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무려 2003년 무렵에 산 책을 이제야 읽어 본다. 좋은 책은 사 두면 언젠가는 읽게 된다는 독서계의 격언은 진리다. 2003년이라면 아직 내가 30대 중반 청춘의 피가 사그라지지 않았던 시절. 그때의 추억을 이 책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독문학에 점점 경도되어 가고 있어서 이 책은 꼭 읽어야 하겠다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는데 독문학이야말로 서양 문학의 원탑이라는 내 생각을 더 공고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아직 덜 읽었긴 한데 뭔가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한마디로 유랑 극단을 둘러싼 이야기다. 그런데 유랑 극단, 한 인간의 성장 과정, 연극을 다루면서 인간 세상의 모든 고민과 지혜를 박아 넣은 명작이다. 서울대 독문과 안삼환 선생님이 혹독하게 철저하게 번역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소설이 낯선 분들이 많겠지만 예전에 유행했던 말이 있잖는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 뭐 대충 이런 말. 이 말의 원전이 바로 이 소설이다.

Wer nie sein Brot mit Tränen aß,
Wer nie die kummervollen Nächte
Auf seinem Bette weinend saß,
Der kennt euch nicht, ihr himmlischen Mächte!

눈물로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
근심 가득한 밤들을
침상 위에서 울며 지새워 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들을 알지 못한다, 하늘의 권능들이여!

한마디로 처절한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은 삶과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한다는 뜻이 되겠다.

자신의 꿈을 좇아 연극을 지망하는 빌헬름에게 친구 베르너는 연극만 감동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하지만, 장사와 항해와 돈이 오가는 현실 세계에도 충분히 극적인 장면이 있다고 말한다.

Was ist reizender als der Anblick eines Schiffes, das von einer glücklichen Fahrt wieder anlangt...

행복한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는 배의 광경보다 더 매혹적인 것이 무엇이겠느냐…

배우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도 생각하기에 따라 연극적인 요소가 곳곳에 있다는 말에 뜬금없이 위로를 얻었다. 내가 하는 수업 한 시간, 행사 하나가 잘 계획되고 실행된다면 성공적인 연극 공연을 마친 배우나 다름없다. 내 하루의 한 장면이 좋은 연극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로와 격려를 해 주는 소설이다.

또한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연극을 소재로 하므로 배우나 방송 관계자들도 꼭 읽어 봤으면 좋겠다. 18세기 소설에서 배우의 발성을 강조한다. 빌헬름은 연습 때 사람들에게 가장 먼 구석에 앉아 있으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기 말이 완전히 들리지 않으면, 열쇠로 벤치를 두드려 달라고 했다. 최근 한국 드라마를 보면 해괴한 현상이 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하는 드라마를 보는데 자막이 없으면 불편하다. 배우가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잦다. 배우가 정신, 감정, 표현력을 말하기 전에 먼저 글자 하나하나를 분명하고 익숙하게 해야 한다. 《모자무싸》에 나오는 강말금 배우처럼 귀에 박히게 또박또박 발성하는 배우가 많지 않다.

더욱이 한심한 것은 《21세기 대군 부인》인가 하는 드라마를 보니 장면마다 그 잘생긴 주인공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냥 잘생긴 남자 배우 화보를 찍지 그러냐. 참을 수 없는 저급함이다.

빌헬름은 셰익스피어에 경도되어 《햄릿》을 자주 무대에 올리는데 작품 해석을 두고 극단 주인과 격렬한 논쟁을 한다. 이 과정을 읽다 보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만 한 《햄릿》 비평서가 또 있을까 싶다. 《모자무싸》에 나오는 시류에 적당히 묻어가면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최필름 사장처럼 극단 주인은 《햄릿》을 적당히 각색해서 비용은 줄이고 관객들의 기호에 최대한 맞춰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지만 빌헬름은 원작을 고스란히 무대에 담아내야 한다는 원칙론을 주장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퇴근 후 개인적으로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2년은 된 것 같다. 전국에서 계모임이 가장 흥한다는 경북 상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몇 개 있던 모임도 다 끊었다. 직장에서 업무적인 내용 말고는 대화도 거의 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책을 보든가 글을 쓴다. 자취방에 가서는 저녁 챙겨 먹고 인터넷 좀 뒤적거리고 운동하면 잘 시간이 된다. 주말이 되어도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경조사와 강연을 제외한 단독 외출은 아내가 크게 아픈 뒤로는 전혀 하지 않는다. 주말엔 가족과 여행하고, 맛집 탐방하고, 산책을 한다. 가족이래야 한 달에 두 번 서울에서 내려오는 딸과 아내뿐이지만. 그래도 시간이 나면 책을 읽는다.

도저히 심심할 틈이 없다. 독서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같은 책이 곁에 있으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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