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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후손에게 ‘좋은 것’을 나누어주고 남겨 주고 싶었던 가족을 좀 더 편안하게 보내드리기 위해서 샐리 타티스테일이 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을 읽어 볼 만하다.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실질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샐리 티스테일가 주는 조언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죽음을 애써 부정하고 감추려는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빅토리아 시대만 해도 아이들이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심지어는 시신을 처리하는 것까지 도와준 것을 상기시킨다.
대부분의 사람이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장례 또한 가정에서 치렀던 시절에는 아이나 어른에게 있어서 시신이나 장례절차가 지금처럼 낯선 대상이 아니었다. 장례식장이 보편화 되면서 장례와 시신에 관련된 일은 전문가의 업무가 되었고 유족들은 그들의 지시(?)에 따르며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도 ‘지켜보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유족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수월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죽음과 죽어감에 관련된 일을 병원과 장례업자에게 일임하다 보면 죽어가거나 죽은 가족들의 ‘죽음의 질’이 소외될 수 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가 말하는 죽어감과 죽음을 대하는 방법은 사랑하는 가족을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보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샐리 티스테일의 첫 번째 조언은 ‘경청하기’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노력의 반을 ‘말 들어주기’에 쏟아야 한다. 쉽고 단순한 조언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고민을 하지 죽어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소홀하다.
듣다가 궁금하거나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그 이야기는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 주세요”라는 질문으로 부탁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사람도 자신의 말을 많이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보호자는 문지기 역할도 해야 한다. 환자를 병간호하다 보면 누구나 동의하게 되는데 방문객들의 언사는 천차만별이다.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고, 신묘한 약과 치료법을 알려주겠다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는 환자 앞에서 다른 사람을 격하게 비난함으로써 환자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지나치게 정이 많아서 몇 시간을 죽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신세타령하는 사람도 있다.
적당히 둘러대는 말로 환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문객을 서둘러 보내는 문지기의 역할도 중요하다. 보호자가 환자를 방문할 때는 미리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 요양원에 계시는 내 어머니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 조언은 중요하다. 내 어머니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늘 내가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지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피곤한 것은 아닌지 신경을 썼다. 아예 처음부터 오늘은 몇 시간 정도 여기에 있다가 간다고 말을 해두면 좀 더 환자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내게 된다.
또 언제 또 오겠다는 언질을 주는 것도 좋겠다. 환자가 보호자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할 수도 있다. 환자를 병간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하는 잘못이 ‘음식’이다. 이런 병에는 이 음식이 좋으니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 라든가 많이 먹어야 빨리 낫는다는 식의 ‘훈계’를 하며 권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혼자 밥 먹기가 유행하는 것은 핵가족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산물일 뿐 음식은 함께 먹어야 맛이 나는 법이다.
더구나 식욕이 일반 사람보다 좋을 수가 없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가족들이 마치 자신을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서 음식을 먹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뼈아픈 잘못을 했었다. 요양원에서 어머니와 여러 번 언성을 높인 적이 있는데 모두 음식 때문에 생긴 사단이었다. 어머니가 자꾸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으라고 시키는데 그걸 순순히 하지 않았었다. 내가 사 온 음식이고 어머니가 드셔야 하는데 자꾸 나보고 꺼내 먹으라는 어머니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번 거절했는데도 마구잡이식으로 권하니 버럭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와 나란히 음식을 나눠 먹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는 또 얼마나 행복했을까.
죽음을 눈앞에 둔 가족을 둔 가족들은 그동안 섭섭하게 해드린 일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가 기억하지도 못 하는 일을 꺼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에 대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보다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환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느끼도록 대해주는 쪽이 낫겠다.
환자를 보살피는 사람은 안전사고에도 주의해야 한다. 가령 사지를 본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 경우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하는데 잠을 자다가도 침대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또 병 때문에 쇠약해졌지만 건강했을 때의 습관처럼 활동하려고 하다가 다치는 경우도 많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관을 열어두고 장례 예배를 올리는 서양에서 주로 생기는 문제인데 시신에 대한 과도한 화장이나 치장도 고려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복원술 아카데미’가 있을 만큼 이 분야가 발달 되어 있는데 시신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혈색이 좋고 머리숱은 풍성하며 심지어는 평소에도 하지 않는 화려한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다면 유족들이 보기에 그리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족들이 보는 마지막 고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쁜 기억으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적당한 화장과 복원은 필요하겠지만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유족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시골에 살면서 수십 년 동안 화장을 하지 않고 살았던 고인의 시신에 화려한 립스틱이나 매니큐어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