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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헤어지는 중입니다
이강선 지음 / 부크럼 / 2025년 2월
평점 :
"지금 당장 엄마와 해보고 싶은 일들을 시작하세요! 너무 늦지 않게요!!"
처음에 책 제목을 보고, '이미 너무 늦어버렸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고 보니 저자는 '아직' 늦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선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내심 안도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자는 엄마와의 일화를 에피소드 형태로 풀어낸다. 그리고 그 속에는 깊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남은 유일한 가족이 엄마와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무능력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가난 속에서 다섯 식구를 먹여살려야 했던 엄마는 생계를 오롯이 혼자 감당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지난한 세월을 버텨내며 살아오던 엄마가 살만해질 때쯤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평생 병약했던 남편, 그리고 성실했던 큰아들과 둘째 딸까지. 엄마는 그런 자신의 슬픔을 오롯이 자신만 들여다보는 노트에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저자인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어받아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아낸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위해, 일상 속 모든 순간을 추억하고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매 순간 가족을 위해 애써 준 엄마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애틋한 엄마와의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엄마가 살아온 세월에 더해, 떠나보낸 가족들의 사정, 그리고 이후 홀로 남겨진 저자가 엄마와 보내는 시간들까지.
저자가 담은 여정들을 살펴보면 어쩐지 끝을 두고 미리 써 내려간 일기처럼 느껴져 슬프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떠올릴 수 있는 좋은 추억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아직은 색을 잃지 않았지만, 조만간 빚 바랜 앨범 속 이야기가 될 그 시간들 속을 거닐다 보면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엄마와의 에피소드들도 솔솔 떠오른다.
그때 이랬으면 좋았을걸, 왜 그때 화를 냈을까, 지금이라도 이렇게 해보자 하는 다짐과 추억을 되새기며 스스로 위로와 위안을 갖게 된다.
언젠가 꼭 한번은 이별을 경험해야 하기에, 너무 늦지 않게 저자처럼 엄마와의 기억을 붙잡아 둘 수 있는 방법 하나쯤 만들어두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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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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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구순의 엄마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살아냈다. 광복되던 해에는 열 살이었고,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열다섯 살이었다. 열일곱 살에 결혼 후 임신을 했고, 군대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이후 엄마 자신이 홀로 세상과 싸우는 전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친정집에 들른 엄마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던 이웃 동네에 살던 어떤 이가 자신에게 오면 딸을 잘 키워 주겠다고 하더라는 말에 그 말만 믿고 스무 살의 엄마는 보따리를 싸서 아내가 있는 그 사람 곁으로 갔다고 한다. 훗날 그이가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엄마는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복혼을 한 것이다.

-엄마의 엔딩노트-
나는 알고 있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가면서도 숨기듯 가지고 간 노트가 엄마의 '엔딩노트'가 될 것임을. 오래전에 남편을 잃고 얼마 전 아들과 딸을 먼저 보내고도 엄마가 아직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유는 저 노트 덕분이라고 짐작해 본다.
■나(저자)
엄마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으로부터도 떠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모두 서둘러 떠나갔고, 나만 그 자리에 남았다.
평생 병약했던 아버지, 오빠와 언니까지 나를 두고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오빠, 언니, 나 사이는 각각 2살 터울) 닮은 점이 너무 많아 나의 분신이라 생각했던 큰 딸은 중학교 3학년 이후 나를 떠났고 지금도 타국에서 살고 있다. 늘 곁에 두고 애지중지하던 작은딸마저 3년 전 독립을 선언하고 집에서 30여 분 거리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오빠
아무 전조증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새벽에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대학병원에서 급히 터진 혈관을 봉합했지만, 회복하지 못했다. 인공호흡기를 단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오빠는 열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언니
2002년, 언니에게 신장 이식을 해주었다. 이후 건강한 나의 신장을 이식받고 언니는 20년 동안 신장 투석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다만 당뇨병이 완치된 건 아니어서 최근에는 당뇨 발로 인한 괴사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복숭아뼈가 염증에 녹아 축 늘어진 발목을 고정하는 수술을 받으러 정형외과에 입원했다. 무사히 수술을 끝내고 퇴원을 앞두고 있던 중 언니는 갑자기 새벽에 심정지가 일어났고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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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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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밀착된 관계에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먼저 불안을 넘어설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 해도 그렇다. 멀어져야 다시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도 생겨날 테니까.
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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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도 거리감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불안하다고 너무 붙어있다 보면 오히려 그게 독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니 어느 누구라도 먼저 불안을 넘어선 용기를 가져보자. 멀어져보면 얼마나 애틋하고 그리운지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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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가 회한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뭔가를 해야만 한다. 그러니 더 자세히 삶을 살펴야겠다.
11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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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가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너무 늦어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면 깊은 회환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이전에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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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작은딸이 말했다. "희미해진 멍의 흔적은 훈장으로 가슴에 지니는 거야."
한 번 받은 상처는 흔적 없이 말끔히 지워질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다만 더 이상 그 상처가 딸을 다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가벼운 바람도 모래 위에 물결 모양의 흔적을 남기지 않던가. 그렇게 만들어진 울퉁불퉁한 연흔도 시간이 쌓이면 단단히 퇴적층의 땅으로 굳어지고 온갖 흔적과 이야기를 품어 역사가 된다.
상처가 오히려 훈장으로 변해서 이제 두 딸도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응원한다.
150~15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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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피고름 나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기기보다, 단단하게 굳어져 역사와 훈장으로 자리한다는 말로 바꿔 마음에 새겨보면 어떨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영광의 훈장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어깨 펴고 인생을 더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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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분석 상담 전문가 박우란은 그의 책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무 괜찮아지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좀 괜찮지 않으면 어떤지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 역시 괜찮아지려고 너무 발버둥 치느라 괜찮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딸과 함께한 순간들은 내가 힘들 때마다 경직된 몸을 이완시켜 주는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매 순간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엄마는 그래도 돼요."
16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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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괜찮아지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간다. 실은 정말 괜찮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럴 때 그냥 괜찮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놓아주면 어떨까?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더 오랫동안 괜찮아 보이려 노력한 엄마에게 '엄마는 그래도 돼요'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무엇이든 괜찮다고, 괜찮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그렇게 건네면 엄마는 내심 딸의 그 말에서 큰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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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어떤 의미에서 그 자신이 바로 내 경험의 원천이고, 내 기억을 쌓게 만든 소중한 집이었으며, 나를 이루는 정체성의 중심이었다. 그러니 누구라도 엄마가 있는 곳이 바로 돌아가고 싶은 집이고 고향이 되지 않던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돌아갈 집도 마음의 고향도 잃어버리게 될 것 같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직은 엄마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17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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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한마디에 울컥 울음이 새어 나올 것 같은 이유는 아마도 엄마가 있는 곳이 바로 집이자 고향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돌아가신다는 말은 곧 우리 모두 집 잃은 고아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엄마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마웠다는 말을 건네보자.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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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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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느낌을 받는다.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엄마'라는 이미지에 담긴 남다른 동질감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저자의 말처럼 엄마가 있는 곳이 곧 고향이나 돌아가고 싶은 집처럼 느껴져서 일 수도 있겠다.
이런 사유로 읽는 내내 반성의 마음과 함께 나 또한 위로를 많이 받았다. 더불어 아쉬운 마음도 들었는데, 특히 '엄마와 이미 헤어진 사람'들은 이 마음이 더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모두 헤어졌거나, 헤어지는 중이거나, 앞으로 헤어질 예정에 놓여있다. 일상 속 모든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지금'에 더 집중해 보면 어떨까?
여기에 더해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끼지 말고 바로바로 건네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