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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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시집이란 걸 완독한 사례가 이번이 세 번째다. 20년 전쯤 읽었던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와 작년에 읽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이어 김선우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를 읽었다. 그것도 매우 재미있게. 간혹 <현대문학>이나 <창작과 비평> 같은 문학 계간지에 실린 시를 흥미롭게 읽어본 적은 있어도 시집 전체를 재미있게 읽은 일은 나에게 드문 일이었다. 흥미는커녕 시에 대한 거리감만 느끼게 만들었던 시집이 생각난다. 우리 과 동기들 중에 여러모로 뛰어났던 친구가 애독했다길래 '몰래' 사서 읽어봤던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어디로 갔는지 내 서재에서 찾을 수가 없다. 다시 사서 읽어봐야겠다. 이제는 말할 수, 아니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말이다.

 

김선우라는 시인을 알게 된 것은 뉴스를 통해서였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 밀양 송전탑 건설 저지를 위한 집회,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크레인 농성 현장 등 사회 참여의 현장에서 발견한 여류 시인의 이름이 바로 김선우였다. 얼마 전부터는 <한겨레 21>에서 고정 칼럼을 쓰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시집을 사서 읽어봤다. 읽어 본 소감을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보다 더 철저하게 혁명을 추구하는 시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김남주처럼 "모가지에 칼이 들어가야 그들은 착취의 손을 놓더라고.", "그날 밤 그들이 마신 술은 민중의 피였다"등의 살벌한 표현 대신, “바람 한소끔 물 한 종지 햇빛 한 바구니 흙 한 줌 고요 한 서랍”(시체놀이, 16)과 같은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쓰면서도 혁명을 이야기하는 시인 김선우.

 

이쯤에서 그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의 혁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가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야 한다. 먼저, 그는 축구장을 싫어한다. '축구장 묘지'(49)에서 축구장은 거대한 묘지로 표현된다. 그녀는 축구를 국가들 간의 권력 대결, 나아가 전쟁으로 상징화해 표현한다. 그는 '기아'도 혐오한다. “이상하지 않니? 식량은 충분한데 한편에선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 죽어가는 아이들 옆에서 배불리 먹은 걸 토하다 죽어버린 사람들이 걸어 다녀"('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무덤', 57), 지구의 한편에서는 다이어트 열풍이 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굶주림이 만연하는 현실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의 풍요로움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 상품들의 소비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색색으로 물들인 죽음들을 쇼핑하는 누군가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무덤', 57) 또한 그는 세계사가 남성들의 역사라 비판한다. '하이파이브'란 시를 보면 자궁경부암 검진을 하는 기계를 여성이 만들었다면 따뜻하게 데우는 기능을 추가했을 거라며 간호사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 도시의 갑과 을'에서 서로 착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내가 매달려 살고 있는 이 줄을 / 먹어치워야 한다 / 거미줄을 먹는 거미처럼”, “어느 날 갑과 을이 허공에서 딱 마주쳐 / 꽁무니에 매달린 서로의 얼굴을 먹어치울 때까지”('이 도시의 갑과 을', 70) 그에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서로를 뜯어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서로에 대해 얘기는 하지 않는다”('오늘의 개더링', 71)는 것이다. 그는 모든 폭력적인 것들을 싫어한다. 그에게 폭력이란 일종의 '규율권력'이다. “내 구두는 한짝, 구두는 무조건 한 켤레란 말은 내겐 폭력이지”('이건 누구의 구두 한짝이지?', 12) 그에게는 반대말도 규율권력이자 폭력이다. “반대말이 있다고 굳게 믿는 습성 때문에 / 마음 밑바닥에 공포를 기르게 된 생물('여전히 반대말놀이', 98) 행복과 불행, 남자와 여자, 길다와 짧다, 양지와 음지, 빛과 어둠 모두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 이외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김남주가 '독재와 민중, 외세와 민족, 자본과 노동'이라는 대립물에만 관심을 갖던 것에 비해 혁명의 대상은 훨씬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선우는 김남주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혁명은 무엇인가?

그에게 혁명이란 모든 존재,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그의 사랑은 비단 사람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종족의 피가 네 종류뿐이란 게 부끄러워요” “저 새의 혈액형을 알아다 주세요, 돌고래.... 펭귄, 푸른 자벌레.... 기린과 오로라의 혈액형, 나를 홀리는 모든 존재들의 피가 궁금해” “팔만사천가지 혈액형이 반딧불처럼 발광하는 13월을 불러줘요 내 피를 마저 줄게요”('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 한편 그의 혁명에의 열정은 죽음을 각오하는 데까지 나아가서 혁명을 위해 죽고 싶다는 말까지 한다. “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불명예다 / 내 시는 명예의 쪽인가 불명예의 쪽인가” ('아직', 108) 그가 그렇수 있는 것은 혁명이 단지 붉은 깃발과 머리띠와 구호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혁명이란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이므로 그 사랑(=혁명)은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선택적인 사랑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랑하는 생명에 반하는 것들, 다시 말해 앞에서 언급한 그가 싫어하는 것들을 제외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이제 세상에 이해 못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그 모두를 사랑할 자신은 없어서 편협한 사랑이 용서되는 시인으로 남기로 한다”('마흔', 61)고 고백해서 종교인과는 차별화된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한다.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이 혁명이라는 그의 지론은 생태주의와도 연결된다.

아직까진 무상보급되는 햇빛을.......” ('햇빛 오일', 63)이라는 표현을 보라.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햇빛도 그녀에게는 언젠가는 고갈될 수 있는 한정된 에너지일 뿐이다. 그는 콩나물 한 봉지 속에서도 우주를 발견한다. “받아, 이거 아삭아삭한 폭풍 한 봉지!”('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85) 심지어 달방 있음에서는 지구를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도 엿보인다. “이봐 당신들! 내가 당신들한테 신세지는 게 아니라, 당신들이 나한테 붙어사는 거거든?”(26)을 보라! 그의 표현대로라면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체의 피부에 붙어 사는 기생충일지도 모른다. 그의 생태주의는 불교의 연기설과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거지에게 적선을 하더라도 자신과 거지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이 돈은 그에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과거의 나에게 어쩌면 미래의 당신에게/얼마 안되는 이 돈을 잘 전해주시길심지어는 오골계를 먹다가뼈가 검은 닭의 전생에 대해 생각하다가”, 닭의 몸통 속에서 아직 낳지 않은 작은 알 다섯 개를 보며 검은 뼈로 이루어진 골목을 순례하는 바람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먹지만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와 삶을 빌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너를 빌려가고 싶어. 가지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먹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빌리는 것이라는 깨달음만 있다면... ..('다만, 오골계 백숙 먹기') 이러한 그에게 병에 걸렸다고 살처분 당하는 닭이나 돼지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그는 닭과 돼지를 위한 진혼곡을 부르기도 한다. “머언먼 하늘에 서리를 풀 듯 너희를 풀어놓을 테다 따듯한 햇살 닿아 얼음이 녹으면 너희는 새로운 날개를 얻어라 존중받는 발굽과 쫑긋한 청력을 얻어라”('얼음놀이') 그의 생태주의는 계급에 대한 혐오감과도 맞닿아 있다. ‘구석, 구석기 홀릭을 보면 큰 달님을 그려야지 아직 계급이 나뉘지 않았을 때 사냥한 물소를 골고루 나누던, 흰 물소의 영혼이 우리를 용서하던 때라 노래한다. 이 구절을 계급 분화 이전의 원시 공동체사회에 대한 회귀본능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김선우를 반만 이해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계급은 인간들 사이의 계급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구별짓기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육식을 하고, 육식을 하는 인간도 그들의 삶이 자신이 먹고 있는 고기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삶, 그러한 삶을 흰 물소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에게 혁명은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 다른 말로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고 일치되는 것을 뜻한다. ''라는 존재도 수많은 타인들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문을 보는데 가 나를 꼬나본다 / 백여명 천여명 / 삼만여 십만여 육백만여 오천만여 모든 집계에는 언제나 가 있다 "(‘에게')는 것이다. 그래서 “‘에 속한 것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시간은 어디쯤에 이르러 최후의 가 될까" (‘에게)며 타인의 삶에 신경쓰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그는 체게바라를 존경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던 것만큼 또다른 나인 타인을 사랑했던, 그래서 혁명을 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체 게바라에 바치는 헌시인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나도 사랑하려는 / 나는 나들이다 / 당신이 그런 것처럼이라 말하며 가 되고 결국 나들이 되는 상태를 혁명의 최고의 단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에게 나와 타인은 다른 존재가 아닌 하나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제주도로 밀양으로 떠나는가보다.

 

 

한편, 그가 말하는 혁명은 일종의 '영구 혁명'이다.

그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이며 삶과 죽음은 영원한 유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시체놀이'에서 딱정벌레가 죽은척하다가 지나가는 모습을 따라해 본다. 그러고 나니 언젠가 내가 죽는 날, 실은 내가 죽는 척하게 되는 거란걸!”(시체놀이, 17) 깨달았다. 어차피 삶도 죽음도 영원한 유랑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유랑이 끝나고 또다른 유랑이 시작되.”('그림자의 키를 재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시인 마무드 다르위시에게 바치는 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포기나 절망을 모른다. 왜냐하면 나 혹은 다른 누군가 혁명을 하다가 죽더라도 죽음 이후에도 혁명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모든 존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에 그 혁명은 중단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민중 혹은 인간의 삶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느껴진다. 그에 의하면 짓밟힌 민중들은 죽은 것 같지만 다시 유랑, 혹은 혁명을 계속 할 것이다. ‘이 눕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지금까지 김선우의 혁명론을 중심으로 그의 시집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무한한 혁명을 꿈꾼다. 무한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존재들, 그리고 영원한 시간이라는 중의적인 뜻으로 읽힌다. 혁명은 계급투쟁으로서의 혁명을 포함하는 모든 존재하는 삶 속에서의 억압을 거부하는 혁명을 포괄한다. 그는 시인이기에 모든 존재들과의 교감하고, 그러한 공감 자체가 혁명의 출발점이다. 영원히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하다.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하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낙관한다. 잠시 쉬었다 가는 딱정벌레도 혁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아름답고 앙증맞은 표현들과 간혹 보이는 관능적인 시어들은 무한한 덤이다.

 

 

 

출처 : BookC의 冊戀愛談 (http://blog.naver.com/gru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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