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니는 딸아이가 교양과목 과제 때문에 한 숨을 쉰다.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주말에만 본가에 내려오는 딸아이랑 신나게 놀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운 우리 부부는 과제가 뭐냐고 물었다. 책의 일부를 요약하고 그 내용을 발표하는 것이란다. 어떤 내용인가 궁금해서 보자고 했더니 복사된 수십 쪽의 종이를 건넨다. 텍스트를 보니 역시 만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책 제목도 모르고 저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책의 일부를 뚝 떼어서 읽으니 더욱 그랬다. 


이 대목에서 이상했던 것은 교수님이 유인물을 나눠주고 요약하고 발표하라고 했다고 해서 달랑 그것만 들고 와서 과제를 하겠다고 덤비는 딸아이의 학습방식이었다. 우리 땐 교수님이 무슨 책 이야기를 하고, 과제를 내면 냉큼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 책을 빌리거나 서점에 가서 그 책을 사지 않았나 말이다. 어쨌든 새마을운동 세대와 뉴밀레니엄 세대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딸아이가 건넨 ‘종이 쪼가리’를 꾸역꾸역 읽긴 읽었다.


원전이 궁금해진 잉여력과 집착력을 집중시켜서 책 제목을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리베카 솔닛’이 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이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알라딘 서재에서 자주 본 책이어서 반가웠다. 내가 읽은 한 챕터의 내용 중에서 고개를 끄덕인 부분이 있었는데 계량이 가능한 여성의 처우 개선보다는 돈으로 살 수 없고, 기업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행복, 그리고 배회할 수 있는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취업률, 승진 비율, 급여의 차이와 같은 수치적인 항목에 대한 개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밤늦게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며 거리를 배회할 수 있는 자유를 더욱 원한다는 것이다. 내가 근무하는 직장은 매우 한적한 산골 근처에 있는데 밤늦게 외부 행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고 퇴근을 할 때 여자 동료들이 일삼아 남자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퇴근을 한다. 야간이면 인적이 아니고 차량 통행 자체가 드문 외진 곳이기는 하지만 걸어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남자 직원의 차를 얻어 타고 퇴근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새삼 그 일이 이해가 되는 것이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심야나 외진 곳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피해자는 아무래도 여성이 높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남성 보다는 조심스럽고 두려워지는 것이 당연하다. 치안이 세계적으로 높은 우리나라에서 조차 아직은 여성들이 심야 거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배회할 수는 없다. 노브라 문제로 네티즌의 악플과 오지라퍼의 비난 때문에 고생한 한 연예인이 끝내 생을 마감했다.


체험해보니 앓겠더라. 꽉 조이는 속옷의 불편함을. 브라와 비교하면 새발에 피 이겠지만 나도 꽉 조이는 팬티를 벗을 때 해방감과 편안함을 체감한다. 아예 퇴근을 하면 속옷을 벗고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지내는데 참 편안하고 좋다. 아내와 딸아이도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브라부터 벗는다. 브라가 무슨 예복도 아니고 유니폼도 아닌데 왜 굳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착용을 해야 하고, 그걸 안했다고 해서 악플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된다. 


그 연예인이라고 굳이 속옷 문제로 불특정 다수와 설전을 벌이고 싶었겠나.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브라를 어필한 것은 아마도 속옷을 입지 않을 권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당당히 내 의지와 자유에 의해서 속옷을 입지 않겠다는. 


그러니까 아직 우리나라는 개인이 속옷을 입지 않을 자유마저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뭔가 남과 조금만 달라도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사회는 참 답답하고 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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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0-19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책 받았습니다.
책이 정말 묵직한 게 고급져 보입니다. 게다가 <도쿄 디테일>까지...!
어제 그동안 벼르고 별렀던 책 박스를 들어냈는데 좀 미안하긴 하더군요.
저의 젊은 날 모았던 책인데 이사 와서 한번도 풀어보지 못한 책들이었습니다.
주인 잘못 만나 한번도 빛을 보지 못한 책들이죠.
들어내자 위로 같이 박균호님의 책을 받게 되는군요.ㅎ
고맙습니다.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박균호 2019-10-19 15:02   좋아요 0 | URL
네, 잘 받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아주 오랜만에 옛 책을 들쳐보는 것도 참 재미나죠.
모쪼록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