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희귀본을 수집하는 재미로 살았던 때의 이야기다. 거의 3년을 찾아 헤매던 희귀본을 손에 넣었다. 감격에 겨워서 내게 그 책을 양도한 판매자 A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신영복 선생의 《엽서》 이야기가 나왔다. 《엽서》는 희귀본 수집 업계에서 수집가로서의 신분증과 같은 책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수집가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책이란 뜻이겠다. 


그런데 A는 《엽서》가 반드시 재출간이 될 것이며 자신은 그때 구매할 것이고 절대로 비싼 값에 절판된 구판을 사지 않겠단다. 덧붙여서 책이란 게 ‘텍스트’만 확보해서 읽으면 되지 비싼 값에 절판된 판형을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다(당시만 해도 E-BOOK이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나도 격하게 동의를 했고, 재출간이 되면 사서 읽으면 되지 비싼 값에 구판을 사지 않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독서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런 저급한 수집놀이도 하지 않을 것이며, 희귀본이라고 해서 얼토당토않은 비싼 가격에 사지도 않고 오직 책만 열심히 읽겠다는 서로의 신념을 치하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며칠 뒤에 개인 간 헌책 거래 사이트에 신영복 선생의 《엽서》가 판매 리스트에 올라왔다. 가격은 대략 7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친 듯이 예약 댓글을 남기느라 손가락이 얽히고설켰는데 결국 1순위가 되진 못했다. 물론 그 책을 사겠다고 야밤에 남긴 예약 댓글의 행렬 속에서 A의 이름과 연락처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좀 더 절박했는지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같은 서울이니 당장 달려가겠다고 써놓았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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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부친인 김 아무개 씨는 소작농의 자식으로서 온갖 고생은 다 겪었다. 김 아무개 씨의 부친은 마을에서 처음으로 단발령을 받아들여서 상투 대신 성인 남자의 보편적인 헤어스타일인 하이칼라를 선보일 정도로 신문명에 관심이 많았지만 타고난 가난은 어쩌지 못하고 김 아무개 씨에게 가난을 대물림했다.


김 아무개 씨는 정규 교육은 거의 못 받고 온갖 농사일에 시달렸는데 소년 시절부터 마을의 대소사에 부친 대신 동원되었다. 마을의 온갖 대소 사중에서 그가 가장 힘겨워한 일은 상여 매기였다. 어른들과 키가 맞지 않아서 어떨 땐 상여를 지탱하는 끈이 어깨의 허공으로 다녔지만 또 어떨 땐 상여의 무게가 그의 가녀린 어깨로 집중되어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신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상여를 끈으로 매고 온갖 험난한 길을 온몸으로 버텨야 하는 상여꾼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여 소리꾼은 맨몸에 설렁설렁 걷기만 할 뿐 그 어떠한 힘을 쓰지 않았다. 상여 소리라는 것이 두고두고 쓰지, 변하거나 망자에 따라서 다르게 할 필요가 없으니 한 번만 익혀서 소리꾼이 된다면 평생 편하게 상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흥이 나면 상여에 올라타고 가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 뿐더러, 어느 순간 상여를 멈추게 하고 상주들로부터 절도 받고, 망자의 노잣돈이라는 핑계로 돈을 뜯어내는 것 역시 소리꾼의 몫이었다. 김 아무개 씨는 소리꾼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상여소리를 배우려고 했지만 그 동네의 소리꾼은 그가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르쳐달라는 소리는 가르쳐주지 않고 버럭 화만 내면서 김 아무개 씨를 쫓아낼 뿐이었다.


김 아무개 씨는 잠시 낙심을 했지만 다른 동네에도 소리꾼이 있겠다 싶어서 무작정 길을 나섰다. 인근의 여러 마을을 헤맨 끝에 그는 마침내 소리를 가르쳐주겠다는 스승을 만났다. 그렇지 않아도 궁색한 살림에서 훔친 콩 두어 되로 수업료를 지불했다.


본래 목청이 좋고 상여소리에 대한 동기 부여가 남달랐던 김 아무개 씨는 상여꾼들과 상주들을 애달프게 할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의 상여 소리를 갖추었다.

김 아무개 씨가 특별히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수십 년간 상여 소리꾼 노릇을 한 할배가 바람을 맞아서 유명을 달리했고 김 아무개 씨는 냉큼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인근에서 최연소 상여소리꾼에 취임한 그는 그로부터 근 50년간 무수한 망자를 구성진 목소리로 달래 저승길로 데려다주었다. 


그 무수한 망자 중에는 나의 조부모와 아버지도 포함되었다. 그의 상여 소리는 마치 망자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넋두리 같았다. 그는 나의 할아버지가 되었고 할머니도 되었으며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려주었다.

김 아무개 씨는 무수한 망자를 음택으로 모셨지만 정작 마을에서는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그가 마침내 유명을 달리했을 때 그의 상여를 든 이들은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가 힘겨워 보이는 열댓 명의 노인뿐이었다.


문상을 온 김 아무개 씨의 아들의 친구들이 대신 상여꾼이 되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장지가 김 아무개 씨의 집에서 멀지 않은 나지막한 산 아래였는데 불행하게도 김 아무개 씨가 반백년 동안 상여소리꾼 노릇을 할 때 그의 자리를 탐내는 젊은이가 전혀 없었고 김 아무개 씨의 아들은 갑작스러운 부친의 죽음에 타동네서 소리꾼을 초빙할 여유도, 의도도 없었다. 


김 아무개 씨가 망자들을 모시고 다닌 마을 골목골목을 거쳐서 마침내 장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승길을 위로한 것은 상여 귀퉁이에 매달린 일제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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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들의 습관은 참으로 놀랍다. 1년 중 대부분을 오후 5시 30분에 퇴근하다가 최근 얼마간 한 시간 이른 시간에 퇴근을 하는데 많지도 않은 잉여 시간이 낯설고 어색하다. 단지 한 시간의 여유를 주체를 못하다가 결국 미용실을 들리기로 했다. 물론 나는 깔끔함과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도시남자답게 아무 미용실이나 다니지 않는다. 소정의 엄격한 선정 기준에 의거해서 미용실을 선택한다. 내가 미용실을 선택하는 기준은 ‘어떤 경우에도 기다릴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 상가에는 총 세 곳의 미용실이 있는데 나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곳은 2곳에 불과하다. 탈락된 한 곳은 다른 미용실보다 우리 집에서 대략 5미터와 10미터 정도 더 가깝다는 이유로 최우선 협상대상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1분 1초를 계획하고, 시간을 정복한 남자인 나를 무려 15분이나 둥그런 파마 모자를 쓴 아줌마들 틈바구니 속에서 방치한 그날로 여지없이 퇴출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나머지 두 곳의 미용실을 번갈아 가면서 이용했다. 예산을 균등하게 집행함으로서 지역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상가 2층에 자리 잡은 미용실이 나의 거래처에서 제외되는 비운을 맞았는데 백수로 보이는 남편이 러닝셔츠 바람에다 담배를 문 채로 나의 머리를 감겨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우리 집에서 가장 멀어서 무려 25m나떨어진 미용실을 항상 이용했다. 그런데 지난 대선 당일 저녁 평소처럼 미용실 문을 열고 일순간의 지체도 없이 거울 앞의 의자에 앉았는데 그 아주머니 미용사는 오랜 고객을 영접할 생각도 않고 친구로 보이는 다른 아줌마와 설전을 벌인다.


친구 아주머니가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아무개 후보를 찍었다고 하니까 ‘그럼 전라도에 가서 살아라. 라고 호통을 친다.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그렇게 단순하고 불합리한 이유를 대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혹여 헤어컷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면 ‘그럼 전라도에 있는 미용실에 가보든가’라고 혼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그곳도 발길을 끊었고 결국 애초에 나를 15분간이나 소파에 방치했던 미용실을 다시 찾아야 했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예쁜 미용실 아주머니와 보조비용사는 무려 2년이나 외도를 한 나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오늘도 그 미용실을 갔는데 원장아주머니는 포도를 한 송이 거의 다 먹어가는 찰나였고, 보조 미용사 아가씨는 청소를 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텔레비전의 막장드라마에 마음이 뺏긴 상태였다. 의외로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그 분들은 굉장히 심심해했다는 게 확실하다. 어린 시절 나를 서로 가지고 놀겠다고 다투던 누나들의 눈초리로 두 미용사가 나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세 군데의 미용실 중에서 유일하게 보조 미용사를 보유한 장점을 살려 본격적으로 커트를 하기 전 세팅 작업에만 5분이 소요되었다. 원장 아주머니도 심상치 않았다. 어른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헤어스타일이 바뀐 적이 없는 나를 두고 어떤 스타일로 자를 것인지, 구레나룻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뒤통수 머리는 얼마만큼 길게 자를 것인지에 관한 매우 세부적인 오더를 내려주기를 요구했다. 물론 나는 명쾌하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적당히 잘라주세요.” 


나의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적중해서 원장 아주머니는 일생일대의 대작품을 만들어 내기로 작정한 분 같았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자기 통제하에 두셨고 가위질은 0.0001미리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기세다. 아마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만들 때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원장 아주머니가 얼마나 나의 헤어스타일에 집중을 했는지는 뜬금없는 동네 아줌마가 방문한 순간에 알 수 있었는데 인사를 건네는 순간 원장 아주머니는 화들짝 놀라면서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오느냐고 화를 내신다. 아니, 화장실 문도 아니고 정문은 묵직한 유리문이고 뒷문은 레이스가 달려 있는 개방된 상태인데 뭘 어떻게 노크를 하라는 말인가? 그리고 언제부터 미용실을 들어갈 때 노크를 하라는 소셜 에티켓이 형성되었단 말인가?


그 동네 아주머니는 아티스트의 미칠 듯한 예술혼을 불사르는 순간에 몰입을 방해한 괘씸죄에 해당된 것이다. 나는 원장아주머니의 미칠 듯한 몰입을 꾸벅꾸벅 졸음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방해하는 누를 끼치기 싫어서 단한 번도 눈을 감지도, 고개를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보조미용사 아가씨도 우리의 투혼에 동조해 원장 아주머니가 잘라낸 나의 머리카락이 단 일초도 내 이마와 목에 머무르지 않도록 스펀지를 열심히 이리저리 놀렸다.


마침내 우리의 예술 작품이 탄생했고 온몸의 기를 모두 소진한 원장 아주머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조 아가씨는 완성된 예술작품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하여 나를 의자에 앉힌 채로 거품을 머리에 마구 풀더니 두피 마사지를 시작했다. 순간 나는 이렇게 럭셔리한 서비스는 주머니에 든 만 원짜리 한 장으로 해결이 안 될 것 같은 걱정에 사로잡혔다.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아내에게 한도가 넉넉한 신용카드나 집안의 비상금을 모조리 긁어오도록 지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서 무려 5분여간의 머리 감김이 진행되었고 머리 건조도 어디 시골동네의 허접한 미용실처럼 드라이기로 대충 볏짚 말리듯이 허투로 하지 않았다. 원장아주머니의 작품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드라이기를 예술적으로 다루었다. 머리가 건조되었다고 예술작품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은 허접한 동네 미용실이 아니다. 보조미용사 아가씨는 기계의 솜씨는 믿지 못하겠다며 맨손으로 나의 헤어스타일을 빚기 시작했다. 마치 도공이 도자기를 정성껏 매만지듯이 보조아가씨는 한 올 한 올의 방향과 휘어짐의 정도를 결정하였고 기존의 촌스러운 가르마가 아닌 앞으로 쭉쭉 내려 뻗는 청담동 스타일을 완성시키고야 말았다. 공장에서 기계로 대충 찍어낸 스타일이 아니고 무려 ‘수제’ 헤어스타일이다. 


다행이 우리 집에서 돈뭉치를 들고 올 필요가 없었다. 원장아주머니는 내 머리에 담긴 예술혼은 돈으로 따질 수 없다며 평소대로 단돈 만 원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차도남 스타일의 세련된 예술작품을 갖춘 나는 10미터를 활보하고 집에 도착했다. 

아내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시청 중이었는데 나를 힐끔 보더니 “집에 다 와 간다면서 어딜 다녀오기에 이렇게 늦었어”라고 한마디 한 다음 이내 돌아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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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그들(아내&딸)에게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지배를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도 승리의 순간이 엄연히 존재한다.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 대첩이 바로 그 경우다. 지난 일요일 나는 어머니에게 드릴 떡을 사기 위해서 재래시장에 들렀는데 그들에게 조공을 할 먹거리를 찾다가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발견했다. 


중국산은 노랗게 먹음직스럽게 생겼는데 국산 옥수수는 꺼무칙칙하게 보기엔 그래도 역시 농산품은 신토불이 아니던가? 더구나 조공용이니 그 음식의 원산지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어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갔다. 의기양양하게 까만 비닐봉지에 든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마누라 상전에 바쳤으나 그딴 걸 뭐하러 사오냐는 예상치 못한 혹평을 받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거실에 패대기치려고 했으나 상전 앞에서 감히 그런 불손한 행동은 못 하고 내 서재로 들어와 소파에 살포시 패대기를 쳤다. 저들에게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절대로 주지 않고 나 혼자 다 먹기로 결심을 했다.


무려 5,000원 어치고 나와 안면이 있는 주인아주머니께서 가래떡 뻥튀기와 쌀 뻥튀기까지 덤으로 주셔서 혼자서 다 먹기엔 너무 벅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매일 매일 먹기로 하고 봉지를 열었는데 뻥튀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꾸역꾸역 먹는데 목이 따가울 지경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음료수라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몽’ 주스뿐이다. 내가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주스인데 너무 급하다보니 어쩔 수 없다. 쓰디쓴 자몽 주스를 벌컥 벌컥 마시고 다시 서재로 복귀했다. 저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다음 날부터 야구 중계를 보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먹었다. 서재의 형광등도 꺼두어서 마치 영화관에 온 것 같은 운치가 느껴진다. 역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사길 잘했다. 그러나 또 목이 따가워져 온다. 나가서 또 자몽 주스를 먹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맛없는 걸 사왔냐고 조금 짜증을 낸 것 같은 기억이 나는데 이제 자몽주스가 입맛에 맞기 시작했다.


저들도 분명 뻥튀기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자신들이 한 소리가 있어서 참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 새삼 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경우 냉우동 한 그릇에 자존심과 나의 이데올로기쯤은 쉽게 버리는 위인이 아닌가? 저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와 명분을 위해서라면 먹거리쯤은 안중에도 없구나!


6일째 되는 날 여느 때처럼 야구를 보면서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먹는데 아내가 덜컥 문을 열었다. 뻥튀기를 마치 떡을 먹는 것처럼 그렇게 우적우적 먹느냐고 타박을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여자도 강렬한 뻥튀기 향을 맡았을 때이고 적어도 인간인 이상 ‘입질’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저녁을 먹은 후 두 시간이 지났다. 간식거리에 대한 욕구가 극대화되는 시점이다. 서재를 나가는 아내의 뒤통수에 대고 ‘지금이라도 먹고 싶으면 말해라’라고 말하는 호기를 부렸음은 물론이다.


과연 정확히 18분 후 아내가 “뻥튀기 이리 좀 가져와봐”라며 백기를 들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실로 얼마만의 승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승자라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먹고 싶으면 여기 와서 가져가”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패자에게 해서는 안 된다. 


거실에 있는 아내에게 조용히 ‘국산 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가져다주었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이 소비한 뻥튀기의 양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의 승리를 재확인했다.

이번 승리에 오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다음날 학원을 다녀온 딸내미가 뻥튀기를 찾았는데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조롱’을 조금 하다가 ‘빡친’ 딸내미를 달래주기위해서 ‘국산옥수수로 만든 강냉이 뻥튀기’를 제발 먹어달라고 애원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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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5-06-1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너무 재밌어요😆

박균호 2015-06-18 18:01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해요.
 

저녁나절에 나, 아내 , 딸아이가 모여서 순대와 김밥을 먹는데 여동생이 새 아파트를 하나 청약해놨다는 소식을 아내가 전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뛰어난 살림꾼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여동생에 대한 흐뭇함보다는, 조만간 나에게 튈 것이 분명한 불똥이 걱정된다. 학생들에게 꿀밤을 먹이면 정작 무서워하고 가슴 졸이는 것은 내가 준비 동작을 취할 때지 타격의 순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분명 나에 대한 원망의 프롤로그임이 분명한 주변 사람의 성공담은 나에게 꿀밤을 맞기 직전의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아내와 딸아이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다가올 후폭풍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순대가 아닌 김밥을 두 번이나 소금에 찍어 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처럼 5년 후나 10년 후를 내다보지 않으며 금융 상품이나 재테크에 무지한 집도 없다고 한다. 김밥을 먹어서 오물거리는 아내의 입은 ‘우리’라고 말했지만, 그 눈동자는 분명 ‘당신 또는 너’를 말하고 있음을 눈치 없는 나도 알아챘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집이고, 이사를 하면 이사 비용과 세금 등의 비용은 어쩔 거냐는 나의 주장은 이미 자주 써먹은 터라 다른 기발한 변명을 생각하려는데 숨 쉴 틈도 없이 아내는 다음 현안으로 화제를 돌린다.


딸아이가 영어 학원에 그만 다니고 싶어 한단다. 이 현안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 전문가(영어 교사)이니 자신 있게 결론을 내려주었다. “계속 다녀라.”


마지막 안건은, 정 이사를 가기 싫으면(‘이사 갈 능력이 안 된다면’이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고맙다) 리모델링이라도 해야 하는데 직장 동료가 편백나무를 사용해서 벽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단다. 이 대목에서 바람직한 가장이라면 편백나무로 리모델링했을 때 장점과 단점을 열거한 후에 장점이 더 많으니 그게 좋겠다고 말함으로써 남편의 해박한 집안 살림 지식을 자랑하고, 또 아내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상한 남편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거 편백나무가 뭐 어떤 긴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무식할 수 있느냐는 비난을 듣고 평소처럼 나의 은신처인 서재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내의 무서운 공격에 숨 쉴 틈이 필요했다. 단 30초라도.

영혼까지 털린 몸뚱이를 서재의 소파에 내던진 다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퇴근 직전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것은 새로 나온 이문열의 14만 원짜리 《변경》 전집을 지를까 말까였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제가 쓴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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