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항생제를 만든 사람들 - 페니실린에서 플루오로퀴놀론까지 항생제 개발의 진짜 역사
고관수 지음 / 계단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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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야 말로 승자 독식의 표상이라고 할 만하다. 승자나 1등만을 기억하고 조력자나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지난 2001년 우리 정부는 제102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아내 고 단양이씨와 그의 아들 홍양순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온 가족이 독립운동가라는 말인데 홍범도 장군의 아내는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아서 단양이씨의 명의로 훈장을 받았다. 단양이씨는 발가락에 심지를 끼워 놓고 불을 달아 놓은 잔인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혀를 끊어냄으로써 순국했다. 역사가의 고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일어난 일을 기껏 해봐야 몇 권 분량으로 압축해야 하니 나폴레옹 혼자서 알프스산맥을 넘어서 유럽을 정복했다는 식의 지도자나 승자 중심의 서술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눈 밝은 독자들은 영웅이나 황제가 아닌 조력자라든가 큰 공을 세웠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을 조명한 기록물에 관심을 기울인다.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고관수 선생이 쓴 <세상을 바꾼 항생제를 만든 사람들>은 승자 독식 역사관에 가려진 숨겨진 영웅을 다루는 귀한 책이다. 항생제라는 밝지도 쉽지도 않은 주제를 다루는 책이니 당연히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꾸역꾸역 읽다 보면 한 줄기 빛과 같은 영감이나 통찰 그리고 재미를 느끼기 마련인데 이 책은 확실히 책장을 넘기는 고통보다 전혀 생각지 못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나 감동까지 맛볼 수 있다.

 

독자의 기호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책의 첫 번째 요건이라면 이 책은 분명 좋은 책이다. 과학지식이 목마른 이과 체질의 독자들에게는 항생제와 관련된 흥미로운 의학사에 대한 지식을 선사하고 문과 체질 독자들에게는 순수문학에서 찾지 못하는 색다른 휴머니즘을 맛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약학이나 의학만큼 더 인간적인 학문이 어디에 있을까.

 

세계 최초로 푸른곰팡이가 세균 감염을 치료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기억하지 않는 이름이 된 에르네스트 뒤셴의 슬픈 인생 역정 이야기는 고관수 선생이 왜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뒤셴은 1901년에 아내를 결핵으로 잃었는데 1912년에는 자신도 아내와 같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1897년에 이미 그는 자신과 아내를 죽음으로 내몬 결핵을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 즉 오늘날 페니실린이라고 불리는 물질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의과대학생에 불과했던 그의 논문을 아무도 주목하지도 않았고 그가 추가적인 연구비를 얻기 위해서 논문을 보낸 파스퇴르 사는 그의 논문을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파스퇴르가 비록 어린 대학생의 논문이지만 유심히 살펴보고 그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 여건 마련을 해주었다면 그 사이에 결핵으로 숨진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뒤셴이 곰팡이의 항균 작용을 연구하게 된 계기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그가 마구간에서 군마의 안장을 관리하는 아랍 출신의 소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푸른곰팡이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년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안장을 관리했는데, 습기가 많고 어두운 곳에 안장을 보관해 안장 아래쪽에 의도적으로 곰팡이가 자라도록 했다. 말이 사람을 많이 태우면 안장에 등이 쓸리고 피부가 까져 고통스러운데, 이 곰팡이가 말의 통증을 완화해주었다는 것이었다. 뒤셴이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푸른곰팡이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페니실린을 발견했다는 공로는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인 플레밍에게만 돌아갈 것이 아니라 뒤셴과 군마의 안장을 관리한 소년들에게까지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어느 한 위대한 과학자의 위대한 발견으로 큰 발전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값어치는 충분하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을 바꾼 항생제를 만든 사람들>에는 항생제와 관련한 많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에리트로마이신이라는 항생제를 개발하는 데 공을 세운 필리핀의 의사 아귈라의 편지가 눈길을 끈다.

 

제 과학적 지식과 희생이 없었다면 일라이릴리가 이 항생제를 제조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제가 항생제에 대한 로열티를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일라이릴리에 5억 달러의 로열티를 요청합니다. 이 로열티는 수천 명의 가난하고 병든 필리핀 동포를 돕는 사업에 사용할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위한 재단을 설립할 것입니다.

 

이 편지는 매년 2월이면 출판사에 원고료를 독촉한 것으로 유명한 법정 스님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출판사 사람들은 무소유를 주장한 법정 스님이 돈을 밝히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했지만 사실 법정 스님은 대학 입학을 앞둔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때 주기 위해서 원고료를 독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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