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요리한 음식의 역사
도현신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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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쟁에 관한 책은 많다. 음식에 관한 책도 많다. 전쟁과 음식의 결합. 훌륭한 틈새시장이다. 전쟁와 관련된 34개가지 음식에 관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간 전쟁과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쓴 저자인지라 음식 이야기가 전쟁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버무러져 읽기 편하게 서술되어 있다. 해당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권할 만하다. 

 

 

그런데, 전쟁과 음식에 관한 입문서가 되기에 부족한 부분이 다소 있다. 오해를 살만한 내용도 있고 심지어 사실관계가 틀린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35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는 17세기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했던 무력 집단은 유목민들이었다.” - 대항해시대는 15세기 말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틀린 내용이다. 

 

 

75 “(남북조시대를 설명하며:필자) 남쪽은..... 한족들이 동진과 송··양나라를 세우며 자리를 보존했다.” - 남조 국가들 중 이 빠졌다. 

 

 

89 앵글로 색슨족도 모두 스칸디나비아에서 발흥했다” - 필자가 알기로는 앵글족과 색슨족 모두 오늘날 독일 지역에서 발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앵글족은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에 있는 앙겔른 지역 출신이며, 색슨족은 다른 말로 작센족이며 독일의 엘베강과 ·베젤강 유역에서 북서 독일 지역에 걸쳐 살았다고 알고 있다. 

 

 

203 대부분 한국인은 몸 안에 젖당이 없어 사실 치즈도 먹기 어려운 식품이다.” - 젖당은 락토스(lactose)라 하고, 이름 그대로 포유류의 젖에 들어있는 당이다. 젖당, 즉 락토스를 소화시키는 소화 효소를 락타아제(lactase)라고 하는데 이 효소가 없거나 부족할 경우 우유 등의 유제품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젖당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락타아제 부족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대부분의 한국인의 몸 안에 젖당이 없는게 맞기는 하다. 수유기의 여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347 “..... 일본은 결국 원자폭탄 두 발에 2백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면서 몰락했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희생된 사람의 수는 히로시만 14만 명, 나가사키 7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200만 명이 넘는 전사자는 태평양 전쟁 전체 전사자로 보인다. 그런데 문맥상 원자탄 희생자 수로 읽히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367 “(소련은) 1991년 연방이 해체되면서 15개의 작은 나라로 분열되었다.” -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를 작은 나라라고 하는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물론 기존의 소련에 비하면 작겠지만 말이다. 

 

 

380 “(러시아) 국민들이 보드카를 너무 마셔 알코올 중독자들이 늘어나고 그 바람에 평균 수명이 58세에 머무는 등 보드카가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고 했는데, 어떤 자료를 찾아봐도 러시아인의 평균수명이 58세라고 나오는 자료는 없었다. 저자가 58세라고 했던 이유는 다음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저자는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이 아니라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이 58세라고 했어야 했다. 그래도 문제가 있는 것이 러시아 남성 평균 수명이 58세(혹은 59세)였던 것은 2006년 자료다. 이 책이 출간된 해가 2011년이니까 58세 보다는 2013년 통계인 64세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63.8세였던 1960년보다 크게 떨어진 59세다. 여성의 평균수명도 72.4세에서 72세로 떨어졌다.” (‘러시아, 해마다 인구 80만명씩 줄어들어 내일신문, 2006-09-08)

“WTO의 자료에 따르면 2013년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70세로 조사대상 193개국 가운데 하위권인 124위에 머물렀다. 남성 평균 수명만 따지면 64세로 캄보디아·가나와 함께 공동 148위로 더 밀려났다. 반면 여성 평균 수명만 따질 경우 76세로 남성과 무려 12세 차이가 났다.” (‘러시아 男女 평균 수명 무려 12년 차이그 이유가?’ 머니투데이, 2014.02.01.)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이상의 내용이 수정되기를 바라고, 저자의 오류가 아니라 필자의 오류가 있다면 이 글을 보는 누구든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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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이인웅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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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다소 멍한 상태에서 <파우스트>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완역본도 아닌 축약본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같다. 대문호들이 이런 대작을 쓴 나이는 다양하겠지만 대개 10대나 20대는 아니었을테니 그런 나이에 인생의 다양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성찰이 담긴 대작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할테니 말이다. 이제 40대가 되어 읽으니 이해와 재미와 감동이라는 '독서의 삼위일체의 경지'를 맛보게 된 기분이다. (<파우스트>를 보면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 중 '전쟁, 무역, 약탈의 삼위일체'란 표현이 나와 흉내를 내 봤다.) 40대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해진 첫 순간이 바로 <파우스트>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인것같다. 

 

총 5부 중 그레첸의 비극에 해당하는 장과 마지막 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지상에서의 행복과 자유, 천상에서의 구원도 결국 인간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라는 근대의 부르주아적 관점이 엿보이기도 했고, 마리아라는 구원의 중재자를 내세우면서도 중세 교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등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파우스트가 스스로 신에게 회개를 하고 구원을 구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노력을 인정 받아 구원을 받는 모습은 기존의 기독교에서 한 발자국 인본주의로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역자 해설'에서는 마지막 장에서 파우스트가 건설하려 했던 국가를 공화국이라 했는데 다소 비약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기독교와 신화와 전설과 당대의 문학에 대한 내용이 너무나 많은 비유와 상징의 방법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는 대중적으로 읽혀졌을지 모르나 현대인들이 읽기 편하지많은 않은 것같다. 하지만 역자의 주와 해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역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명구가 너무 많지만 8개 정도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는 튼튼한 위장을 가졌으니, 

온 나라를 집어삼키고서도, 

아직 한 번도 체해본 적인 없습니다." (1권 181쪽)


"그러나 난 마비된 상태에서 내 행복을 찾지는 않겠다. 

전율이란 인간이 지닌 가장 훌륭한 감정이니라.

세상이 인간에게 그런 감정을 쉽게 주진 않을지라도,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야 거대한 일을 깊이 느끼게 되느니라." (2권 104쪽)


"누구나 나이 서른이 넘으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2권 139쪽)


"폭군과 노예들의 그 싸움일랑 집어치우도록 해라.

(중략) 놈들은 자유권을 위해 싸운다고 말하지만, 

자세히 보면 노예가 노예들과 싸우는 것이야." (2권 150쪽)


"통치하는 것과 동시에 향락하는 것이 

충분히 양립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정말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멋대로 그릇된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커다란 잘못이다. 명령을 내려야 하는 자는

명령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껴야 하는 법이니라." (2권 353쪽)

 

"전쟁과 무역과 해적질은, 

삼위일체로 떼어놓을 수가 없느니라." (2권 409쪽)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2권 431쪽)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

그자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노라." (2권 4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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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과 함께하는 세상 여행 - 한옥연구가가 들려주는 문화 이야기
이상현 지음 / 채륜서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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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213쪽의 부담 없는 분량이라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읽어낼 수 있었다. 저자는 토지주택공사에서 일을 하다가 소설을 하겠다며 퇴사를 했다가 현재는 한옥 연구가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저자의 그러한 이력에 걸맞게 문체도 유려하고 땅이나 집에 대한 관찰력도 뛰어나며 특히 안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롭게 배운 사실들도 적지 않다. 삼국시대 집 모양 토기에서 지붕옆에 툭 튀어나온 구멍이 굴뚝이 아니며 화로나 등잔불을 대신하는 보조 난방,조명기구인 고콜이라는 주장은 신선했고, 유럽에서 돌집이 발달한 이유, 한옥의 구들의 우수성 등에 대한 내용도 유익했다. 집을 새로 지을 때마다 새로운 성주신을 모시며,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한옥, 자연과 더불어 살며 하늘을 향한 소망을 나타내는 지붕구조 등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었다.

 

사료들도 적지 않게 다뤄서 설득력을 높였으며, 전반적으로 한옥의 우수성과 그 의미에 대한 인문학적인 성찰이 돋보이는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옥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힘들거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이 다소 있었따.

 

마지막에 나오는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과 공자의 잠옷'은  무슨 의도로 쓴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공자의 잠옷 얘기'는 조금 이해가 된다. 바지도 없고 팬티도 없던 춘추전국 시대에는 잠을 자다가 속살이 보일 수도 있으므로 공자가 2.5m짜리 잠옷을 입었다는 논어의 기록을 언급하며 바지는 북방민족의 것이므로 우리가 중국에 바지를 전해준 셈이니까 우리 문화, 특히 한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자는 주장이다. 흉노, 선비, 돌궐을 비롯한 수많은 북방민족들 사이에 슬쩍 우리 민족을 끼워넣은 점은 그냥 애교라고 하더라도 공자의 바지 이야기 앞에 왜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 얘기가 나와야 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이해가 되는 분이 있다면 알려주시길.

 

옥의 티 하나 더. 한옥과 같은 비대칭적인 주택에 살아온 한국인들의 문화적 배경때문에 현대차 벨로스터와 같은 비대칭적인 디자인이 나올 수 있었다는 주장은 좀.....

 

 

* 통찰력이 돋보이는 구절들

 

"양적인 성자을 추구하는 교회에는 아무래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한옥이 부자연스럽다." - 55쪽

 

"단군 신화에서 보는 것처럼 옛날부터 우리는 하늘을 최고신으로 섬겼다. 그러나 우리가 오로지 샤머니즘만을 가지고 역사를 헤쳐 온 건 중국과의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 55~56쪽

 

"유일신이라는 믿음은 자기가 믿는 신이 제일 세다는 뜻에 불과하다." -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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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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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시집이란 걸 완독한 사례가 이번이 세 번째다. 20년 전쯤 읽었던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와 작년에 읽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이어 김선우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었다. 그것도 매우 재미있게. 간혹 <현대문학>이나 <창작과 비평> 같은 문학 계간지에 실린 시를 흥미롭게 읽어본 적은 있어도 시집 전체를 재미있게 읽은 일은 나에게 드문 일이었다. 흥미는커녕 시에 대한 거리감만 느끼게 만들었던 시집이 생각난다. 우리 과 동기들 중에 여러모로 뛰어났던 친구가 애독했다길래 '몰래' 사서 읽어봤던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어디로 갔는지 내 서재에서 찾을 수가 없다. 다시 사서 읽어봐야겠다. 이제는 말할 수, 아니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김선우라는 시인을 알게 된 것은 뉴스를 통해서였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 밀양 송전탑 건설 저지를 위한 집회,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크레인 농성 현장 등 사회 참여의 현장에서 발견한 여류 시인의 이름이 바로 김선우였다. 얼마 전부터는 <한겨레 21>에서 고정 칼럼을 쓰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시집을 사서 읽어봤다. 읽어 본 소감을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보다 더 철저하게 혁명을 추구하는 시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김남주처럼 "모가지에 칼이 들어가야 그들은 착취의 손을 놓더라고.", "그날 밤 그들이 마신 술은 민중의 피였다"등의 살벌한 표현 대신,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시체놀이, 16)과 같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쓰면서도 혁명을 이야기하는 시인 김선우.

 

이쯤에서 그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의 혁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가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먼저, 그는 축구장을 싫어한다. '축구장 묘지'(49)에서 축구장은 거대한 묘지로 표현된다. 그녀는 축구를 국가들 간의 권력 대결, 나아가 전쟁으로 상징화해 표현한다. 그는 '기아'도 혐오한다. “이상하지 않니? 식량은 충분한데 한편에선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 죽어가는 아이들 옆에서 배불리 먹은 걸 토하다 죽어버린 사람들이 걸어 다녀"('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무덤', 57), 지구의 한편에서는 다이어트 열풍이 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굶주림이 만연하는 현실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의 풍요로움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 상품들의 소비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색색으로 물들인 죽음들을 쇼핑하는 누군가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무덤', 57) 또한 그는 세계사가 남성들의 역사라 비판한다. '하이파이브'란 시를 보면 자궁경부암 검진을 하는 기계를 여성이 만들었다면 따뜻하게 데우는 기능을 추가했을 거라며 간호사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 도시의 갑과 을'에서 서로 착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내가 매달려 살고 있는 이 줄을 / 먹어치워야 한다 / 거미줄을 먹는 거미처럼”, “어느 날 갑과 을이 허공에서 딱 마주쳐 / 꽁무니에 매달린 서로의 얼굴을 먹어치울 때까지”('이 도시의 갑과 을', 70) 그에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서로를 뜯어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서로에 대해 얘기는 하지 않는다”('오늘의 개더링', 71)는 것이다. 그는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싫어한다. 그에게 폭력이란 일종의 '규율권력'이다. “내 구두는 한짝, 구두는 무조건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12) 그에게는 반대말도 규율권력이자 폭력이다. “반대말이 있다고 굳게 믿는 습성 때문에 / 마음 밑바닥에 공포를 기르게 된 생물('여전히 반대말놀이', 98) 행복과 불행, 남자와 여자, 길다와 짧다, 양지와 음지, 빛과 어둠 모두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 이외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김남주가 '독재와 민중, 외세와 민족, 자본과 노동'이라는 대립물에만 관심을 갖던 것에 비해 혁명의 대상은 훨씬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선우는 김남주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혁명은 무엇인가?

그에게 혁명이란 모든 존재,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그의 사랑은 비단 사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종족의 피가 네 종류뿐이란 게 부끄러워요” “저 새의 혈액형을 알아다 주세요, 돌고래.... 펭귄, 푸른 자벌레.... 기린과 오로라의 혈액형, 나를 홀리는 모든 존재들의 피가 궁금해” “팔만사천가지 혈액형이 반딧불처럼 발광하는 13월을 불러줘요 내 피를 마저 줄게요”('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 한편 그의 혁명에의 열정은 죽음을 각오하는 데까지 나아가서 혁명을 위해 죽고 싶다는 말까지 한다. “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불명예다 / 내 시는 명예의 쪽인가 불명예의 쪽인가” ('아직', 108) 그가 그렇수 있는 것은 혁명이 단지 붉은 깃발과 머리띠와 구호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혁명이란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이므로 그 사랑(=혁명)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하는 생명에 반하는 것들, 다시 말해 앞에서 언급한 그가 싫어하는 것들을 제외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이제 세상에 이해 못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그 모두를 사랑할 자신은 없어서 편협한 사랑이 용서되는 시인으로 남기로 한다”('마흔', 61)고 고백해서 종교인과는 차별화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한다.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이 혁명이라는 그의 지론은 생태주의와도 연결된다.

아직까진 무상보급되는 햇빛을.......” ('햇빛 오일', 63)이라는 표현을 보라.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햇빛도 그녀에게는 언젠가는 고갈될 수 있는 한정된 에너지일 뿐이다. 그는 콩나물 한 봉지 속에서도 우주를 발견한다.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85) 심지어 달방 있음에서는 지구를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도 엿보인다. “이봐 당신들! 내가 당신들한테 신세지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나한테 붙어사는 거거든?”(26)을 보라! 그의 표현대로라면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피부에 붙어 사는 기생충일지도 모른다. 그의 생태주의는 불교의 연기설과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거지에게 적선을 하더라도 자신과 거지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얼마 안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심지어는 오골계를 먹다가뼈가 검은 닭의 전생에 대해 생각하다가”, 닭의 몸통 속에서 아직 낳지 않은 작은 알 다섯 개를 보며 검은 뼈로 이루어진 골목을 순례하는 바람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먹지만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와 삶을 빌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너를 빌려가고 싶어. 가지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먹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빌리는 것이라는 깨달음만 있다면... ..('다만, 오골계 백숙 먹기') 이러한 그에게 병에 걸렸다고 살처분 당하는 닭이나 돼지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그는 닭과 돼지를 위한 진혼곡을 부르기도 한다. “머언먼 하늘에 서리를 풀 듯 너희를 풀어놓을 테다 따듯한 햇살 닿아 얼음이 녹으면 너희는 새로운 날개를 얻어라 존중받는 발굽과 쫑긋한 청력을 얻어라”('얼음놀이') 그의 생태주의는 계급에 대한 혐오감과도 맞닿아 있다. ‘구석, 구석기 홀릭을 보면 큰 달님을 그려야지 아직 계급이 나뉘지 않았을 때 사냥한 물소를 골고루 나누던, 흰 물소의 영혼이 우리를 용서하던 때라 노래한다. 이 구절을 계급 분화 이전의 원시 공동체사회에 대한 회귀본능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김선우를 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계급은 인간들 사이의 계급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구별짓기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육식을 하고, 육식을 하는 인간도 그들의 삶이 자신이 먹고 있는 고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삶, 그러한 삶을 흰 물소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에게 혁명은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 다른 말로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고 일치되는 것을 뜻한다. ''라는 존재도 수많은 타인들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문을 보는데 가 나를 꼬나본다 / 백여명 천여명 / 삼만여 십만여 육백만여 오천만여 모든 집계에는 언제나 가 있다 "(‘에게')는 것이다. 그래서 “‘에 속한 것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시간은 어디쯤에 이르러 최후의 가 될까" (‘에게)며 타인의 삶에 신경쓰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그는 체게바라를 존경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만큼 또다른 나인 타인을 사랑했던, 그래서 혁명을 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체 게바라에 바치는 헌시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려는 / 나는 나들이다 / 당신이 그런 것처럼이라 말하며 가 되고 결국 나들이 되는 상태를 혁명의 최고의 단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에게 나와 타인은 다른 존재가 아닌 하나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제주도로 밀양으로 떠나는가보다.

 

 

한편, 그가 말하는 혁명은 일종의 '영구 혁명'이다.

그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이며 삶과 죽음은 영원한 유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시체놀이'에서 딱정벌레가 죽은척하다가 지나가는 모습을 따라해 본다. 그러고 나니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는 척하게 되는 거란걸!”(시체놀이, 17) 깨달았다. 어차피 삶도 죽음도 영원한 유랑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유랑이 끝나고 또다른 유랑이 시작되.”('그림자의 키를 재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시인 마무드 다르위시에게 바치는 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포기나 절망을 모른다. 왜냐하면 나 혹은 다른 누군가 혁명을 하다가 죽더라도 죽음 이후에도 혁명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모든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그 혁명은 중단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민중 혹은 인간의 삶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느껴진다. 그에 의하면 짓밟힌 민중들은 죽은 것 같지만 다시 유랑, 혹은 혁명을 계속 할 것이다. ‘이 눕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지금까지 김선우의 혁명론을 중심으로 그의 시집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무한한 혁명을 꿈꾼다. 무한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존재들, 그리고 영원한 시간이라는 중의적인 뜻으로 읽힌다. 혁명은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하는 삶 속에서의 억압을 거부하는 혁명을 포괄한다. 그는 시인이기에 모든 존재들과의 교감하고, 그러한 공감 자체가 혁명의 출발점이다. 영원히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하다.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하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낙관한다. 잠시 쉬었다 가는 딱정벌레도 혁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아름답고 앙증맞은 표현들과 간혹 보이는 관능적인 시어들은 무한한 덤이다.

 

 

 

출처 : BookC의 冊戀愛談 (http://blog.naver.com/gru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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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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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책에 대한 추억은 지름신에게 돈이라는 제물을 바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명분이다. 이번엔 셜록 홈즈였다. 그것도 전집으로! ‘황금가지판 전집을 그저께 주문해서 어제 도착했고 그중 1<주홍색 연구>를 읽었다. 역시난 홈즈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내용의 재미야 두말할 필요가 없고, 막힘없이 술술 읽히는 것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상당히 신경을 쓴 번역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홈즈와 왓슨의 관계에 대해 지금까지 동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왓슨은 의학 박사에다가 군의관으로 참전 경험까지 있는 사람이고, 홈즈는 대략 대학생 정도의 젊은이인데도 불구하고, 대개는 친구 정도의 말투로 번역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황금가지판에서는 왓슨과 홈즈의 대화 속에 그러한 연배의 차이가 드러나는 번역을 해서 홈즈 라는 인물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왓슨이 반말을 하고 홈즈가 존대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존대를 하고 있다. 왓슨은 나이가 많지만 홈즈의 뛰어난 능력을 존경하는 존재이므로 서로 반말을 하는 것보다 상호 존대를 하면서도 왓슨이 내심 불쾌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보다 더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주홍색 연구>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만큼 셜록 홈즈와 그의 절친(동료? 조력자?) 왓슨과의 만남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따라서 첫 번째 이야기인 만큼 셜록 홈즈와 그가 활동했던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영국에 대한 얘기를 주로 해보려 한다. 사실 성인이 되어 읽은 추리소설은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큼 추리소설 자체에 대해 논할 능력이나 자격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줄거리나 추리 부분에 관한 이야기는 과감하게 생략!

 

홈즈의 성격을 이야기하자면 그는 매우 건방진사람이다. 자기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왓슨의 말허리 자르기, 시건방 떨기, 대답안하기 등을 남발한다. 영국 경찰의 능력에 대해서도 전혀 신뢰를 하지 않고 무시하기 일쑤이며 수수께끼 같은 말로 골려주기까지 한다. 홈즈의 입을 빌리기는 하지만 저자인 아서 코난 도일 자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왜냐면 추리소설계의 선배님들을 가차 없이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왓슨이 홈즈 씨를 보니 에드거 앨런 포의 뒤팽이 생각납니다.”라고 하자 홈즈는 제가 보기에 뒤팽은 수준 낮은 탐정입니다. 15분간 침묵을 지킨 다음에 그럴듯한 말로 친구들의 생각을 방해하는 수법은 아주 천박하고 자기 과시적인 것이지요.”(36)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브리오의 작품에 나오는 르콕 탐정에 대해서는 르콕은 형편없는 인물이지요. 괜찮게 봐줄 만한 것은 그의 의욕뿐입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속이 뒤집혔습니다.”(37)라고 응수한다. 왓슨의 말대로 머리는 똑똑할지 몰라도 안하무인이다.

 

둘째, 홈즈가 안하무인인 점은 그가 필요한 지식만 머리에 담으려 한다는 것이다. 왓슨이 작성한 셜록홈즈 지식의 범위’(28)라는 메모에 의하면 홈즈는 문학, 철학, 천문학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화학, 해부학, 복싱, 권투, 목검술, 바이얼린 연주는 수준급, 식물학의 경우 아편이나 독성에 대해서만 해박하고, 지질학은 흙의 색깔과 조성으로 지역을 구별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 외에는 문외한인 수준이다. 그는 자신의 목표와 상관없는 지식은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 심지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과 태양계의 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홈즈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의 뇌에는 필요한 지식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지식에 의해 기존 지식이 잊혀 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실용적인 태도가 아닐수 없다.

홈즈의 성격과 함께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해서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왓슨이 1878년 런던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영국군 군의관이 되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이 시대는 소위 빅토리아 시대후기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성과로 영국 제국이 최고 절정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 곳곳에 대영 제국에 대한 자신감혹은 제국주의적 사고가 녹아 있다. 예컨대, 왓슨이 군의관으로 참전한 전쟁은 제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인데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침략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왓슨은 부상을 입고 살아나는데 나는 흉악한 이슬람 전사의 손아귀에 떨어질뻔 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10) 침략군 군의관다운 표현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서도 신문기사를 인용하면서 모든 외국인들에게, 사적인 감정과 원한이 있거든 그것을 영국령까지 끌고 오지 말고 자기 나라에서 해결하는 게 현명하리라는 교훈을 안겨주었다.”(210, 이 책의 살인범과 살해당한 사람들이 모두 미국인인데 살인사건이 영국에서 벌어짐)라는 훈계를 젊잖게 던진다. 실제로 저자인 코난 도일은 1899년 제국주의 전쟁인 보어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에 따라 나가 남아프리카의 전쟁 : 원인과 행위(The War in South Africa : Its Cause and Conduct)”라는 책을 써서 영국군을 변호했으며 그러한 공로로 기사 작위까지 받은 바 있다.
 

홈즈의 성격 밑에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라는 배경을 깔아보니 몇 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셜록 홈즈는 당시대의 영국 중산층들의 열망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왓슨과의 차이를 살펴보면 그러한 측면이 더 잘 드러나는데, 먼저 왓슨은 의학박사지만 정치나 문학,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인물이다. 반면에 홈즈는 사립탐정이라는 자신의 일과 관련된 지식에 대해서는 해박하나 관계없는 지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영국인다운 실용주의적 태도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왓슨이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구시대의 지식인이라면 홈즈는 산업혁명이 꽃피다 못해 전 세계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다. 그런 의미에서 홈즈의 수식어로 '건방진'은 '자신감 넘치는'으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백과사전식 지식, 다방면에 해박한 교양인은 프랑스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계몽주의는 정치적인 권위에 도전했던 광범위한 사상운동이었고, 권력과의 치열한 투쟁을 의미하였다. 이 운동의 상징이었던 백과전서가 프랑스에서 출판된 것이 1751년이었다. 왓슨은 그러한 시대의 잔영이 남아있는 교양인이다. 반면에 영국은 그러한 정치적 투쟁의 시기를 옛날에 겪었고, 현재는 전 세계에 식민지를 둔 자신감 넘치다 못해 해도지지 않고, 세계의 공장인데다가, 셰익스피어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대영제국이 된 시대였다. 그러니 이제는 다양한 교양이나 정치적 투쟁 보다는 그렇게 거대하게 축적된 부를 차지하는 실용적인 지식이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홈즈는 경찰에게 범인을 체포한 공로를 빼앗기면서도 권력과 권위에 반대하기 보다는 실용주의적 태도로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의 마지막 발언을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을지라도 궤짝에 쌓인 돈을 볼 때, 내 마음은 뿌듯하도다.” 경찰관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도 경찰이 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사립탐정의 수입이 더 낫기 때문인 것이다. 하기야 그 시대에는 회사가 전쟁도 하고 조약도 맺고 식민지도 개척하던 시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대영 제국의 영광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식민지 개척이 결국은 사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 회사들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동인도회사나 남아프리카회사 같은 회사들 말이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대표하는 똑똑하고 논리적이며 돈 잘버는 부르주아 혹은 지식인의 표상이 셜록홈즈다. 비록 건방지지만 밉지 않은 건방짐,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나오는 휴 그랜트 같은? 그런 그가 당시 영국인들의 열망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혁명의 시대, 다방면에 뛰어난 교양인을 존경하는 구시대를 대표하는 왓슨이 제국의 시대이자 돈의 시대인 신시대를 대표하는 홈즈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편 <주홍색 연구> 이야기의 절반은 배경이 영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죽음의 문턱에서 몰몬교도들에게 구출되었지만 그들에게 핍박을 당해 죽는 노인과 처녀를 각각 장인과 아내로 둘 뻔했던 남자가 원수들을 살해한다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몰몬교도는 그 자신이 기독교도들의 탄압을 받아 서부로 이주해 황무지를 개척해 살았으면서 내부의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비밀암살단을 만드는 등의 폭력적 모습을 보이며 일부다처제를 고수하는 폐습을 고수하는 집단으로 그려진다. 현대인들에게는 이러한 특정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담은 것이 뜬금없이 보이거나 거슬려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2011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는 <주홍색 연구>가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인들에게는 이런 시각이 거부감 보다는 호감으로 작용하였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혁명을 일으켜 왕의 목을 잘랐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위해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에 가더니 영국에 대항해 독립을 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잊고 몰몬교들의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를 하고, 몰몬교도 들도 그들 내부에서 이견이 있는 자들을 박해하는 모습이 어쩌면 영국인들에게는 씁쓸하기도 하지만 통쾌하지는 않더라도 뭔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느낌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책의 말미에 신문기사를 빌어 너희들 일은 너희들끼리 해결하고 영국으로 가져오지 마라! (너희들 그럴 줄 알았어. 대영제국의 품을 떠나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거야. 싫다고 떠날 때는 언제고 왜 여기까지 와서 민폐를 끼치나? 위대한 영국의 수사관(혹은 탐정)이 있었기에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기는 했지만.)”고 했던 것은 아닐까?

 

책의 제목인 <주홍색 연구>도 어쩌면 호손의 <주홍 글씨>에 나오는 주홍을 염두에 두고 붙인 제목일 것이다. 일단 주홍글씨가 1850년도에 나왔고, <주홍색 연구>1887년에 출간되었으므로 코난 도일이 <주홍글씨>를 읽었을 가능성은 높다. <주홍 글씨>에서 간통을 한 연인이 죽을 때까지 ‘Adultery(간통)’‘A’자를 달고 다니는데, 살인범이 시체 옆에 자신의 피로 써 놓은 ‘Rache(복수)’주홍 글씨이자 범죄를 상징한다. 간통한 여인은 보이는 글씨를 달고 살았지만 <주홍색 연구>의 살인범은 가슴 속에 복수를 위한 살의라는 주홍 글씨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셈이다. 간통한 여인도 기독교도(청교도=개신교도), 살인범도 기독교도(개신교도로 추정). 차이가 있다면 호손의 책은 죄의 본질이나 인간의 어두운 면등 철학적·심리적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코난 도일은 그런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몰몬교도 문제나 살인범의 인생사에 대해 연민이나 성찰을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겠으나 홈즈 자신은 그런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돈 잘 벌면 되지 뭐라는 식으로 마무리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는 원래 문학이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지 않은가?(‘셜록홈즈 지식의 범위’(28)을 보라) 이게 바로 코난 도일 식의 실용주의다. 오지랖 넓게 철학이니 정치니 하는 것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그런 것들은 추리를 위한 배경에 불과하고 추리소설은 추리소설다운 재미를 갖추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주홍색 연구입니다. (중략) 삶의 무채색 실 꾸러미 속에, 주홍빛 살인의 혈맥이 면면히 흐르고 있어요. 우리가 할 일은 그 실꾸리를 풀어서 살인의 혈맥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71)

 

아서 코난 도일에게 삶은 무채색이었다. 1권 밖에 읽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소설도 무채색이다추리소설이라는 장르적 실용에 충실하다는 점을 빼고는 말이다하지만 그의 글에서 제국의 시대에 살았고 제국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삶 자체가 감춰 질수는 없었다비록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현실이 무채색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출처 : BookC의 冊戀愛談 (http://blog.naver.com/gru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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