던 이모와 대화를 이어가며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것은 물론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단서를 추적해 나가는 상황이라 중간에 게을러지는 마음이 들거나 멈추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우재로 인해 이 다시 한번 도전할 용기를 얻게 된다.
우재는 끊어질 뻔한 인연을 적극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애썼고, 마침내 이것을 알게 된 해미는 더 이상 거짓말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거나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로, 늘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짓누르고 있던 선자 이모의 일을 바로 잡기로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 앞서, 죄책감으로 남은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 일을 제대로 마무리해야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재에게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발로 뛰며, 정보를 끌어모으고, 이모의 일기장을 수십 번 되짚어 나가면서 마침내 해미는 열세 살 때는 알 수 없었던,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보이는 진짜 단서들을 수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거쳐 마침내 진짜 K. H를 만나게 되고 이로써 오랜 숙원과도 같았던 이모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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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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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후부터는 내가 언니의 언니가 될 것이다. 언니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나 혼자 살게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물론 해나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나에게는 거짓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5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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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하고 또 아껴주었던 언니의 죽음은 해미에게 있어 큰 충격이자 상처였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겪는 일이었기에 누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때문에 해미는 그저 속으로 삭이고, 숨기며, 거짓말하는 것으로 버텨냈다. 그것이 오로지 당시의 해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통해 해미가 나이에 비해 얼마나 성숙한 아이였는지, 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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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는 빈도수는 줄어들었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비밀노트를 들고 다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거짓말을 위해선 무엇보다 철저한 통제와 검토에 기반한 일관성이 중요했으니까.
5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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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비해 얼마나 성숙하고 조숙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열세 살, 초등학생이 엄마를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슬픔을 감춘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해미는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비밀노트를 만들고, 철저한 자기 통제와 검토를 통해 일관성을 유지했다. 오죽하면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상상 친구를 만들어 여기에도 캐릭터를 부여했을까.
이런 성격이었기에 누군가는 이미 잊어버리고도 남을 일을 해미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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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고 하거든."
10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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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걷다가 한국 사람인 자신들을 보고 '곤니치와', '니하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을 보고 동생 해나가 엄마에게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묻자 엄마가 하는 대답으로, 꽤 철학적으로 다가오는 말이다.
요즘도 해외로 여행을 떠나보면, 아무렇지 않게 이런 인사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몰라서라기보다 제대로 알려는 생각이 없어서 대충 건네는 인사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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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했던 오 년간 깨달은 건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는 거였어.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그리고 또 하나는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라는 것."
225~22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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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파독 간호사와 의사로 일을 하며 죽음을 목도하고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는 이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죽음과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고, 또 나와 내 주변의 일이 될 경우 갑작스럽게 여겨진다는 점, 더불어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다는 점과 같은 것들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삶에서 죽음을 멀리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도한 이들에게 있어 죽음은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을 더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모의 다정함은 어쩌면 거기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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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22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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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는 독일에 이들 가족이 도착한 이후부터 이미 해미의 깊은 슬픔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유달리 해미를 눈여겨보고 챙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모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에 이모는 이런 말로 그 마음을 대신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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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짝에 쓸모없는 나 대신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모두가 더 행복했으리란 생각은 새까만 연기처럼 내 안에서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2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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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죽음 이후 해미의 마음속에 뿌리 깊이 박힌 검은 속내는 어쩌면 이것이 아니었을까?
'아무짝에 쓸모없는 나', '언니가 살아있었으면 모두 행복했을 텐데' 하는 마음.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 없어 차곡차곡 담아두며 거짓말로 착한 아이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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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는 몰랐겠지만, 그 후로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은 내가 그날 이후 조금씩 우재의 연락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피했다고? 피한 것이다. 달아난 것이다.
(...)
그때 내가 원했던 건 누군가의 삶에 내가 또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으니까.
2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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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깊은 해미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대학생 때 둘은 인연이 닿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미가 피해서, 달아나서 인연이 맺어지지 않은 것이다. 독일 친구들과 멀어진 그때처럼 말이다.
이미 한번 겪은 것처럼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 가능성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것이다. 우재는 재회한 이후 그 마음을 꽤 뚫어보고 마지막 기회를 잡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대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히 해미는 그런 우재의 시그널에 응답함으로써 오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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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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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H와의 만남을 계기로 마침내 해미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게 된다.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했던 거짓말들, 그리고 그 거짓말을 또 감추기 위해 고립되었던 마음들을 비로소 내면세계 밖으로 풀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년이 지난 일이기에, 어쩌면 묻고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해미는 우재와의 재회를 통해 비로소 자신 안에 묶어두었던 죄책감을 털어낼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K. H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통해 과거를 마주하는 한편 그림자에서 벗어나 보려는 진중한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선뜻 내보일 수 없었던 상처와 진심, 그것을 잠깐이나마 알아준 사람은 행자 이모가 유일했다. 하지만 행자 이모에게조차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 되었음에도 해미는 여전히 자신을 고립시키고 타인과의 관계에 서툴렀다.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더불어 회피하거나 숨기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아무리 꽁꽁 숨겼다고 해도 아이가 건네는 거짓말을 어른들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모들은 성심성의껏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줬고, 또 답해주었다.
거짓말에 대해 반박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선자이모 역시 거짓으로 쓴 편지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에도 해미를 나무라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밀을 지켜주고 평생 듣지 못할 말을 건네준 해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함으로써 해미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K. H는 자신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당도한 전 연인의 편지를 해미를 위해 서슴없이 오픈해 주었다. 현재의 가족들을 위해 이 모든 일이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원문을 그대로 전해준 것이다.
해미는 이 마지막 편지를 계기로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년이 지난 후에야 만나게 된 눈부신 안부가 해미에게는 더없는 사면이자 선물이 되어 준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겪은 삶의 갖가지 비극으로 인해 해미는 슬픔의 터널을 줄곧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한 통의 편지가 건넨 안부 인사로 인해 비로소 환한 빛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마지막에 K. H가 원문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별다른 변화 없이 또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키맨이 되어 준 K .H(천근호) 덕분에 해미는 비로소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화해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에게 건네지는 다정한 마음 덕분에 독일에서 함께 지냈던 이모들도, 한수도, 레나도, 해미도, 마지막으로 K. H도 행복할 수 있었다.
이 마음은 어쩌면 홀로 타국으로 건너가 파독 간호사로 일하며 지냈던 이모들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