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요리 - 세상 모든 음식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요리의 비결
해럴드 맥기 지음, 이희건 옮김 / 이데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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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욕심이 많다. 탐나는 책이 있으면 일단 지르고 본다. 자연스럽게 종종 내 독해력으로 감당이 안 되거나 내 인내심으로는 완독할 수 없는 책이 배송 되어 온다. 그런 책들이 도착하자마자 그 책을 보유한다는 자부심만 챙기고 서재의 로열석에 모신다. 돈을 썼으니(어려운 책은 대개 비싸다) 내가 그 책을 읽은 것처럼 자랑해야 할 것 아닌가?

양심은 있어서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정신승리 거리를 남기는 편이다. 가령 <우아하고 낭만적인 일본 야구>를 읽다가 금방 포기하지만, 일본야구팬에게 권할 만한 책은 아니다는 정도의 손바닥 지식은 챙긴다.‘세상 모든 음식에 대한 과학적 지식과 요리의 비결’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1,260쪽짜리 <음식과 요리>가 내 책상 위에 올려졌을 때 ‘정신승리 거리’를 찾는 것조차 만만찮겠다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책장을 넘기는 것도 운동인데, <음식과 요리>를 들고 다니며 읽는 것은 100kg짜리 역기를 드는 것과 진배없어서 책상에 모신 채 힘겹게 구경했다. 어서 이 괴물을 내 책장의 한가운데에 모셔두고 나의 서재 방문객들의 찬사를 받고 싶다.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고시공부를 하는 자태로 ‘나, 이 책을 읽었소’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 나섰다. 정가가 무려 8만8천 원인 명저답게 금방 나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예전에는 누구도 돼지고기와 소고기가 동물과 인간 사이의 친밀하고 공생적인 파트너십의 결과물임을 쉽게 망각할 수 없었다. 또 누구도 돼지와 소가 죽은 덕분에 우리가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낯익은 목초지에서 풀을 뜯는 것을 지켜보았고, 정기적으로 마구간을 들었고, 자신의 일상 식사를 위해 그 동물들이 목숨을 읽게 될 도살장을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 세월이 흘러 이제 고기를 먹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이 씹고 있는 그 살의 주인이 살아 있는 생명체 일 때의 모습을 본 사람은 매우 드물다. 자신들이 그 동물들을 실제로 죽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매우 드물다. 포장의 세계에서 먹는 행위가 죽이는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도덕적 의미를 지닌 것임을 떠올리지 않기란 아주 쉽다. (....) 고기란 이제 마켓에서 산구입한 깨끗이 포장된 꾸러미일 뿐이다. 자연은 그것과 별 관계가 없다.” -월리엄 크로넌 <음식과 요리> 201쪽 

내가 시골에서 자랄 때 닭과 소는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 어머니는 농사일하다가 끼니때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시면 ‘말 못 하는 짐승이라 배고파도 말도 못 한다’며 소여물을 먼저 챙기고서야 식사를 하셨다. 지금도 우리 집에서 살던 소들의 ‘얼굴’이 생생하다. 우리 집 소들은 우리 집 소처럼 생겼었다. 송아지가 팔려나가면 어미 소는 여물을 내팽개치고 며칠간 목이 터지라 울었다. 소와 함께 살았지만, 실수로라도 소들은 내 발을 밟은 적이 없고 꼬리로 내 뺨을 때린 적이 없다. 

겁이 많고 도망 다니기 바빴던 암탉들은 병아리를 거느리면 그 어떤 맹수보다 무서웠다.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그들은 희생되었다. 송아지는 팔려나갔고 닭은 제사상에 올려졌다. 그들과의 이별은 사람이 늙어 죽는 것과 다름없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닭고기를 맛나게 먹었다. 서기 2000년생인 내 딸아이도 내가 ‘닭고기’라고 불렀던 ‘치킨’을 좋아한다.

닭고기라는 말에는 ‘닭의 희생과 미안한 감정’이 스며있지만 ‘치킨’이란 말에는 닭이라는 생명체는 배제되어 있다. 치킨은 콜라와 과자처럼 ‘공산품’이 되었고 닭이라는 모성애가 강한 생명체와는 별개의 먹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고기란 이제 마켓에서 구입한 깨끗이 포장된 꾸러미일 뿐이다”라는 ‘월리엄 크로넌’의 한탄이 19세기의 것임을 아는가?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무자비한 사육환경’에 고통 받는 소와 돼지 그리고 닭을 연민하여 고기를 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좀 더 인간적인 사육환경을 의무화한다면 ‘치맥’은 어쩌면 상위 1% 귀족들만의 음식이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고기에 환장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고 본능에서 비롯되었다. 

사육환경이 잔인하게 된 것은 인구의 증가로 인한 대량소비에 기인했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쉽게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채링크로스 84번지> 개정판이 나와서 얼른 샀고 다시 읽었다. 무명작가와 헌책방 주인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가 아끼는 책은 책 속의 주인공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같은 책을 두 권 가지고 있는 사치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서 이기도 했다. 뉴욕의 가난한 작가와 궁핍했던 영국의 헌책방 직원의 인연을 이어준 것은 ‘헌책’과 ‘고기’다.

“친애하는 한프 양. 달걀과 혓바닥 고기 통조림 두 상자가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아시면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저희 모두 당신의 매우 자상한 마음씨에 다시 한번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채링크로스 84번지>62쪽

대량소비를 위한 잔혹함과 ‘좀 더 인간적인 사육환경’의 간격은 줄어들 수는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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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9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9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7-05-09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돼지와 닭의 사육 환경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서 이 동물들을 접할 기회가 없던 저로서는 착찹한 충격이었죠. 그때까지 돼지는 고기였고, 닭은 백숙이나 삼계탕의 재료였거든요. ‘고기가 포장된 꾸러미‘일 뿐이라는 한탄에, 그럴 수 있겠다 공감합니다.
간혹 있는 회식 자리에서 삼겹살을 환장한 듯 흡입하는, 음, 모순투성이 채식주의자가 거리낌없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 존재들이 한 때는 나와 마찬가지로 숨쉬던 생명이었음을 종종 생각합니다. 인간, 참 잔인하고 욕심많은 존재다 하며.

박균호 2017-05-09 19:29   좋아요 1 | URL
네 그렇죠 인간의 이중성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