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군립도서관에서 고전에 관한 강의를 하는 날이다. 준비는 대충했다. 강의 자료라고 준비 한답시고 한 것이 A4용지 한 장 분량. 게으른 성격 탓이 큰데 이 버릇이 은근히 장점이 있다. 자료를 너무 철저하게 준비를 하면 그 자료에 매몰되어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대충 준비하면 어차피 자료가 대충이니 상황에 맞게 대처를 잘 하게 되더라. 애드리브도 가능하고.


강의 업무 담당자 선생은 통화를 하면서 ‘군립’도서관임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비슷한 이름의 도서관이 있으니 헛갈리지 말라는 배려다. 비대면 온라인 강의인 줄 알고 갔는데 강사를 배려해서 소수의 몇 명의 청중이 참석하게 조치했단다. 리액션이 있으면 아무래도 강의하기 편리하니까 천군마마를 얻은 듯 했다. 수려한 외관에다 편리하고 독특한 내부 구조가 아름다운 도서관인데 행정력이 뛰어난 도서관임을 알겠다.


행정력이 뛰어난 기관은 거창한 기획으로 표시가 나는 않는다. 사소한 사항을 자세히 친절히 안내하는 것이 우수한 행정 능력의 표상이다. 증평도서관은 그런 기관이다. 관료사회가 추구해야할 이상형의 정점이랄까. 문제는 나다. 고전을 이제 겨우 읽는 처지에 강의라니 암담하다. 자신이 없는 주제임에도 선뜻 강의를 맡겠다고 수락한 것은 하도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 않으려는 학생들과 씨름하다보니 ‘제 발로’내 강의를 늦겠다고 나서는 분들의 얼굴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강의 시간이 1시간 30분인데 어떻게 메꿀지가 관건이다. 고전에 대해서 내가 뭘 안다고 강의를 한 단 말인가. 잘 할 욕심도 의욕도 없었다. 그저 시간만 때우고 가자는 심산이었다. 문제는 그것마저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품을 하게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니 동정심이 샘솟았다. 뭐랄까. 30분 뒤에는 횟감으로 도마에 오를 물고기가 천연하게 수족관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내 이력을 소개하고 책과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최대한 보내자는 전략을 세웠다. 담당 선생님은 서두가 너무 긴 것을 우려하는 듯 했다. 울려는 표정을 짓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나도 내가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사람이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면 원래 이렇다. 나부터 살겠다는 심정으로 뚝심 있게 잡답을 계속했다. 나의 목표는 ‘이제 더 할 말이 없는데 어떻하죠?’라고 자백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잡답을 이어가다가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게 되자 할 수 없이 고전이야기를 시작했다.


빅토로 위고의 <레미제라블>, <파리의 노트르담>, 도스토옙스키의 <악령>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고전이 이토록 재미나다는 것을 강의하러 갔다가 고전 강의가 이토록 재미난 것이었다는 것을 체감한 날이 되었다. 지금 발화되고 있는 이 말들이 과연 내 입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급 진 정보와 지식이 나오더라. 내가 이토록 박식한 사람이었나 깜짝 놀랐다. 나는 그냥 책에서 읽은 재미난 부분을 이야기 했을 뿐인데 내가 인문학자라도 된 것처럼 내 스스로가 멋짐이 폭발하더라. 물론 내 혼자만의 생각이다.


고전의 힘은 대단하다.  지금까지 내가 한 강의는 가볍고 또 가벼운 잡담 수준이었다면 오늘 내 강의는 강의라고 해 줄 만 했다. 청중은 모르겠고 나 혼자 도취되어서 시간을 아끼게 되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시계를 보아도 내가 언제 마쳐야 할지 계산을 못하였다. 내가 강의를 시작한 시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오직 재미난 고전이야기만 가득했다. 결국 준비한 자료를 반만 이야기 하고 서둘러 마쳐야했다. 무능한 강사였고 청중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시간이 부족해서 이야기 하지 못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모비 딕>의 한 구절이다. 


“사람은 무언가에 잘못될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더라도 어떤 것에 깊이 들어가면 무의식중에 자기 의심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이슈마엘이 모비 딕을 추격하다가 침몰할 운명인 피쿼드호를 승선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선장인 에이헤브를 보았다면 그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에이헤브는 오직 모비 딕을 잡겠다는 욕망에만 감금된 사람이니 그것을 알아차린 이슈마엘이 그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고 이슈마엘에게 승선할 배를 선택하도록 위임한 절친한 친구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이슈마엘은 포경선을 타고 싶다는 생각에 너무 빠져서 예사롭지 않은 피쿼드호의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지만 애써 그 의심을 무시했다. 바다에서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선장을 직접 보지도 않고 승선을 결정한 것이다.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지만 에이해브는 모비 딕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라서 추격을 계속했고 결국 배가 침몰되었다.


역시 고전은 오래된 미래다. 나는 담당 선생님의 울 듯 한 표정을 보고 내가 서두가 길다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의심’은 했지만 어쨌든 시간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의심을 은폐하고 잡답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담당 선생님에게 정말 감사하고 미안하다. 도서관측의 코르나 예방 안전 수칙을 잘 따라주고 우왕좌왕했던 내 강의를 참을성 있게 끝까지 들어준(그분들께는 고난의 행군이었으리라) 증평군민 독자분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위안이 되는 것은 강의가 마치자 재미있었다는 칭찬을 받았고 EBS라디오에서 스팟 취재를 했는데 내 강의 목소리를 ‘인문독서아카데미 광고’에 넣겠다고 한다. 그 분들도 재미나다는 칭찬을 하신 모양인데 이 영광은 오로지 빅토르 위고, 허먼 멜빌 선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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