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4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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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이 진지하게 쓴글을 접할수 있는 기회는 같은 학급 친구간에도 하늘에 별따기.
이러는 와중 다른 친구의 글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때 받은 충격으로 생전 글쓰기에 대한 애정은
경외로 바뀌면서 저 너머 기억의 다락방으로 쳐박혀 평생 먼지만 뒤집어 쓸 상황으로 돌변. ㅠ.ㅠ
그 친구의 글은 너무 독창적이고 아름다왔던 것이다.
그리고 내 글들은 너무 건조하여 어떠한 감성도 묻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내 글에 대한 교사들의 칭찬은 구라였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스며드는 배신감.
이후 10대를 지나 20대에는 문학이 도저히 읽히지 않는다. 당연히 쓰는것도...
문학은 너무 어수선하다? 사람에 대해 여전히 할 얘기들이 그리 많단 말인가.
하늘아래 더이상 새로운게 있겠느냐.
이제서야 스스로 그 이유를 밝혀냈는데, 난 너무 건조해졌던 것이다.
그런 내가 다시 찾아 읽기 시작한 문학의 장르는 "앙티 로망"
(뭐 그렇다고 이 책외에 다른 앙티 로망은 읽은게 없다.)
속물적 근성으로 피터 정을 동경하면서 그가 좋아한다는 작품을 그의 소개를 읽고 구입해버린 것이다.
이 작품과 작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책 자체에 소개되어 있는 역자 민희식 교수의 해석이 전부이다.
책의 말미로 가면서 느끼는 새로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전율이다.
문학을 읽으면서 그렇게나 지겨워하던 작가와 인물의 너저분한 주절거림은 철저히 배재되고
오로지 행위와 시간과 대화만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오랫동안 내가 찾아 헤매던 읽고 싶었던 글이 아니던가.
내 건조함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글에 대한 희망을 준다.
장르 "앙티 로망"이 가리키는대로 이것은 문학이 아니라
형사들이 쓰는 보고서에 그칠수도 있지만, 거기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것은 천만개나 되는 독자 각각의 개성이다.
혹은 찾아내지 않아도 된다.
고루한 인간 정서를 표현한 흔한 수사에 질린 독자들은 한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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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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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모르겠다.
그가 수술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 왜 그는 살기를 원하게 되었는지,
이전에 그의 사상과 육체는 무엇으로 그를 심란하게 하였는지를 말이다.
정말 단순히 나이때문이었단 말인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어떤 광고의 카피처럼 이제는 자신이 30세라는것만 받아들이면 그에게는 다른 고뇌는 없거나 작은것으로 화해버릴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다녔던 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나이 30세에 그의 주위에서 갑자기 몰이 사라졌거나 아니면 몰도 이해를 할수 있거나, 아니면 몰이 있더라도 신경쓰지 않을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그의 내부에서 몰이 사라졌단 말인가..

나는 몰에게 둘러싸여 몰의 모습을 한 나지만 나를 신뢰한다 그리고 몰을 증오한다..
몰은 여전히 두통거리다.
내가 죽을때까지 몰과의 인연을 끊을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끈을 끊기위해 노력할 것이다.
발버둥칠 것이다.
그리고 끊을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 끊어지지 않는것때문에 매우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몰을 죽이기 위해 나 자신을 먼저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왠지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
왠지 나는 그가 이상한 현실을 또 하나 만들어 그 속으로 녹아들려고 하는 것 같다.
아니면 혹시 바하만은 비유가 아닌 반어를 했던 것일까...
아아 나는 모르겠다... 바보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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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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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가끔 어떤 사람들이 [변신]을 읽었느냐고 물어 온적이 몇번 있는데, 그때마다 난 안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10년도 더 이전 충분한 이해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성]을 쓴 작가의 유명한 작품을 읽지 않은것에 대해 카프카에게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곤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난 그 유명한 작품 [변신]을 읽었다.  성격이 비뚤어진 나로서는 변신을 손에 들자마자(다 읽지도 않고) 왜 이 작품이 그렇게 유명했는지 이해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짧은 소설 [변신]은 읽었으나, 길고 막막한 내용의 [성]엔 손을 대지 않았고, 당연히 그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내용엔 [성]이 제외되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성]보다 [변신]이 더 유명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책을 덮고 나서 [변신]을 먼저 읽지 않고 [성]을 먼저 읽은것에 대해 카프카는 나에게 칭찬을 해줘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숙인 고개를 약간은 들수 있게 되었다.  [변신] 한 작품 혹은 이것과 다른 단편들만으로는 카프카 문학에서 드러나는 “막막함”을 이해할수 없다.  단편 소설에 있어서는 “막막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그의 “막막하고 아득함”은 계속 제자리로 돌아오면서도 달라질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반복적으로 좌절되는-제자리에서 돌아가는 쳇바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편에서야 진정으로 소설의 “주제”로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지금은 [변신]의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어느 시대에나 특히,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가장이 자기 역할을 이행함에 있어서, 그가 아무리 성실했더라도 결과가 실패하면 지나친 비난을 받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실패한 결과”를 얘기함에 있어 과정이 성실했다는 전제조건을 말이다.  즉, 성실하지 못했다면 남녀노소 구별없이 그 어긋난 결과는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가장은 그 가정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키기 위해 그자신-개인을 희생한다.  그리고 그가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 다른 가족이나 타인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권리로!!  그리고 가장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또 가장 대부분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느라 정신없어서 자신이 희생을 당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그 잘난 유행소설 [아버지]를 읽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책의 표지도 들춰본적 없는 소설이다.  그리고 읽고 싶지도 않다.  뻔하지 않은가, IMF의 폭풍속에 표류하는 한국의 1990년대에 [아버지]라는 제목을 달고 히트해버린 소설은 하나의 조잡한 상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확률이 많다는것이라는 것 말이다. 

  그레고르는 더없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이기적인 피부양자들은 그를 벌레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아버지의 파산이후 가족들이 궁핍하지 않게 지낼 돈을 벌어다 줬으나 가족들 마음속에서 고마움은 사라지고 테이블 위에 놓여지는 충분한 돈은 그저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는 집안의 빚을 갚으려고 했고 누이를 음악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선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들 역시도 그에 대해선 아무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벌레가 되어 하찮게 죽든, 죽어라고 일을 하다가 죽든 그 죽음이 서로 뭐가 다른가. 

  내가 더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벌레가 되면 가족들도 힘없이 죽어가겠지 했는데, 오히려 각자가 삶의 활력을 찾았다는 것이다.  결국 처음부터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악한 가족은 그것을 알게 되는 대가로 가장의 목숨을 대신 내주었던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때문에 난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의 핏줄을 부정하여 마음이 편해지려는 사악함에 또 분노했다.  그리고 가장 믿었던 존재인 누이가 가장 먼저 그를 포기하자고 했던 것에서는 역시나 인류로부터 어떤 희망도 품을수 없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그 “희망없음”이 단지 “소설”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로 그치는게 아니라, 실제 내가 겪어왔던 현실과 일치한다는게 그야말로 막막하고 암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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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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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의 본능은 결국 중간급 정도의 질에서 생존만을 향해 있는 것일까

한국의 후진성을 맞닥뜨리며 소름돋는 것을 경험했음에도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애정과 솔직함을 담아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검열하고 반성하게 했던 박노자는

이번엔 노르웨이를 중심으로 유럽의 양심을 진단한다.


한국보다 좀 더 세련되고 성숙한 유럽의 민주주의는 과연 그 본질의 발현인가.

결국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한번쯤 민주선진국의 민주주의가 “트랜드”혹은 “관습”의 종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해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양심은 감동과 함께 마음속에 인간의 본질로써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지

학습에 의해 매일아침 이를 닦는 습관처럼 무미건조하게 행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유럽의 선진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 국가들이 행하는 민주적 행위는 어쩌면 그들의 국내정치에 한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인간 존중이라고는 하지만, 확실히 그건 본질일뿐,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최고의 가치는 갖지못하고 역시 정치적 수단(물론 공정하고 훌륭한 편에 속하는)의 하나에 머무르고 있다.

“본질”마저 호도되고 이용당하는 이 시대에, “수단”이란 것이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삶의 방식, 정치의 방식은 다양화되어야 한다.

이 책은 자본민주주의의 어두운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고루할지도 모르지만,

매일 밤 (외양이)멋진 사람들이 많은 클럽이 홍대 어디에 있을까만을 고민하는 대중들에게는

삶을 뒤돌아 볼 수 있게 만드는 좋은 책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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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늑대
팔리 모왓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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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였던 시절의 동화책을 빼면 내가 동물에 관한 책은 아마 거의 읽은 적이 없을것이다.

오래전부터 동물을 무척 좋아했었지만

(특히 애들취향처럼 큰 동물을 좋아한다. - 말 코끼리 고래 독수리... )

걔중에 작년 가을부터 갑자기 유독 늑대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 몇 개월전부터 녹색평론의 광고가 자꾸 나를 유혹하는 바람에

(이러다가 녹색평론에 광고되는 책을 다 읽게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결국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책을 잡자 거기에 푹 빠져서 다 읽게 되어 그날 밤 잠을 제대로 못자고 말았다.

표지의 늑대 사진 이쁘지, 본 내용 들어가기 전인 <작가의 말>부터 유머 때문에 웃기지, 늑대 얘기가 온통이지, 에스키모까지...  아 정말 감격이다. ㅠ.ㅜ

이야기는

늑대 프로젝트의 수행원이 된 주인공이 처음에는 적으로 규정되었던 늑대에 대해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스파이 신세가 되는 이야기이다.

늑대의 습성과 생활에 관한 백과사전적 지식이 이야기로 엮인것을 보면서(작가의 경험이 그 바탕이 되긴 했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늑대에 대한 애정이 무척 풍부하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낀다.

늑대가 가족을 이루고 사냥을 하고 이웃늑대와 어울리고 새끼들을 키우고 놀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절대 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에는 있다.


“인생의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이해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프랑스 물리학자 마리 퀴리의 이 말을 무척 좋아한다.

두려움-공포는 인간을 원초적 본능-생존의 의지-로 몰아간다. 이때 인간은 방어를 위한 공격을 한다.

인간은 그 두려움을 낯선 것에서 주로 느낀다. 아마 동물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좀 더 진화한 생명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낯선 것을 두려워만 해서는 안된다.

이해하려고 해야한다. 그러므로 해서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외계인도 아니고 새로운 생명체도 아닌 지구상의 생물들과 마주치는 처음부터 적이 될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처음-오래전엔 우호적인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들의 두려움-공포라는 정서가 이 세상에 많은 차별과 장벽등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인종에 대한 낯설음, 다른 지역에 대한 낯설음, 다른 언어에 대한 낯설음, 다른 제도에 대한 낯설음, 다른 정체성에 대한 낯설음, 다른 이념에 대한 낯설음,.... 

다른 문화에 대한 이러한 낯설음들이 익숙하지 않다면 이해하려고 시도해봐야 한다.

우리가 관용적이고 포용적인 큰 사람이라면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나는 늑대를 사랑한다.


- 뱀발 -

메신저에서 누군가 물었다.

“한밤중에 숲속에서 그런 인상을 한 늑대를 마주친다고 생각해봐라 무섭지?“

“네. 무섭겠지요. 하지만 늑대도 내가 무서울거에요. 그리고 배가 고프다면 날 먹으려고 하겠지요. 그래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팔자라면 어쩔수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나는 지리산 꼭대기에서 깜깜한 저녁에 허기진채로 깊은 눈속에 갇혔을때도 어, 죽는구나 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실감은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나한테 절대 일어 날것 같지 않은 운 덕분에 지금 나는 살아있다.

미리부터 죽음이란 것을 두려워할 필요 역시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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