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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균과 사람 - 세균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
고관수 지음 / 사람의무늬 / 2023년 3월
평점 :
1962년에 출간되어 저자 아베 코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모래의 여자>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은 잿빛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모래땅으로 희귀 곤충채집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원치 않게 모랫구멍에서 평생 모래를 퍼내야 하는 운명에 빠진다. 처음에는 온갖 방법을 사용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자신과 함께 모래를 퍼내야 하는 여인과의 동거와 적응을 통해서 탈출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모랫구멍에 감금되는 것을 선택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생명체가 발붙일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래 위에서 생존할 수 있는 곤충이라면 그에 걸맞은 강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강한 적응력은 곧 많은 변종이 있음을 뜻한다는 것을 주인공은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곤충을 찾아 곤충 도감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모래땅으로 스스로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주인공은 곤충 도감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영광은커녕 죽을 때까지 모래를 위로 퍼 올려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휴가를 모래땅에서 기꺼이 허비할 만큼 과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은 이토록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고관수 선생이 쓴 첫 책 <세균과 사람>은 동물에게만 한정되었던 ‘학명 짓기’ 사냥이 세균에게도 적용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신종 세균을 발견하고 언젠가는 자신이 발견한 세균의 중요성을 밝혀지기를 기대한 학자 즉 세균학 영웅 들의 노력과 성과 그리고 숨은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세균과 사람>'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지하철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운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를 위한 어렵기만 한 책은 아닌 것이 저자가 친절하게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봄 직한 ‘유명한’ 세균을 주로 다뤘고 새로운 세균을 둘러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서 교양과 책을 읽는 즐거움을 고루 갖춘 책이다.
‘자신이 이름 붙인 세균에 감염되어 죽다’, ‘ 순한 양으로 생각했는데 호랑이였다’, ‘ 경성 제국 대학 총장이 발견한 세균’, ‘ 시골의사에서 세균학의 황금시대를 연 영웅으로’, ‘파트퇴르의 이름을 가질 뻔했던 세균’ 등 이 책의 소제목만 훑어보기만 해도 의과대학에서 강의하는 학자라기보다는 세균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의 면모가 더 도드라진다. 아울러 ‘읽고 쓰다’라는 동사의 주어로 삼아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저자 고관수 선생은 내가 알기로 웬만한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긴다. 따라서 세균학에 대한 강의보다는 세균학을 독자와 함께 읽어나간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세균학이라기보다는 세균 열전(列傳)이라고 해도 무방한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세균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지만, 특히 내 이목을 끝 것은 ‘장질부사’였다. 나이 지긋한 사람은 장질부사라고 불렀던 이 말은 장티푸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상록수의 저자 심훈, 고종의 후궁 엄귀비, 동양화가 김기창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걸리면 약도 없다고 해서 ‘염병’이라고 불렀던 그 병이다. 장티푸스와 관련한 세균학자들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전염병과 관련해서 역사상 가장 큰 비난을 받은 사람 중의 한명인 ‘장티푸스 메리’라는 인물 이야기가 놀랍다.
10대의 나이로 미국 부잣집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그녀는 건강한 겉보기와는 달리 장 속에서는 장티푸스균이 살고 있었다. 장 속의 장티푸스는 소변이나 대변을 거쳐 그녀의 손으로 이동했고 다시 그녀가 만든 요리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결국 당시 전염병 퇴치사로 불렸던 뉴욕시 보건 당국에 의해서 추적되었고 강제로 입원당했다. 3년간의 강제 입원을 마치고 요리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사회로 나왔다. 그러나 결국 생활고를 못 이기고 몰래 요리사로 취업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일하는 직장에서 장티푸스 환자가 나왔고 다시 체포된 그녀는 1938년에 다시 병원에 수감되어 죽을 때까지 23년간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다.
메리 맬런이라는 본명 대신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인’으로 지목당하고 ‘장티푸스 메리’라는 오명으로 기억되는 그녀는 사실 유일한 보균자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장티푸스 창궐이라는 비상사태에 대한 책임을 질 ‘본보기’였던 것이다. 특히 이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 신분은 그녀에게 ‘악녀’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기 편리한 존재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현대판 마녀사냥인 셈이다.
세균 이야기을 하는데 페스트가 빠질 수 없다. 많은 사람 들이 페스트가 쥐를 통해서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정확히는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서 전달되는 질병이다. 어쨌든 페스트균 발견이라는 전쟁에 참전한 일본인 기타자토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기타자토에 대한 일본인의 평가는 그가 2024년 새로이 발행되는 1,000엔짜리 지폐의 인물 주인공이라는 사실만으로 가늠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점은 우리나라는 1397년에 태어난 세종대왕부터 1545년에 태어난 충무공 이순신까지 겨우 150년 사이에 조선의 유교 질서 속에서 살아간 인물 들만 화폐의 인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분들도 훌륭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지폐에 실릴만한 위대한 과학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거듭 말하게 되지만 <세균과 사람>은 굳이 세균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세균을 통해서 본 인간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교양서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다. 저자는 많은 책을 읽는 만큼 많은 다양한 독자의 기호에 맞는 요소를 이 책의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