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삶은 도서관 - 책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2025 경기히든작가 선정작
인자 지음 / 싱긋 / 2025년 11월
평점 :
나는 한 사람의 노후는 도서관을 이용하는가 아닌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서관 만큼 세금의 효용성을 체감하게 해주는 공공 시설은 드물다. 아울러 출근할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 도서관 만큼 따뜻한 보금자리도 드물다. 동네 노인정에서 화투를 하거나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정치인 욕하는 것도 즐거운 소일거리이지만 도서관에서 보내는 하루만큼은 아니다. 도서관은 책만 읽는 장소가 아니다. 영화도 볼 수 있고 다양한 분야의 명사의 강연을 공짜로 들을 수도 있다. 더구나 냉난방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여름엔 더 없이 훌륭한 피서지이고 한 겨울 한파가 무섭지 않다. 내가 다니는 도서관은 놀랍게도 비데가 설치되어 있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곳이다.
이런 도서관을 삶의 무대로 삼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웃기고도 짠한 풍경들을 기록한 책이 인자 작가의 에세이 <삶은 도서관>이다. 20년 넘게 광고·홍보 일을 하다가 마흔이 훌쩍 넘어 공공도서관 노동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저자가, 책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첫 에세이이자 ‘2025 경기히든작가’ 산문 부문 선정작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나에게는 도서관 만한 집필실이 없다. 디지털 열람실에서는 개인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고 최소 수만권의 참고 자료가 곁에 있으며 한달에 몇 만원 드는 논문검색 사이트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나는 개인 노트북도 사용할 수 있고 도서관 자체 데스크탑도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열람실을 애용하는데 한 일주일만 다니다보면 서로 얼굴을 다 익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각자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자격증을 준비하는지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알게 된다.
조용한 도서관 생활이 약간 권태스러워질때마다 어김없이 빌런이 등장해서 무료함을 달래준다. 어떤 중년 이용자는 매일 제일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매일 영화를 보면서 마치 부모님 장례식장만큼이나 서럽게 운다. 오랜 동료 의식으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또 어떤 남성은 프린트를 하고서는 분명 자기집에서 한 것과 폰트가 다르게 인쇄되고 글씨가 흐리다며 죄없는 도서관 공익 요원에게 항의한다. 참다못한 한 의인이 “그 그렇게 까다로워서야 어디” 라며 혀를 차며 “그럴거면 당신 집에 가서 프린트 하든가”라며 쏘아붙이기도 한다. 그래도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어느 도서관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이상하게도 전화가 오면 통화하면서 나가고, 남녀가릴 것 없이 그냥 열람실에서 시원하게 코를 풀며, 코고는 사람이 항상 사운드를 채워주며 운이 좀 나쁘면 인자 작가처럼 코딱지 빌런을 만난다. 물론 인자 작가가 만난 초등학생 코딱지 빌런은 그저 자기 세계에 집중하면서 생긴 일이고 점잖게 지적하면 당장 멈춘다. 이 외에도 열람실에서 혼자말 하는 사람, 한숨 푹푹쉬는 사람, 마우스 딸깍 거리는 사람등등 다른 이용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지 않더라도 도서관 책을 빌리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인간의 이상한 행태를 만나곤한다. 어떤 맞춤법에 미친 이용자는 매 쪽마다 출판사 편집자처럼 첨삭 부호를 마구 휘갈겨 놓았다. 나름 좋은일 해놨따고 흡족해 할텐데 더 큰 문제는 첨삭이 딱히 맞지도 않다는 것이다.
가끔 이 모든 빌런과 소요사태에도 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디지털 열람실 담당 공익요원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그는 하루 종일 온갖 이용자를 다 겪었을테니 나보다 훨씬 더 웃기고 화나는 상황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흔하디 흔한 노인정과 동네 공원에서 푸는 썰과는 차원이 다른 학생이 아니면서 도서관이라는 시설을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극소수만의 썰이니 얼마나 재미날까? 나의 이런 궁금증과 호기심을 명쾌하게 해결해 준 고맙고 반가운 책이 인자 작가가 쓴 <삶은 도서관>이다. 광고 홍보인으로 일하다가 47세에 도서관 직원이 된 작가의 유쾌하고 쌉쌀한 도서관 사람들 이야기다. 역시 초반부터 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불 꺼진 열람실에서 알콩달콩 애정 행각을 벌이는 고등학생 연인의 에피소드도 그렇고 똥이 급한 한 외부인과 화장실 시비가 붙어 경위서를 작성한 이야기도 그랬다.
오전 열한 시, 도서관 로비에서 한 외부인이 화장실 사용을 요청했으나...... 그럼 똥을 싸란 말이냐고 항의하여...... 이곳에 똥을 싸시면 안 된다고 응대하자......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서관 직원을 꿈의 직업으로 여기지만 인자 작가의 글을 읽다 보니 세상의 빌런은 도서관에 다 모이는 것 같다. 혼자만 읽겠다고 만화책을 서가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가 마치 다람쥐가 도토리를 꺼내듯이 꺼내보는 소년, 커피는 마시고 싶은데 매번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서가에 몰래 숨겨두는 남자, 물은 역시 스뎅 사발로 마셔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매번 도서관에 가져오는 어르신 등등
그렇다. 도서관에 가면 책을 좋아하는 지성과 품위가 있는 낭만적인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실상은 매우 독특한 행동 특성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그 이유를 고찰해 봤다. 아마도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돈이 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고 소중한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자칫 빌런들의 놀이터가 아닌 따뜻한 인간미 맛집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인자 작가를 비롯한 도서관 노동자들이다.
<삶은 도서관>은 도서관에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우리 곁 이웃을 둘러싼 따뜻한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읽힌다. 다만 책과 도서관이 무대여서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더 흥미롭게 읽힐 뿐이다. 마치 흥신소처럼 책 이름을 정확히 기억 못 하는 이용자를 위해 탐정처럼 정확하게 그 책을 찾아주는 이야기를 읽다가 십수 년 전 내가 등록하게 될 자동차 번호에 4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 있다며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던 시청 직원이 생각난다. 다행히 치명적인 사고 없이 그 차를 11년이나 운행했는데 가끔 민원인의 일을 자기 일로 고민하던 고마운 그 직원이 생각난다. 인자 작가는 아마도 많은 도서관 이용자에게 십여 년간 잊히지 않는 추억과 따뜻한 정을 선물한 사람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글을 잘 썼고 글을 만지는 일을 하다가 뒤늦게 도서관 공무직을 시작한 인자 작가에게 직장 도서관은 책을 쉽게 접하고 읽을 기회가 많은 곳이 아니다. 이용자가 아니라 직원이기 때문이다. 도서관 직원은 책을 읽는 직업이 아니고 책을 다루는 직업이다.
내가 진짜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용자들의 진지한 열정을 볼 때, 읽고 싶었던 신간이 들어왔다며 아이처럼 설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무한하고 벅찬 긍정의 에너지를 얻는다. 유모차를 끌고 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고르는 엄마들을 볼 때, 나는 일종의 위대함을 느낀다.
<삶은 도서관>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책이다. 도서관 이용자들의 흥미로운 에피소드, 도서관 직원의 황당한 고충, 가족 이야기, 글쓰기 이야기 등등이 모두 녹아 있는데 희한하게 책을 덮고 나니 두 가지 생각으로 또렷해졌다. 참 재미난 책이구나! 참 따뜻한 책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