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작은 일에 연연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평생을 ‘그까짓 거’라는 신조로 대충 살아왔는데 요즘 내가 아니었던 나를 자주 구경한다. 일 년 전만 해도 재활용 봉투가 얼마나 찼는지와는 상관없이 본가로 내려가는 금요일 아침에는 꼭 집 앞에 내놓았다.
내가 서식하는 원룸에 혹여 쓰레기 냄새라도 베일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청소를 여간해서 하지 않는데 냄새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재활용 봉투가 터진 김밥이 되어서야 내놓는다. 요일과 상관없이.
어디 그뿐인가. 나는 치킨을 시켜서 한 번에 먹지 못하는데 전에는 남은 조각을 아낌없이 버렸지만, 요새는 일주일에 걸쳐서 꾸역꾸역 다 먹는다. 어제는 더욱 황당한 일을 겪었다. 모처럼 가성비가 출중한 샤부샤부 집을 발견했고 아내와 점심을 먹으러 갔다. 거의 40분 동안 숨도 쉬지 않고 입이 욕할 만큼 먹어 치웠는데 아뿔사! 음식을 남기지 않으면 다음 방문 때 고기 1인분을 무료로 증정하는 쿠폰을 준다는 안내문을 보고야 말았다.
샤부샤부 육수에는 마침 라면 사리와 기타 먹거리가 수북이 남아 있었다. 고기 1인분이라는 동기 부여가 생겼으므로 배가 터질 것 같은데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아내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설사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어찌해서 다 먹어 치웠는데 제기랄 밑반찬이 남아 있었다. 초인적인 투지를 발휘해서 그것까지 먹어 치웠다. 숨을 간신히 내쉬면서 한숨 돌릴려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또 아뿔사. 지나치게 친절한 직원이 서비스라면서 과일 한 접시를 대령해놨다.
아무리 투지를 발휘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다. 과일 한 접시를 두고 아내와 토론을 벌였다. 과연 서비스로 주는 과일까지 다 먹어 치워야 고기 1인분 쿠폰을 주는지 아닌지에 관한 토론이었다. 우리에겐 생사가 달린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점잖은 사람이 10대 아르바이트생에게 ‘서비스로 주는 과일까지 다 먹어야 쿠폰을 주나요?”라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급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서비스로 준 과일은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아니므로 예외 조항에 속한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지만, 혹시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면 내가 배가 터지도록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은 그간의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애증의 과일을 차마 뱃속까진 넣진 못하고 목구멍의 중간쯤에 쑤셔 넣은 다음 배를 부여잡고 간신히 계산대로 갔다. 직원분에게 조심스럽게 ’우리 다 먹었어요’라고 선언했는데 꼼꼼한 직원은 우리 자리로 가서 매의 눈초리로 우리가 남긴 접시를 꼼꼼히 확인한다. 그 몇 초가 몇 시간은 되는 줄 알았다.
합격 통보를 받고 기뻐할 여유도 없이 배를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번에 올 때는 딸내미와 함께 와서 고기를 맛나게 먹는 상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