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넓고 깊으며 세밀한 지식을 가진 분이 쓴 문학동네 판 <닥터 지바고> 소개 글을 읽었다. 문예 영화(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와 원작 소설을 비교할 때 대개는 원작 소설을 더 좋아하는데 <닥터 지바고>는 영화와 소설의 우열을 가리지 못하겠단다. <닥터 지바고> 영화를 볼 때는 꼭 70mm 대형 화면으로 봐야 닥터 지바고의 참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70mm 대형 화면이라야 러시아의 광활한 설경과 주인공의 방황이 맞물려서 우러나오는 감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번역가 박형규가 1990년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낸 <닥터 지바고>가 우리나라 최초의 러시아어 직역 본이라고 한다. 서지 정보를 찾아보니 박형규는 2001년, 2006년, 2009년 연이어 역시 열린책들에서 개정판을 출간하다가 2018년에는 문학동네에서 <닥터 지바고>를 출간했다.


번역에 대한 신뢰와 대형화면으로 멋지게 구현되는 <닥터 지바고>를 다시 읽고 싶어서 얼른 주문을 넣었다. 어찌나 사고 싶었는지 너무 서두른 탓에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어제 배송받은 책 서너 권이 내 책상에 놓여있고, 오늘도 배송 중인 책이 있는데 말이다. 어쨌든 내가 저지른 실수라는 것이 별것 아니긴 하다. 나는 책을 배송 받을 주소를 3개 사용한다. 직장, 본가(주로 주말에 머문다), 혼자 지내는 숙소(직장 때문에 평일에 혼자 지내는 곳).


 주문한 책의 수량과 부피 그리고 택배가 도착할 것으로 예정되는 요일을 고려해서 주소지를 달리한다. 그러니까 <닥터 지바고>를 주문할 때 내가 지키는 몇 가지 조건과 배송지가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존재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꼰대로 치부되기 쉬운 50대 남자라서 그런지 내 돈 주고 책을 사면서도 이것저것 눈치를 보게 된다. 


하루를 멀다하고 직장으로 책이 배송되어 오고 사무실 책상에 업무용 책보다 취미 삼아 보는 책이 더 많이 쌓이면 월급도둑으로 낙인 찍힐까 두렵고, 아내와 함께 사는 본가는 본가대로 서재는 먼지가 쌓이고 책으로 터져 나갈 판인데 무슨 책을 또 사느냐는 아내의 꾸중이 무섭고 그렇다고 혼자 사는 숙소가 마냥 편하기만 하지는 않은 것이 엘리베이트가 없는 3층이라 무거운 책을 굳이 3층 문 앞에 두고 가는 택배 사원에게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책을 주문할 때 그날의 주문량과 도착 시기를 예측하여 위에 열거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주소지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배송지를 잘못 입력한 <닥터 지바고> 주문 정보를 수정하려는데 오류가 나는지 되지 않는다. 같은 과정을 5번 했는데도 잘못 선택한 주소는 요지부동이다. 


6번째 수정 시도를 하면서 아련하게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를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사무실 캐비넷을 열었는데 역시 내가 그토록 주문하려고 하는 문학동네 판 <닥터 지바고>가 뻔뻔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바보가 확실하다는 자백을 할 수밖에 없다. 분명 이전에 이 책을 주문할 때도 매혹적인 소개 글을 읽고 나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까마득하게 기억을 하지 못할 수가 있는지 나의 뇌가 신비로울 따름이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에 유재덕 셰프의 <독서 주방>을 읽다가 발견한 <음식과 전쟁>을 대뜸 주문했더랬다. 유재덕 셰프가 이 책을 배송 받고 펼치자마자 호그와트 마법학교가 떠올랐다는데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삽화와 흥미진진한 음식 이야기가 어우러진 <음식과 전쟁>을 배송받자마자 읽었다. 다 읽고 책장을 덮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토록 유니크한 디자인과 내용이 담긴 책을 모르고 또 샀을 리는 없다고 수십 번을 중얼거렸다. 마치 죽음을 부정하는 말기 암 환자처럼 말이다 .다행히 직장에 있는 여러 곳의 내 아지트에는 <음식과 전쟁>이 없었다. 


주말에 본가를 가자마자 서재 문을 열었는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음식과 전쟁>이 놓여 있었다. 반성하건대 나는 혹시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고 택배를 받는 즐거움 때문에 주문하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같은 책을 2번 주문했더라도 분명 어딘가에서 유혹하는 책 소개를 2번 읽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같은 책을 2번 주문하면서도 각자 다른 유혹과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책 소개를 하는 글쓴이가 그 책에 얽힌 각자 다른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니까 말이다. 머리가 나빠서 좋다는 것이 같은 책을 2번째 주문하면서도 1번째 주문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설레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란 이런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독자에 따라서 너무나 천양지차의 매력과 경험을 느끼게 한다는 것. 어쩌면 내가 머리가 너무 나쁘기보다는 너무 좋은 책이라서 같은 책을 두고 개인에 따라서 극히 독특한 책 소개를 하게 만들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같은 책을 2번 주문하긴 했지만 2번 모두 주문으로 이르게 하는 즐거움과 설레는 책 소개를 읽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혹시 의학용어로 ‘치매’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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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0-17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전하신가 봅니다.
언젠가 <독서만담> 저에게 두 권 보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한 권은 다른 분께 보내셔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그 책 한 권은 지금도 제가 가지고 있고, 또 한 권은 주민센터에서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 기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근데 책 정말 많이 사시네요.^^

박균호 2019-10-17 20:26   좋아요 1 | URL
아.그러고 보니...ㅎㅎㅎㅎㅎ
기증 잘 하셨고요. 혹시 <음식과 전쟁> 관심 있으시면 보내드릴께요. ^^
제법 비싼 책인데 상태는 새책이나 다름 없답니다.

2019-10-17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7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