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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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



사람들은 때때로 무언가 대단하고 비싼 것을 소유해야만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며, 진짜 행복은 그런 것에서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 마음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는 어느 날 허름한 산동네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동네에 녹아들게 되면서 마침내 진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산다는 행위를 몸소 체험하며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다.


계절의 변화,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모되는 자연의 섭리 등을 오감으로 느끼며 비로소 그 속에 자리한 추억과 기억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365일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 때때로 화가 나거나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현듯 반짝이며 다가오는 행복한 감각 덕분에 우리는 내 안에 사랑이 있구나 느끼며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는 저자 내면을 촘촘히 채워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다. 어느 날 서울의 한 오래된 산동네로 이사한 이후 그곳에서 다채로운 일상을 쌓아온 저자의 기록들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사랑과 애정의 마음을 피어오르게 한다.


이제는 많이 사라진 이웃의 정이라던가, 공간을 함께 나눠쓰는 것과 같은 빚 바랜 개념들이 이 산동네에서만큼은 여전히 ing 중이라는 것에 어쩐지 안심이 되는 느낌이다.


비록 낡고 헤진 느낌이 물씬 드는 동네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 자리한 사람들의 따뜻한 정과 마음만큼은 온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는듯하다.


읽는 내내 나 역시 이 동네의 주민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포근함이 느껴졌던 그곳에서의 기록들을 지금부터 고요히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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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머무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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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친구인 M 이모를 통해 알게 된 산동네로 어느 날 이사를 가게 된 저자. 이 동네는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모여든 가난한 사람들이 성곽 아래에 무허가 주택을 지으면서 형성된 곳이다.


중간에 여러 번의 사라질 위기가 있었지만 모두 극복하고, 현재는 서울시의 정책이 무분별한 개발을 지양하고 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대안적 개발 모델로 부상한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길게 늘어진 하오의 별을 하염없이 쬐는 이 동네를 무척 좋아하는데, 물론 처음부터 이 동네에서의 생활에 쉽게 적응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동네의 밤이 친숙한 도시의 소음 대신 놀랄 만큼 두꺼운 적막으로 가득 찬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그래서 며칠 밤 동안은 그 적막이 무서워 잠을 설쳤다.


또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형태로든 공동주택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의 생활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하나 둘 쌓이다 보니 이제는 행복과 마음을 두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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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았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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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산다는 행위가 관념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것들, 물질성이랄지 육체성을 가진 것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

이 동네에서 집은 삶의 공간이다. 동네에서의 하루하루는 집이든 인간이든 간에 만물이 시간과 함께 서서히 마모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육체적인 노동과 시간 그리고 정성을 쏟는 돌봄을 통해서만 우리가 모든 종류의 소멸을 가까스로 지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진실을 내게 알려준다. 그리고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감으로 각인되는 기억들의 중첩 때문이라는 사실도.

13~1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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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경제적 관념이나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을 넘어선 삶의 공간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온전히 내 삶이 된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는 오감으로 각인된 기억과 추억들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정성을 다해 돌보며 가꾸는 공간은 그래서 더 누군가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다.


산다는 행위는 물질적으로 무언가를 채우고, 육체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가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들이 지속되었을 때 그 공간은 통상의 시간보다 느리게 마모되며 소멸이 지연된다.


삶이 머무르는 공간은 그렇게 사는 사람과 함께 추억을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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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이곳만의 속도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본연의 질서가 있고 주민들은 그것을 대체로 존중하며 산다.

(...)

나보다 먼저 이 동네에 살았던 이가 다른 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만들어온 질서와 생태계를 존중하며 천천히 변화를 만드는 것. 이 동네에 살기 시작한 이래 나는 그런 일들에 관심이 생겼다.

16, 1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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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동네의 생활방식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었다. 계절별 변화, 생활의 변화와 같은 것들로 인해 당황스러운 상황이 많이 연출됐다.


이를테면, 겨울에는 눈이 오면 집 앞의 눈을 쓸어야 한다는 것도, 기온이 떨어지면 동파 위험이 있어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몰랐다.


밤이나 낮이나 늘 문밖의 소음에 익숙해져 있던 저자에게 있어 이 동네의 한밤은 두터운 적막 속에 둘러싸여 두려우리만치 고요하다는 것을 처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서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이 동네만의 질서와 생태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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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자기 집을 찾는 여정 같아."

(...)

"타인의 말이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과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상태를 찾아가는 여정 말이야."

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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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머물던 시절 알고 지낸 E 언니는 수녀를 그만두고 한국에 들어와 이 산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자신의 집과 고작 3분 거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깜짝 놀란다.


이후 둘은 어느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어 공간을 셰어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다. 필요할 때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한 동네에서 좋은 이웃으로 살아간다.


어쩌면 둘 모두에게 편안하게 자리 잡은 공간 덕분에 둘은 이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공간, 나에게 마음의 안정과 휴식을 주는 공간을 지녔기에 타인에게 내어줄 공간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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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토록 서투른 말들을 건네는 이유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르빌뢰르의 문장을 읽으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앞에서 제대로 된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게 됐다. 죽음은 너무나도 커다란 상실이자 슬픔이고, 그것을 담기에 언어라는 그릇은 언제나 너무나도 작다.

(...)

상대의 슬픔에 공감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쁨과 달리 슬픔은 개별적이고 섬세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겪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건 슬픔에 잠긴 사람의 마음이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쉽게 긁히는 얇은 동판을 닮아서다. 


슬픔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끝내 포개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없이 예민해지고, 슬픔이 단 한 사람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고 긴 터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슬픔에서 빠져나온 이후엔 그 사실을 잊은 채 자신이 겪은 슬픔의 경험을 참조하여 타인의 슬픔을 재단하고, 슬픔 간의 경중을 따지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크기로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고 쉽게 말한다.

130~13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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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오래 함께 한 반려견 봉봉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한없는 슬픔에 젖어든 저자에게 있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말을 건넸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오히려 그 말들 때문에 더 상처를 받았던 저자는 그에 대해 오르빌뢰르의 문장과 깊은 사유를 통해 타인에게서는 절대 위로받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죽음을 담기에 언어라는 그릇은 언제나 너무 작다.

●슬픔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섬세한 감정이기에 타인에게 공감받기 어렵다.

●슬픔에서 빠져나온 이들은 그때의 감정은 잊은 채, 자신만의 경험에 비추어 슬픔을 재단하고, 경중을 따짐으로써 너무 쉽게 결론지어 버린다.


이러한 이유로, 죽음에 대해 위로받고자 한다면 타인보다는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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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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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둘러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존재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엿보며,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살펴보면 새삼스레 별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끼고 보듬어 온 세월 때문에 낡고 헤졌을지 모르지만, 그런 물건과 기억 덕분에 우리는 아픔과 슬픔의 기억을 잠시나마 잊고 살아간다.


대단치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문득문득 나를 피식피식 웃음 짓게 만드는 행복, 그거 하나면 된다.


삶은 고난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일이 쉽지 않다. 한 고개를 넘었다 싶으면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와 우리를 넘어뜨리고 무너뜨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짝 스쳐 지나가는 행복의 기억 덕분에 우리는 또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다.


그러니, 삶 가까이에 나를 살게 할 수 있는 그런 공간과 시간을 많이 잡아두자. 내가 마음 주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경험과 기억들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또 우리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 일상 속 애틋함을 주는 시간과 공간들

동네 산책길, 책을 읽는 공간, 반려 식물 존, 차곡차곡 쌓아놓은 추억상자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먹는 음식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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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황민구.이도연 지음 / 부크럼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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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소설!"



범죄나 사건사고와 관련된 영상물을 자주 보는 나이기에,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어쩌면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실제 사건에 픽션을 더해 만들어진 소설이라서인지, 디테일이 남다르게 다가왔는데 덕분에 읽는 내내 흠뻑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여기에 개인적인 이유를 더 추가해 보자면, 사진과 영상물과 관련된 내용들을 여러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정밀하게 분석한다는 점 때문에 더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실제 사건에 허구적 요소를 가미한 소설로 그래서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 황민구 저자의 지인인 선희라는 인물과 그녀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앞뒤의 내용을 책임지고 있는 민사재판 내용 등 탄탄하게 다져진 팩트 위에 저자의 마음이 더해져 만들어진 죽음의 진실을 파헤쳐 가는 과정은 어쩐지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거짓의 탑으로 만연한 사회에서 아직도 정의 구현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구나 느끼게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대아 역시 저자처럼 법 영상 분석가로 활동하는데, 이 때문에 갖가지 프로그램을 활용한 사진, 영상, 블랙박스, CCTV 등을 샅샅이 파헤쳐 보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 덕분에 책을 읽는 독자 역시 또 한 명의 분석가가 되어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기 위해 두 눈 빠지도록 책을 살펴보게 만든다.


선희는 과연 어떤 사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또 그녀의 죽음을 파헤쳐 가는 대아는 어떤 방법을 통해 진실에 가까워질지 알아가는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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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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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영상 분석가 황민구 저자의 대학 후배 이야기가 모티브가 된 이 내용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일부 내용은 허구로 만들어진 소설이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황민구 저자는 몇 년 전 제주도 출장 중 문자 한 통을 받게 된다. 부고 문자였다. 부고 문자에는 '선희'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바쁜 나머지 문자를 흘겨보고 선희의 가족 중 한 분이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고 넘기게 된다.


그것이 설마 선희의 부고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계좌로 부의금을 입금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나중에 따로 만나서 위로를 건네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까마득히 잊게 된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후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문득 선희는 뭐 하냐는 안부를 묻게 된다. 이에 술자리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이어서 선희가 죽었다는 후배의 말을 듣게 된다.


사인도 모르고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른다며 사고사는 아니고 자살이라는 말도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내 죽은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른 희생자를 찾으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서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로나마 그날의 진실을 상상으로 찾음으로써 저자 스스로 선희를 편히 보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 품었던 소설의 시놉시스를 어느 날 중국집에서 만난 편집장님께 털어놓음으로써 이 책이 시작된다.


그리고 추진력 있는 편집장과 필력과 속도가 남다른 이도연 작가와 함께 이 책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도연 작가는 황민구 작가가 하는 일을 옆에서 관찰하기 위해 직접 재판에까지 찾아가 그날 목격한 내용을 소설로 담아냈는데, 그 내용이 바로 첫 부분과 마지막 이야기로 다뤄진 정 씨의 민사재판 소송 관련 이야기다.


스토리로 보자면 선희의 죽음을 찾아가는 과정과 죽음의 실체에 대한 내용만 빼면, 대부분은 팩트에 기반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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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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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아

-법 영상 분석가

-대학 때 취미로 사진 동아리에서 사진을 배운 것을 계기로 법 영상 분석의 전문가가 됨



■혜인

-대아가 운영하는 연구소 사무직 직원

-연구소를 열 때 처음 뽑은 직원으로 살뜰히 챙기는 성실한 직원



■선희

-대아의 대학 동아리 후배로 밝고 쾌활한 성격

-10년 전 결혼한 이후 가족과 왕래가 끊김



■선영

-선희의 동생

-언니가 죽고 3년 뒤 대아에게 언니의 살아생전 마지막 여정을 알아봐 달라는 의뢰를 하게 됨



■조동연

-애처가로 소문난 선희의 남편

-변호사

-삐뚤어진 심성으로 주변 동료들에게도 외면당하는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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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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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영상 분석가인 대아는 TV 방송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매일을 바쁘게 살아간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런 자신의 일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중이다.


그러던 중 최근 시야가 캄캄해지고 두통을 겪는 일이 잦아지며 루테인과 타이레놀을 먹는 횟수가 늘어난다. 이를 보다 못한 연구소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던 혜인의 호들갑으로 대학 병원까지 와서 검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병원에서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게 되는데, 실상 이 병은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발생하는 유전성 망막 질환으로 수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병이었다. 그런데 대아는 가족력 없이 후천성으로 걸린 것이다. 


이 병에 걸리면 아주 오랫동안 서서히 병이 진행되며 나중에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도 힘들어질 거라는 의사의 말에 대아는 눈을 많이 써야 하는 직업을 그만둬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참석한 민사재판이 끝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원고 측 변호사로 자리한 동연이 시비를 걸어온다. 한 번에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대아는 짤막한 인사말만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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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재판 사건 파일(금은방 절도 사건)


6개월 전 대낮에 은평구의 낡은 금은방에서 절도 사건이 일어난다.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천만 원가량의 귀금속을 도난당한 것이다.


내부 CCTV에는 6-70대로 추정되는 신원 불명의 마스크를 낀 남자가 찍혔는데, 이를 본 사장은 동네에 살던 독거노인 정 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며칠 뒤 정 씨가 체포되었는데, 정 씨는 억울하다며 범행을 부인하게 된다. 하지만 과거 절도 전과가 있던 그는 형사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고 구속되게 된다.


그는 청각 장애 4급의 상태로, 오른쪽 귀는 80% 이상 들리지 않고, 왼쪽 귀는 40% 정도 들린다. 폐지나 고철 따위를 모아 겨우 생계를 이어 가는 기초 생활 수급자인 그는 영문도 모르고 수감 생활을 이어가며 누구라도 도와주리라 믿고 기다린다.


하지만 천만 원을 손해 배상하라는 민사 소송까지 걸리자 살던 집의 보증금을 빼서 백경준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고 백 변호사가 대아의 연구소에 사건을 의뢰하면서 CCTV 분석을 맡게 되었고 이로 인해 민사재판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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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영상 분석 기술은 국내에 도입된 지 몇 년 되지 않아 관련 기관으로는 대아의 연구소가 국내 유일무이하다. 그로 인해 진위 여부를 가리거나 자격을 검증하는 기관도 아직 없기 때문에 분석자의 양심이나 사명감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대아는 관련 논문을 수십 편 썼고, 모든 논문은 해외 기관에서 검증받았으며 해외 CSI와 경찰청에서도 자문을 요청할 정도로 대아의 실력은 국내외 공적인 검증 절차를 마쳤다.


몇 년 전, 대아의 영상 분석이 결정적 증거가 되어 16년간 해결되지 못했던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히면서 이 일이 언론에 알려졌고, 이로 인해 대아는 유명세를 타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부작용도 함께 발생했는데, 영상 분석을 한다면서 사진만 확대해서 범인을 마구잡이로 추측하는 유튜버가 생겨났고, 종국에는 짝퉁 연구소까지 생겨나서 의뢰가 줄게 된 것이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대아는 이런 이들과 같은 법정에서 사실 관계를 따져야 한다는 현실이 진력이 났고 지긋지긋해진 상황에 눈까지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자,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영상 분석을 하는 대아에게는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라 여러모로 답답한 마음이 일게 된다.


그렇게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수원에서 서울 사무실로 돌아온 후 떼를 쓰는 의뢰인을 겨우 돌려보내고 찾아온 또 다른 의뢰인은 바로 사진 동아리 후배였던 선희의 동생 선영이었다.


선희는 항상 화사한 빛이 나는 사람이자 대아에게는 항상 든든한 조력자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선영은 선희의 안부를 묻는 대아에게 3년 전에 죽었다는 말을 전한다.


그러면서 언니의 장례식에 조의금을 보내지 않았냐고 묻게 되는데, 순간 대아는 3년 전 선희 아버지의 부고 메시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정확한 날짜를 되짚어 보면서 비로소 어떤 사건으로 인해 한참 정신없는 시기라 부고 메시지를 잘못 해석한 모양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내 선영은 그런 대아에게 생전 선희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선희는 결혼 10주년을 맞아 남편과 함께 제주 살이를 가게 되었고, 한 달이 채 안 돼서 제주 바다에서 사라졌고, 시신은 찾지 못했다는 말을 전한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전하며 실족사로 종결되어 경찰과 보험사까지 처리가 마무리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의 내사 종결 자료를 전달해 주는데, 이를 읽는 대아는 비통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다.


선영은 고인이 된 언니의 인스타그램 계정과 스마트폰 클라우드 서버에서 다운받은 원본 사진을 담은 USB를 건네며 선희의 마지막 이야기를 추적해 그 흔적을 들려달라는 의뢰를 하게 된다.


선희가 떠나기 전 10년 동안 선희의 삶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며 그 공백의 시간을 너무 듣고 싶다며 말이다. 선영은 선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알고 싶다며 간절히 호소한다.


이후 모든 일정을 취소한 대아는 선희의 인스타그램과 선영이 남기고 간 USB 사진들을 살펴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든다. 그리고 불현듯 휴가를 내고 훌쩍 제주로 떠나게 된다.


대아는 '제주 소랑 스테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린 주택에 홀로 머무르며 한동안 쉬어볼 마음을 먹지만 실상 마음 한구석에는 선희의 이야기를 찾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모든 걸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알게 된 선희의 죽음은 도망치지 말고 직면해야 할 시간이라 말하는 듯해서 더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3년간 부고를 모르고 살아온 부채감과 미안함에 더해 선희가 자신에게 주는 메시지라는 직감을 하게 된 그는 결심을 하고 선영에게 메시지를 남겨 의뢰를 수락한다. 그렇게 선희의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대아는 선희를 자료를 보기 전 남편이자 유일한 목격자인 조동연의 인스타그램부터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USB의 자료들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직접 사진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을 직접 방문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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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의 첫 번째 흔적: 물방울 속눈물


두 개의 맥주 캔이 찍힌 사진에는 입구가 개봉된 캔 하나와 개봉하지 않은 맥주가 찍혀있었다. 그리고 따지 않은 맥주 캔의 바닥은 표면에 맺혀 흐른 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 물방울에 비친 희미한 피사체를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고 화질 개선과 보간 처리(픽셀을 채우는 과정) 등을 통해 선희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AI 안면 인식 알고리즘으로 표정을 분석하자 선희가 울고 있었다는 결과가 나온다.


●선희의 두 번째 흔적: 산책


산책을 나가는 동영상을 살펴보던 중 선희가 동네 어귀에서 양손에 짐을 든 노파를 만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영상 속에서 노파가 선희의 아래쪽으로 시선을 두고 주춤거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포착한다.


이로 인해 선희의 다리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 대아는 영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여기에서 규칙적인 떨림을 추가로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다른 영상들과 비교 분석을 통해 보행 비대칭을 발견하게 된다. 선희의 걸음에 특정 패턴이 있음을 추출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특정 날짜 사이 선희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게 된 대아는 다른 사진과 자료를 통해 당시 선희가 있던 위치를 추적해 나가고 한 카페에 방문했음을 알게 되면서 직접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몰랐던 또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물론 눈도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대아는 계속 사진과 영상을 파고들었고, 추후에는 병원 진료기록을 통해 마침내 남편인 동연을 의심하기에 이른다.


●선희의 세 번째 흔적: 프레임 밖의 용의자


제주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의 도움 요청으로 사건 하나를 해결해 준 대아는 그 대가로 카페 근처를 비추던 CCTV를 확보하게 되고, 프레임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선희의 네 번째 흔적: 페르소나


앞선 CCTV 화면을 통해 조동연과 선희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한 대아는 조동연에 대한 주변인들의 정보를 모으며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기에 이른다.


애처가로 소문났다는 그의 모습과 화면에 잡힌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가 수상해진 대아는 선희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향수 제조 공방에서 찍힌 사진을 발견하게 되면서 화장 속에 가려진 멍 자국을 제대로 파악하게 된다.


●선희의 다섯 번째 흔적: 다빈치 코드


앞선 여러 정황 증거들이 속속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조동연과 선희의 상처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찾지 못한다.


다만, 선희가 불행했다는 사실이 점점 선명해지자 대아는 점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선희의 불행을 제 손으로 밝혀내야 한다니 자신이 상상한 최악의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워진 것이다.


며칠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던 그는 선희가 올랐던 별세 오름에 올라보기로 하고 그곳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배 넌 할 수 있어'라는 어디선가 선희의 육성이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로써 대아는 의지를 다잡게 된다.


다시 파일을 살펴보던 중 대아는 중간에 한 장이 비어있는 일련번호를 포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19일 날짜의 파일 하나가 빈다는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선영을 통해 파일에 대해 묻게 된다.


마침내 이 파일들이 조동연을 통해 전달된 것임을 알게 된다. 결국 조동연에 의해 자체 검열되어 전달된 파일임을 알게 된 대아는 데이터 복구 업체를 통해 삭제된 파일을 복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초짜리 동영상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파일을 통해 당시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를 알게 된다.


●선희의 여섯 번째 흔적: 검은 그림자


이제 마지막으로 선희가 추락하는 블랙박스 영상을 분석할 차례다. 영상을 보는 동시에 기시감을 느낀 대아는 3년 전 의뢰를 떠올리게 되고 그때 자신이 맡은 의뢰 중 하나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엔 선희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실 선희의 실족 감정 소견서를 쓴 것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대아는 3년이 지났음에도 같은 방법으로는 같은 결과만 도출될 것임을 파악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인물이 아닌 지면에 포커스를 맞춰 프로그램을 실행해 다시 살펴보게 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영상을 마주하게 된다.


이로써 진실을 제대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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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대아는 자신에게 좋은 기억만 주었던 장소인 인천 차이나타운의 중국집 '가화만사성'에서 조동연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분석을 통해 확인한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그들이 제주 한 달 살기를 하기로 한 시작점부터 선희가 죽게 된 시점까지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대아는 조동연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남들은 몰랐던,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조동연의 입으로 듣게 된다. 이로써 선희가 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된다.


조동연은 진실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나중이 되어서는 결국 완전히 무너져 멍한 상태에 이른다. 모든 것이 종료된 이후 대아는 처음부터 찍고 있던 조동연의 폰을 들어 영상을 종료한 후 이 파일을 그대로 선영에게 전송한다.


그리고 끝까지 모든 것을 대아의 탓으로 돌리던 조동연은 대아의 신고로 찾아온 경찰들에게 인계된다


앞서 원고 쪽 변호사로 있던 조동연과 영상 분석자로 참여한 대아가 함께 했던 민사재판은 원고 측 변호사의 교체와 대아의 또 다른 분석 자료 덕분에 피고인 정 씨가 승리하게 되면서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오는 길 법률 신문에서 대아는 조동연의 부고 소식을 보게 된다. 그리고 선희의 추모 공원에 들려 인사를 나누던 대아는 납골당 안에 있던 사진 뒷면에서 우연히 선희의 메시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로써 대아는 다시금 선희의 파이팅에 힘입어 자신의 힘이 닿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한때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했던 대아는 다시 힘을 내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 할 때까진 하자.'


그래서 그는 눈이 멀 나중을 위해 하나씩 준비를 해나간다.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자신의 노하우를 정리해 집필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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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았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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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해야 할 재판에서 반대쪽을 이기는 데만 몰두하고, 거짓 증거들을 그들만의 당위로 때우는 현실. 법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에게만 유난히 법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현실. 대아는 이런 현실들에 환멸이 차올랐다.


숨김과 보탬 없이? 위증의 벌? 맹세? 하, 지랄들을 하고 있네.

1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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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변호사, 검사, 각종 분석가, 형사 등 법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법과 재판은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법 자체가 공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것을 판단하고 이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제로 이런 일을 겪어본 사람들은 법이 약자에게 얼마나 위협적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돈과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사람들로 인해 피해는 항상 고스란히 약자가 진다는 사실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대아는 그래서 더 증인 선서문의 내용이 역겹게 느껴진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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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일이니까, 부부 사이의 일은 둘만 아는 거니까, 한쪽이 저렇게 된 건 분명 한쪽에서 원인 제공을 했을 거라는 인식들. 가정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편견이란 철옹성에 가둬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18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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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는 이렇게 시작된다. 가족의 일이니까, 부부의 일이니까 하는 폐쇄성과 나 몰라라 하는 무관심 속에 점차 더 확대된다.


여기에 더해 다른 쪽의 잘못도 반드시 있을 거라는 잘못된 인식 속에, 피해자는 자꾸만 더 숨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최근 들어 하나 둘 언론을 통해 밝혀지는 아동학대, 가정폭력, 가족 내 성추행 등이 과거에는 바로 이렇게 이루어지고 묻혔다.


선희의 일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이름에 가둔 잘못된 편견과 망상 때문에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다른 가족들은 이유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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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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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는 사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들의 마지막 모습만 확인하게 된다.


그런 죽음을 볼 때면, 때론 먹먹함으로 또 어떨 때는 답답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을 통해 조금은 해소된 기분이다.


특히 주인공인 대아를 비롯해, 제주 서부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범수 분석관, 그리고 실제 이 책을 집필한 두 명의 저자 같은 사람들이 있어 아직 정의는 살아있구나 느끼게 된다.


또 이 소설에서 언급된 속 시원한 이야기들(선희 사건/정씨의 민사재판/시장의 성추행사건) 덕분에 세상은 아직 살아볼 만하다 느끼게 된다.


몇몇 사건사고를 다룬 프로그램들을 보면 장기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들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해결되는 사례를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결국 여기에서 핵심은 초기 대응과 증거 수집이 핵심이다.


과거에는 CCTV와 같은 영상매체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으니 범인이 남긴 족적, 분비액 등 증거품이나 DNA만이 유일하게 범인을 찾을 수 있는 도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는 곳곳에 설치된 CCTV와 동영상, 음성, GPS 등이 범인을 색출하는데 추가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황민구 저자와 같은 법 영상 분석가를 비롯한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있었다. 기술의 발달과 집요한 사람들의 연구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존재한다. 진실에는 관심 없고 돈만 좇거나 권력의 맛에 취해 절대적 강자에게 몸 사리기 바쁜 사람들 때문이다.


특히 힘 있고 권력을 가진 집단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한데, 그래서 더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죽음 앞에서 그것을 저버리는 사람들로 인해, 누군가의 죽음은 어느새 난도질당하고 왜곡되는 시선으로 결론지어져, 세상 속에서 잊힌다는 점이 그렇다.


이런 현실 때문인지, 이 소설이 내린 결론과 진실을 파헤쳐 가는 과정은 따스한 빛처럼 다가온다. 냉혹하고 차가운 법정 앞에서도 정의는 살아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아 내심 희망을 갖게 된다.


현실 속 어딘가에도 이처럼 누군가를 위해 열정적으로 진실을 파헤쳐 주는 사람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소망의 마음과 함께 앞서 암담한 현실 속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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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안에는 아이가 산대 길벗스쿨 그림책 18
헨리 블랙쇼 지음, 서남희 옮김 / 길벗스쿨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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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며 살고 있지만, 사실 어른도 아이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려주는 책!"



앞서 읽었던 책들 속에 '인용' 혹은 '추천' 등의 방식으로 소개되었던 도서 중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담아두었던 책 중 하나를 꺼내 읽어보았다.


유아 그림책으로 분류되는 책이지만, 어른인 내가 읽어도 충분히 공감과 공부가 되는 책이라 소개해 보려 가져와봤다.


특히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아이와 부모가 함께 책을 읽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눠봐도 참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살다 보면 때때로 나이는 먹어도 내 안에 나는 '여전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설사 그게 1~2살이 아니라 앞자리가 바뀌는 정도의 변화를 겪어도 말이다.


어릴 때는 막연히 특정 나이를 지나면 '이럴 것이다' 하는 환상 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던 때도 있었는데, 막상 내가 그 나이를 겪고 보니 그건 정말이지 당시의 바람이 담긴 환상 같은 상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단지 나이를 먹어가며 겉으로 표현하던 것을 이런저런 이유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 여전히 나는 나임을 확신한다.


이 책은, 그런 숨겨진 어른들의 심리와 감정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그림책으로 어른들 안에 여전히 아이가 살고 있음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는지도 함께 전한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 깜짝 놀라게 되는 부분 등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차마 겉으로 표현할 수 없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척, 슬프지 않은 척, 완벽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살아오느라 힘겨웠을 어른들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를 마주하며 보듬고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린 나는 어떤 것에 결핍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감 부족으로 누군가에게 제대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억누르며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라도, 멋진 어른의 모습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가 당시 해보고 싶었던 일,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들을 하나씩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렇게 내 안의 결핍을 채워보다 보면 불쑥 튀어나오는 어린 나의 모습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어릴 적 꿈꿨던 멋진 어른의 모습에 더 가까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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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헨리 블랙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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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살아요. 영국 런던에서 공부를 마친 후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면서 어린이 책을 출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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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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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또렷이 뜨고 어른들을 차근차근 꼼꼼히 살펴봐.

어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아이를 숨기려고 항상 바쁜 척하고 스트레스받는 척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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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어른들은 자신 안의 취약한 부분을 숨기려고 항상 ~척을 하는 듯하다. 바쁜 척, 피곤한 척, 아픈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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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기 안에 분명히 있는 아이를 어떻게 계속 숨길 수 있겠니?

어른들 안에 있는 아이는 갑자기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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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지 알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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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새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할 때는...

한정판이라고 부르면서 꼭 필요한 거라고 어린아이처럼 우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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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지 말고 숨 쉬어! 명품, 한정판이라는 이름 뒤에 사실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숨어 있다는 걸 사실은 본인도 너무 잘 알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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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도 아이만큼 쉽게 겁을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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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고 항상 떳떳하고 당당할 것 같지만, 사실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


어른들도 무서운 게 있고, 때론 도망가고 싶을 만큼 겁이 나는 것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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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어른들 안에는 못된 아이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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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어른이 그냥 어느 날 뿅 하고 나타나지는 않아. 못된 아이가 결국 못된 어른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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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이처럼 혀 짧은 소리로 간질간질 이야기해(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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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만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건 아니야.

어른들도 사랑에 빠지면 아이처럼 '따랑해' 하고 혀 짧은 소리를 내고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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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참 이상하지?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될수록 안에 있는 아이는 더 자주 튀어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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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꼭꼭 숨겨둔 내 안의 아이는 더 이상 튀어나올 일 없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기척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당혹스러울 때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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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린 시절은 아주아주 중요해.

안에 사는 아이가 평생 잊지 못할 것들을 배우는 시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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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에는 바로 이런 이유도 있어. 내 안에 살고 있는 아이가 평생 잊지 못할 것들을 배우는 시기거든.


이때 제대로 배우고, 표현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적어도 어른이 된 후에 당혹감을 느낄 일은 크게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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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너의 안에는 그 아이가 살고 있을 거야.

그게 조금 힘들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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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어린아이는 내가 죽는 순간까지 늘 함께 할 거야. 그래서 때때로 조금 힘든 순간도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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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있다면 동생은 계속 너를 짜증 나게 할 거고,

그러면 너는 지금처럼 또 속상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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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질투나 결핍, 속상함, 짜증 등 다양한 감정의 형태로 다가와 평생을 괴롭힐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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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약속해 줄래?


네 안의 아이를 언제나 아껴주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겠다고.


왜냐하면 그 아이는 네가 어른이 되는 것을

훨씬 재미있게 만들어 줄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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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쁘게만 보지는 말아 줘. 네 안의 아이를 잘 보듬고 아껴준다면 그 아이는 어른이 된 너에게 더 큰 선물을 안겨줄 거야.


모험심 넘치는 삶, 일상의 재미,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같은 한층 더 풍성하고 다채로운 삶을 안겨줄 거야.


그러니 네 안의 아이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너무 억누르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끔은 네 안에 있는 아이의 목소리를 따라 여행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해 봤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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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어른이 될 널 응원하며,

헨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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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어른이 되기를 응원하며 쓴 이 편지 같은 글은, 그림책의 저자인 헨리가 쓴 당부의 글이다.



*****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어른이 되면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된 나는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린 시절의 순진무구했던 그 생각이 사실은 그저 바람에서 기인한 허구였음을 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여전히 내 안에는 어린아이 같은(슬플 때는 울고 싶고, 기쁠 때는 마음껏 행복해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면모가 가득한데, 사람들은 외적인 모습, 물리적인 나이만을 보고 어른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어른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어른에게도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머리가 희끗하다는 이유로 양보하고 배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휘뚜루마뚜루 이야기하는 '어른' 말고 내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에 늘 함께하는 어린아이를 잘 보듬으며 함께 성장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 한다.


결핍이 있다면 조금씩 채워주고, 상처를 받은 일이 있다면 위로해주고, 외로움을 느낀다면 사랑을 주면서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어른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린 나를 제대로 마주하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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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를 대접합니다 - 맛있는 위로의 시간 나와 잘 지내는 시간 2
강효진 지음 / 구름의시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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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야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요상한 신세 한탄 이야기"



첫 챕터를 읽자마자 읽기를 중단하고 이 책을 바로 반납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제목이나 소개 글에 언급된 내용과는 너무나 다른 내용 때문이었다.


분명 음식과 관련된, 힐링과 위로가 키워드가 되는 책인 줄 알고 읽기 시작한 건데, 어째서 첫 챕터부터 강력한 스트레스 유발 내용으로 불쾌한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첫 챕터만 읽고 그대로 책을 덮어두고 한동안 방치해두었다. 그리고 반납 기일이 다가올 때쯤 이왕 빌린 거 그냥 끝까지 무슨 소리를 하나 읽어보자는 심산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독 후 내린 결론은, 유아기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마인드의 어른아이(어른이 아이처럼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가 어른 흉내를 내며 쓴 책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음식과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엮은 책으로, 기본적인 형태는 '에피소드에 얽힌 이야기+음식을 만드는 방법'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음식을 통해 힘을 얻거나 힐링을 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담겨있는 다른 이야기가 더 임팩트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엄마와의 관계, 음식에 대한 집착, 성인 분리불안 증세, 신세한탄과 같은 이야기들이 음식 이야기에 밀려 오히려 신세한탄을 위해 오히려 음식 이야기를 끼워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읽는 내내 좀처럼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초반에는 엄마와의 이야기 때문에, 중반 이후에는 음식에 대한 집착과 애정결핍과 같은 내용들이 이어지며 '왜 저럴까?'하는 의문만을 남겼다.


그리고 고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저자의 마음속에는 아직 덜 자란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이토록 이기적인 행동을 취하는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아래는 내 마음에 툭 불거진 의문감과 이야기하고 싶은 소재들을 담은 문장들을 몇 가지 발췌해서 정리해 보았다.


사실 다른 독자들은 어떤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기록으로 남기기 전에 검색을 통해 랜덤으로 확인해 봤는데, 대부분 출판사에서 의도한 내용만을 전하는 무난한 수준만 확인되었다.


그래서 다른 시각으로 본 내 글을 읽은 또 다른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내 글만 읽은 독자들, 먼저 책을 읽고 내 글도 함께 읽은 독자들 모두 말이다.




먼저 배경을 설명해두는 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저자는 엄마의 그늘을 떠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이로써 엄마와는 멀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 말예 따르면 결혼 전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관계가 결혼 후에도 이어졌으며(엄마는 술을 먹고 1시간 이상 통화를 하며 외롭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고 함) 이로 인해 꽤나 힘든 나날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가족은 4명이며, 아버지는 엄마와 살고 있고, 여동생이 있는데 독립했음)


이로 인해 엄마와의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저자 스스로 생각하지만, 저자 자신도 그러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엄마 탓처럼 이야기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엄마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것은 저자다.


여하튼 그러다가 엄마가 살던 곳을 정리하고 아빠와 함께 먼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이후 엄마는 강아지를 들이고 이제는 사뭇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의 행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가 연락이 안 되거나 없을 때는 저자가 먼저 몇 번이고 걸어서 통화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릴 때 많이 아팠던 엄마로 인해 사랑 표현을 받지 못하고 자란듯하다. 엄마는 늘상 불면에 시달렸고 때문에 뒤늦게 잠든 엄마로 인해 도시락을 싸주는 것은 늘상 아빠였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과는 다르게 아빠가 싸준 도시락은 반찬들이 뒤섞여 창피했다고 서술하는 장면도 확인됨)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저자는 식탐이 강하고 대식가이며,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남편에게조차 맛있는 것을 나눠먹을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남편을 저자는 주나 씨라고 부르며 본명인지 아니면 애칭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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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을 해서 엄마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늦은 밤에 전화를 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화벨이 울리면 그건 엄마가 그날 술을 마시고 몹시 슬퍼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내가 보고 싶다는, 내가 없어서 온 집안이 휑하다는 이야기. 엄마는 이렇게 슬픈데 너는 괜찮냐는 이야기. 술을 마시고 집에 왔는데 내가 없다며 엄마는 울먹였다. 그런 전화는 1시간 이상 계속되기 일쑤였다.

1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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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솔직히 굉장히 힘들었다.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힐링 에세이가 아니라 신세 한탄 이야기를 잘못 읽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불어 처음에는 좀 많이 아픈 엄마를 둔 저자의 이야기인가 싶기도 했다.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한 엄마는 외로움을 많이 타고, 또 자정이 가까워서 매번 전화하는 약간은 민폐를 주는 엄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옆에서 챙겨줄 아빠는 없는 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술+우울감+외로움 등의 복합적인 내용들이 포착되면서 혼자 두어도 되는 건가 하는 염려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어디까지나 초반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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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도 그랬다. 결혼을 하고 독립했으니 엄마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내게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옳았다. 하지만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서 내 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엄마는 외롭고 힘들어졌다. 혼자 잘 지내지 못하는 엄마에게 지쳤지만, 그런 엄마를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5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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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느껴지는 부분은 전혀 달랐다. 화자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엄마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저자라는 생각에 닿았다.


저자는 엄마로부터 독립을 꿈꿨다. 하지만 엄마로 인해 그 노력이 무산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엄마가 살던 곳을 정리하고 아빠와 함께 더 먼 곳으로 이사하며 한동안 전화도 끊기고 강아지를 입양해 즐겁게 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취미생활도 갖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이제는 외로움이나 헛헛함에서 조금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췄으면 좋았겠지만 이제는 저자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엄마와 통화가 될 때까지 연락을 하고, 오히려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을 저자 자신이 더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엄마의 곁에는 엄마와 한평생을 함께 한 아빠가 있는데, 모녀는 왜 이러는 걸까? (아빠가 돌아가시거나 엄마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었음)


이쯤 되니, 엄마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아이들이 어릴 때 몸이 아파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의지하던 딸이 결혼하면서 느끼는 헛헛함 정도로 생각된다. 다소 과한 반응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한동안 그러다 말일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왜 엄마와 거리감을 두고 싶다고 하면서도 놓지를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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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두려운 건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 같은 부부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데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 있어도 잘못되었다며 선을 그어버리는 세상이 나는 더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을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를 빌려 떨쳐낸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 나는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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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배우자는 결혼하면서 자녀를 두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변 시선이 따가워 때론 두려움을 느낀다.


부부간에 합의된 사항이나 자녀를 낳고 낳지 않고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가 자녀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크다. 자신과 같은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은 거다.


잘 키울 자신도 없고, 그런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대체 모녀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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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홍차를 절제하면서 나와 카페인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균형을 잡고 나니 오히려 카페인이 허락된 날이면 홍차의 맛과 향에 내 맛봉오리를 더욱 예민하고 섬세하게 반응했다. 절제한 만큼 기쁨이 커지고, 적절한 거리 안에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나를 잘 알고 나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사랑하기.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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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거리를 넓히는 데에는 실패한 저자는 음식을 통해 힐링을 하는 듯하다. 카페인 섭취 시 수면 등의 문제가 생기는 저자는 절제하는 시간을 통해 오히려 더 맛과 향을 깊이 만나볼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절제와 거리 둠을 통해 이제야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말하는 저자.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회피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진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저 멀리 치워두고, 다른 대안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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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년 전 영국 귀족들이 온실 재배된 비싼 오이를 구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며 먹었을 오이 달걀 샌드위치를 나는 이렇게 편안하고 우아하게 즐긴다. 귀족도 안 부러운 맛. 이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오이 달걀 샌드위치를 아직까지 주나 씨에게는 만들어 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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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남편 주나 씨에 대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보듬어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런 유일무이한 사람에게 오이 달걀 샌드위치를 만들어 준 적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자신은 그토록 맛있게 몇 번을 해먹으며 힐링과 위로를 맛본 음식인데, 너무 맛있어서라는 이유로 만들어 준 적이 없단다.


여기에서 나는 또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통은 맛있는 음식, 좋은 장소, 멋진 풍경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인데, 저자는 맛있으니깐 나만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이기적인 심보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음식에 대해 언급할 때 이런 식의 생각이나 심정이 담긴 글이 후반부에 꽤 많이 등장하는데, 그래서 나는 저자의 마음속에 덜 자란 아이가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그런 배우자를 만난다면, 오히려 많이 만들어 함께 먹으면서 내 감정과 사랑을 오롯이 나눌 것 같은데, 저자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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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맛있는 걸 먹을 때 나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양보하거나 같이 먹자고 권하지 않는다. 나 먹기에도 너무나 바쁜 사람, 먹을 때만큼은 내 코가 석 자인 사람, 그게 바로 나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만 한 마리 염소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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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당당히 말한다. 저자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함께하는 이들에게 음식을 양보하거나 권하지 않는다고. 자기 먹기에도 바쁘며 내 코가 석자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게 자신이란다.


보통 이런 행동은 미취학 아동들이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하는 행동으로, 이럴 때 부모가 나서서 교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맛있는 건 나만 먹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음식으로 뭔가를 푸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대목이다. 애정결핍, 성인 분리불안 등의 여러 불안 증세들을 정작 엄마와는 풀지 못하고, 음식을 통해 대체해서 풀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신기하게 저자가 이토록 잘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남편을 비롯해 주변에 꽤 괜찮은 지인들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그녀 주변에는 손수 맛있는 음식을 가득 차려 매번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지인들이 있고, 무엇을 하든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남편이 있다. 또 맛있는 반찬을 해주시는 시어머니까지.


개인적으로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 중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일화가 하나 있는데, 묵을 집에서 직접 쑤어서 먹었다는 일화에서 엄마와 통화하며 묵 이야기를 했다는 장면이 있다.


그때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이 묵을 만들었다는 문장을 읽으며 엄마에게도 만들어서 보내려나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엄마가 잘 먹지 못한다거나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는 에피소드가 앞에 있었음)


저자는 자신이 만든 맛있는 묵을 혼자 먹었다. 엄마에게는 똑같은 묵가루를 보냈다. 엄마는 알아서 혼자 만들어 드셨던 듯하다.


맛있는 음식은 혼자 먹는다는 맥락과는 일치하지만, 아픈 엄마에게 묵사발 정도는 만들어서 보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평소보다 많이 만들었는데, 그걸 조금 떼어서 보내줄 수는 없었을까? 묵 만드는 게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데, 그 시간을 단축시켜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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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몇몇 글들은 어떤 곳에 기고했던 글도 있는듯하다. 그 매체는 무엇을 보고 글을 실었던 걸까?


힐링과 위로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사실은 신세한탄의 글로 가득 채워진 저자 자신만 대접받았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최종 소감이다.


제목은, '오늘도 나만 대접합니다'로 고쳐 써야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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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시선
이재성 지음 / 성안당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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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스무 살의 저자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쓴 시로 가득 채워져 있다. 소재를 보면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은데, 의외로 느끼는 바는 다양하다.


학교를 오가며, 운동을 하며, 매일 거닐었을 길과 풍경들, 그리고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당시의 생각과 느낌들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제 막 성인의 문턱으로 들어섰을 때의 고뇌와 꿈, 그리고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이던 풍경들을 담아낸 시를 읽으며, 모처럼 나 역시 스무 살의 날들을 떠올려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총 2부 100편으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저자의 SNS를 통해 독자들이 선정한 60편의 시와 저자가 직접 고른 40편의 시가 담겨 있다.


운동을 그만둘 때쯤인 열아홉 살부터 쓰기 시작해 스무 살까지 쓴 시를 엮어 만들었다는 이 시집에는 그래서인지 청년의 고뇌와 꿈, 불안, 사랑 등 다양한 감정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때 어떤 시선으로 사물과 사람들을 보고 있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의 큰 변화를 맞게 되는 스무 살, 그리고 그때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떠한지를 이 시를 통해 살펴보며, 우리의 초심과 스무 살의 날들을 다시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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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 안 양말이 다 젖도록

눈을 밟아대며 놀았던 내가


이젠 신발이 젖을까 봐

눈을 피해 걷는다


머리 위로 흰 눈이 날릴 때면

입을 벌려 눈을 먹어대던 내가


이젠 머리가 젖을까 봐

우산을 챙겨 나간다


나는 눈이 싫어지지 않았는데

우리 사이는 언제부터 멀어진 걸까...

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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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으며 문득 생각해 보니, 나 역시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눈이 싫어지지는 않았는데 왜 이토록 사이가 멀어진 걸까? 이게 바로 아이와 어른의 차이인 걸까?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아예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산다는 것에 살짝 충격을 먹었다. 어쩌면 저자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선에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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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하늘은

세상에서 제일 큰 미술관


매일매일 새로운 작품이 전시되는

잘나가는 미술관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열려있는

연중무휴 미술관


남녀노소 누구나 공짜로 볼 수 있는

세상 착한 미술관

4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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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정말 그러하다. 언젠가부터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보고는 하는데(특히 여행가서는 더 하늘을 자주 올려다 봄), 미술관을 좋아하는 나조차 한 번도 하늘을 보며 미술관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발상의 전환을 해보니, 그냥 하늘을 볼 때보다 어쩐지 더 신나는 기분으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만나볼 수 있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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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거칠고 까칠한 면으로


나를 긁어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내게 상처를 입히려

끊임없이 나를 무시하고 깎아내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긁어대고 깎아내릴수록


'나'라는 작품이

점차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7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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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시 발상의 전환이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나를 깎아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징글징글'하다 생각하기만 했었는데, 뭔가 도 닦는 마음으로 '나'라는 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시간이다 생각하면, 조금은 화가 덜 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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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곗바늘



움직여야 한다는 말,

바로 시계가 그 말을 증거한다


쉬지 않고 움직이느라

날씬해진 초침과,


그나마 조금씩은 움직여서

통통한 분침,


그리고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비만이 되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있는

저 시침이 바로 그 증거이다

8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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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발상이다. 시를 읽으며 시계를 쳐다보니 초침과 시침, 그리고 분침이 달리 보인다. 사람도 움직임이 줄어들면 비만으로 갈 확률이 높아지는데, 어쩌면 시계에 비유해서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 당장 일어나서 움직여야겠다. 날씬한 초침처럼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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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감성에서 조금 더 성숙한 면모를 가진 시인의 이야기를 '시'를 통해 만나보았다. 비슷한 주제(이를테면 '눈', '별')가 많았음에도, 다른 이야기로 풀어낸 것을 보며 변화무쌍한 시기를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스무 살이기에 느낄 수 있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경험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스무 살은 불확실함이 넘쳐나는 시기이고, 그렇기에 불행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이 영감이 되기도 했다가 또 와르르 무너진 것 같은 불행처럼 다가오기도 하는 청춘. 이 시를 읽으며 잠시 나 역시 스무 살이 되어 청춘의 맛에 퐁당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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