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제너레이션 - [할인행사]
노동석 감독, 김병석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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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묘비 앞에서, 내 첫사랑의 묘비 앞에서, 내 찬란한 시간의 묘비 앞에서, 절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내 희망이라는 묘비 앞에서, 젊음이라는 거대한 묘비 앞에서, 이 시대의 나와 너는 살아간다. 

   청춘 그 끔찍한 무덤.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있는 평생 단 한 번도 들어올리지 못할 납덩이 묘비여. 아무 글자도 새겨 넣지 못한 그 민둥의 돌덩이여. 그대는 왜 이렇게 나약한, 연약한 나를 괴롭히고 있는가. 수 많은 길들 중, 껌처럼  버려진 그 길을 걷는 것도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깡패처럼 내 청춘의 삥을 언제까지 뜯어 볼 셈인가. 지독한 칼잡이 보스도 아니도 양아치에게 내 이 치졸하고 온통 연약해빠진 이 청춘을, 이 청춘의 시간을 흔들려야 하는가. 대답해 봐라. 그 나락의 밑 바닥은 언제쯤인지. 얼마나 더 견디면 내 연약해 빠진 무릎, 쉴 수 있겠는가.

  내 청춘을 너는 쓰레기라 말하고 있다. 내 희망을 무덤이라 말하고 있다. 아니 너는 나를 방관하고 있다. 멱살잡고 뒤 흔들어 보는 내 손아귀기 독기를 너를 휘파람 한번으로 저 멀리 날려 버리고 있다. 그래, 너는 꿈쩍도 하지 않는데 나만 이렇게 흔들리는 구나. 나만 미친년 치마자락처럼 펄럭이고 있구나.

  그는 말한다: 오늘 나는 카메라를 팔았다. 내 방식으로 세상보는 그 눈을 파내었다. 내 이 처절한 두 손으로. 오늘부터 나는 장님이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희미하던 희망이여, 이젠 너를 볼 수 없다. 박수 소리로 너의 존재를 알려 주어라. 너 거기 있다고 나를 불러라. 곧 내 귀도 잘라내야 할 그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너 거기 있다고 나를 불러라.  제발, 제발, 제발.

  그녀는 말한다: 오늘 나는 배나무 아래서 온종일 배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배, 배, 배, 배, 배. 수 십번을 외쳐도 떨어져 주지 않은 내 배여. 까마귀 날지 않은 하늘이 무심하기만  하구나. 내 청춘의 허기를 그렇게 간절히 불러도 채워지지 않는구나. 나는 영양실조 인간. 하루만에 나간 직장에서 짤리고, 피라미드 회사에서 사기 당하고.  내 생활의 영양실조. 영양실조 청춘은 오늘도 노래를 부른다.  "하늘이 노래요, 누래요. 하늘이 나일롱 스타킹처럼 자꾸만 팽팽해지더니 빙글빙글 돌아요."

  장례식에 다녀왔다. 85분의 장례식. 내 청춘의, 내 친구들의, 내 첫사랑의, 내 희망의 무덤 그리고 그 묘비를 한참 바라보았다. 세상을 향한 통로를 만들기 위해 나와 친구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장례지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묘비를 가슴에 새워두고 살아야 하는가. 청춘 그 끔찍함에는 이미 낳은 무덤들이 기생하고 있는데. 절망이 모자라 절망한다고? 절망의 그 후카시가 근사해보여 절망한다고? 아무거나 되고 싶으면서 괜히 희망 어쩌구 저쩌구 지껄인다고? 아니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괜히 청춘을 들먹인다고? 약해빠져 이렇게 휘청인다고? 마주설 자신이 없어 그렇게 살아간다고? 대답하지 않겠다. 울컥거리며 그 질문을 던진 당신에게 덤벼들지 않겠다. 시퍼런 도끼를 들고 당신을 겨누지 않겠다.  

  <마이 제너레이션>! 우리는 등뼈에 다이나마이트를 하나씩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구나. 불빛이 사그라들기만 하는. 차라리 펑 터져주었으면. 그래서 이 우울한 내 등 뒤의 그림자 좀 날려줘 버렸으면. 오늘 우리의 청춘을 희망의 무덤 앞에서 그렇게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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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의 팡세 - 김승희 자전적 에세이
김승희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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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나는 위인전을 읽기를 싫어했다.  그리고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여타의 수많은 전기 속의 위인들을 말하는 친구들이 이상하게만 생각 되었다. 어린 마음에 경멸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한 친구에게는 "그런 널 경멸해"라는 말을 해 그 친구와 된통 싸운적도 있다. (그냥, 그런 너가 참 이해가 안되네, 라고 말했으면 되는 일을)그렇게 나는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위인전들을 거쳐 평전과 자서전 그리고 소소한 자기 삶의 기록들을 나는 그렇게 거부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가끔 펼쳐들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착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착하고 대단하게 살 위인도 못되는데. 아이큐는 100아래에서 간신히 퍼덕이고, 품성은 남에게 욕 먹지 않고 살아갈 만큼 뿐이고, 봉사정신이라든지 희생 정신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국가에 대한 인류에 대한 사랑은 그저 꿈 속의 솜사탕 같은 말인데.  나는 어떤 신념을 가지고 싸울만큼의 결단력이라는 무기도 없고 치열함이라는 마음가짐도 없는데.

그런 그런 류의 책들은 나에게 그런 것들을 강요했고 나를 컴플렉스 가득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그리도 요즘 대부분의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드는 자전전 에세이의 책들(요즘은 방송에서도 그런 류의 물을을 많이 내보내고 있다)을 읽을 ‹š 마다(볼 때마다)  자신만의 생의 古와 삶의 무게가 범람하는 것을 볼 때 마다 콧웃음을 치곤 한다. 저만 그렇게 사는게 힘든가. 인간이란게 원래 자신의 고통이 가잔 큰 절대값이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의 고통값이 있을까라는 의심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김승희 시인이 이 책 "33세의 팡세"를 읽기 전 나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요즘은 소설을 쓰고 있지만 시인으로서의 김승희의 시들을 좋아하는 터라 혹시라도 그녀의 기록들을 읽어가며 여타의 책들에서 느꼈던 그런 반감을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란 생각에 나의 고민은 계속 되었다.   80년대 중반에 출판되었던  에세이. 지금은 50을 훌쩍 넘어버린 시인의 33살의 흔적.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잡아 들었고 한줄한줄 읽어가면서 혹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들 때면 얼른 책을 덮을 것이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이 길어졌다.  유년의 기억부터 서른 셋까지 살아온 흔적들. 그녀 삶의 어느 단편들을 보는 일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 나는 내 몸에 어느 한 곳이 훅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빠져나간 것은 내 안에 오랫동안 권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게으름과 오만으로 포장된 내 형편없는 내 삶의 태도들이었다. 그리고 무덤 속에 묻힌 것 처럼 낯설기만 한 내 어느 한 기억기억들. 물론 책을 읽다 조용히 덮은 적도 여러번 있다. 시인이기에 자신 삶의 무게를 더 절실하게 느꼈을 그녀. 그래서 지나칠 정도 민감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신경질적 모습이 보일 수 밖에 없는 그녀. 그런 그녀의 숙명을 생각하며 깊은 숨 한번 크게 들이 쉬고 나는 그 책을 다 읽어냈다.  

열 아홉살엔 스무살이 까마득 했다. 스무살에 서른 살이 까마득했다. 서른엔 마흔과 쉰이라는 나이가 까마득 하겠지. 스물일곱, 서른이 그렇게 낯설지 않고 까마득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지금, 이십여년전의 그녀의 기록들을 아껴아껴 읽는 며칠의 밤을 나는 내 서른 셋의 나이 어느 겨울날,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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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0 0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5-03-12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 님, 다른 분들의 서재에서 이름을 뵐 때마다 인사하고 해야지, 해야지 마음만 가던 터였는데 이렇게 먼저 알은채를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고래가 잠에 뒤척이고 있을 신새벽에 말이에요.
이런저런 일들이 쏟아져 책을 읽어도 리뷰 쓸 정신이 없는 요즘의 저지만 얼른 자리로 돌아와 님을 놀래키는 고래가 되어야 겠네요. 기대해 주실꺼죠?
 
로모로 쓴 일기
신승주 지음 / 눈빛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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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장의 한칸을 차지하고 있는 카메라들. 캐논EOS5, 미놀타X-30, 올림푸스EE3, 로모, 삼성 자동카메라, 그리고 삼성8mm비디오카메라와 JVC6mm비디오카메라(모델명 일부러 찾아보기 귀찮다) 어머니 말 그대로 옮기면 "국 끓여 먹을라고 이 놈의 카메라 덩어리들 많이도 있다."  뭐 사진을 전공하거나 아주 애호가인 사람들이라면 뭐 저정도 가지고 그러냐 싶지만 나처럼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고철 덩이리들(어머니 말 그대로 옮김)을 버리지도 못하고 끼고 살아간다는 참으로 힘겨운 일이다. 먼지 쌓이면 닦아주는 일도 지겹고, 가끔 상하지 않았을까 찍어보는 일도 해야 하고,누가 빌려달라고 하면 싫은 마음에 자꾸만 망설이다 핑계를 대기도 하고. 이래저래 애물단지이면서도 이렇게 끼고 살아가는 건 뭣때문인지.

그 애물단지들 중 그래도 나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낸게 로모가 아닌가 싶다. 여행 때 마다 내 옆구리를 빠져나간 경우가 거의 없으니 말이다. 생긴 것 부터가 워낙 무식하고 단순한게, 대강 거리만 맞추면 사진도 그럴듯 하게 찍힌다. 사막의 모래바람에 속속들이 망가지는 디카와는 달리 그 얼마나 건강을 자랑하던지... 사막여행 때는 동료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던 카메라. 사실 나는 로모가 유명한 카메라고 매니아를 만들어 내는 카메라인줄 몰랐다. 그저 튼튼하다는 이유 하나로 들고 다녔던 나. 그렇게 과소평가했던 로모 카메라. 지금은 디카가 판을 치는 때이고 예전엔 괜히 크고 근사해 보이는 수동 클래식 카메라가 무게잡고 있었으니 로모의 자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인터넷 동호회 자체에 관심 없던 나의 무식함 탓이기도 하지만 정말 로모 매니아들이 지천에 있는 줄은. 중학교 사촌 동생까지 어느날은 알은체를 한다. 자기도 이번 설에 세뱃돈 받으면 살꺼라나 뭐라나. (내게 달라는 말은 절대 안한다. 누이, 나 줘!라고 하면 생각은 한번 해볼텐데.)

어쨋거나(왜 나는 매번 리뷰를 쓸 때마다 한참을 뺑뺑이 돌다 이렇게 본론을 시작하는지)이 책, <로모로 쓴 일기> 는 로모 매니아 중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책이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봤던 책. 그 자리에 서서 훓어냈던 책. 로모로 찍은 사진들과 짧게 쓴 글이 전부였던 참 심심했던 책. 나는 그렇게 이 책을 이야기 한다. 싱거운 국물에 설익은 밥을 말아먹은 기분이라고,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대는 기분이라고, 치즈 굳은 피자를 입으로 베어먹는 기분이라고. 저자의 그저그런 사진들과 글은 정말이지 깊이나 독특한 시선없이 나른하고 지루했다. 물론 그냥 괜찮은 사진도 몇장 있었다.(그렇게라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 너는 얼마나 잘찍어대서?라고 누가 물을지도 모르니)훑어내고 나선 오랫만에 나로 돌아와 "출판사 돈지랄 하는 구만."하고 말하면서 책꽂이에 그냥 그대로 꼽았다. 기대를 한것도 아닌데 실망이 너무나 컸다. 좀 더 근사하게 찍고 그 사진과 어울릴 근사한 글을 써 넣을 순 없었을까. 글빨이 안된다면 어디 좋은 글귀라도 옮겨와서 붙여보지. 왜 내가 아쉬움과 미련이 생기는지. (응큼한 속샘)

렌즈의 왜곡 때문에 혹은 색감 때문에 수동이라는 클래식함 때문에 별의별 핑계로 로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별것 아닌 오브제를 찍을 때 확연히 로몬 디카와 다르다. 그 별것 아닌게 괜히 근사해 보이게 한다. 후카시 효과가 정말 짱인 로모 카메라. 난 가격 싸고, 튼튼해서 쓴다. 그러나 지난 사이판 여행서 더위를 먹었는지 아님 늙어 수명이 다 했는지 고장이다. 고쳐야 하는데 뭐 카메라 들고다닐 기력도 없고 굳이 그것 아니여도 되고. 어쨌거나 애물단지다, 로모!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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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의 희망 블루스
신현림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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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 그 이름 석자만 들어도 가슴 철컥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이십대 초반 그녀의 시는 내 지루한 일상, 내 나른한 사고와 시선에 핵폭탄이었다. 그때 나는 그녀의 시가 던져주는 그 핵폭탄을 몸이 부서져라 받았다.  재수, 삼수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겪은 그 낙방, 추락의 불안함이 주는 외소감에서 나는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까. 노량진의 어느 재수학원 구석자리에서 나는 그녀의 시를 웅크리고 읽었다. 그녀의 시는 참이슬이었고, 천원짜리 디스 였으며, 100원짜리 오락실의 테트리스였고, 학원 앞 붉은 고추장칠을 한 닭꼬치 였으며, 엉덩이가 예쁜 어느 남학생이었고,  어느 봄날을 어지럽게 만들던 꽃가루였다. 나는 맹목적 신앙심(?)을 가지고 그녀의 시를 그리고 글들을 읽었다. 혹자는 거칠다, 뻑뻑하다, 젠체한다, 잡스럽다며 그녀의 글들을 손사치며 밀어내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글이 좋다!!! 물론 다량의 책을 내면서 그 질이나, 격이 조금 주춤하고 있긴 하지만. 글발 떨어졌나, 라는 괜한 오해를 가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그녀의 책을 어김 없이 손에 잡는다. 그녀의 글들이 조금씩 미적지근해지지만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그 삶의 무게가 무겁지 않은가. 이십대 초반 나는 그녀가 보았던 그림과 사진을 찾아서 보고 그녀가 들었던 음악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읽었던 시들과 소설을 찾아 읽었다. 그래, 나는 이효리 따라하기가 아니라 신현림 따라하기를 한동안 시행했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어쨋거나,) 이 책 "희망 블루스"는 작가의 일기를 옮겨 놓았다라고 보면 될 듯 싶다. 자신이 읽은 책의 어느 한구절 혹은 들었든 음악의 한 소절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연작처럼 자신의 생각들을 코멘트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들을 담아 놓고 있다. 그녀의 일기장 한 귀퉁이를 슬며시 훔쳐보는 느낌이 들면서 쓰지 못하고 책상 서랍속 깊이 넣어둔 내 일기장의 한부분을 채우는 것 같았다. 독서와 새로운 소리듣기(음악이라는 단어가 한참동안 생각나지 않았음)에 게으른 나로써는 여러권의 책과 여러 곡의 소리를 들어낸 것 같아 잠깐 동안의 포만감에 어찌나 두둑했는지. 분명 누군가는 이런 식의 글 모음이 너무나 안일하고, 식상하고, 상술에 절여진 단무지 같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장수나 양장으로 된 표지에 비하면 책 읽는 시간이 너무나 짧으니 말이다. 그러나 읽고난 포만감을 시간으로 변용시켜 계산할 수 있을까. 시에서 보여준 신현림만의 치열함을 산문이란 형식에서 기대한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대감이 너무 큰 것을 아닌가하고 되묻고 싶다. 사랑니를 뽑아내듯 모든 이빨을 몽땅 뽑아낼 순 없지 않은가. 그러니 뽑아낸 사랑니, 그 이야기에만 주목하자.

 "희망 블루스"!!! 지루박, 차차차, 맘보, 탱고, 왈츠, 살풀이에 승무 ...그 다양한 춤사위를 두고 블루스라니. 촌스러운 어느 캬바레(카바레지만 나는 이상하게 캬~라고 말하고 싶다)의 싸구려 조명 아래에서 어설프게 흐느적 거리는 춤을 연상하게 되는 블루스. 희망을 그 블루스처럼 추라는 이야기? 희망이 그 블루스란 이야기? 어찌 뭔가 어울리지 않을 듯 싶은 두 단어의 결합에 나는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길지 않지만 깊이와 여러 생각들을 동반하는 글들을 읽어가면서 나는 희망, 그것이야 말고 블루스 리듬이 가장 적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희망 역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잣거리 어느 술에 취한 아저씨의 바딧자락 끝에서 펄럭거리는 블루스처럼, 관광버스의 어깨춤 들썩이는 블루스처럼, 어느 캬바레의 촌스러운 움직임처럼 희망이라는 것은 어렵지도, 우아하거나 폼을 잡지도 않고 가까이에 있다. 때로는 "저런 촌스러운, 저런 경박한", 이라고 약간은 우습게 보는 블루스처럼 희망은 그리 고매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우러러 보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망이여 촌스러운 블루스처럼, 촌스런 조명과 무대의  블루스처럼 그렇게 오라. 가볍고, 경박하게, 스텝이 좀 영켜도 오케이 그러나 느끼면서 신나게 쉬지말고... 희망이여 그렇게 오라.  

이 책은 희망으로 가는 블루스 스텝, 그 스텝을 알려주는 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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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피필름 2005-02-17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현림 시인을 굉장히 좋아해요. 시를 좋아하게 해준 시인이죠.. 산문집들도 사진집들도 좋구요.. 힘들때 외로울때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

어항에사는고래 2005-02-17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맞아요. 참이슬보다, 디스보다 아니 예쁜 엉덩이의 애인보다 더 위로가 되죠. 스타피님두 그러셨군요.

진진 2005-02-2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옛날 대학도서관에서 신현림의 에세이를 읽은적이 있는데..참 좋았어요..제목은 가물..ㅋㅋ..님 덕분에 신현림 글을 한 번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어항에사는고래 2005-02-25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해짐님, 옛날 대학 도서관이란 단어가 어렴풋하면서도,아련하면서도 참 따듯하게 들립니다. 낡은 책장과 낮은조도의 불빛 아래가 잘 어울리는게 신현림의 에세이가 아닌가 싶어요.

비연 2005-02-2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의 리뷰로 뽑히셨네요. 축하드려요^^

어항에사는고래 2005-02-26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드려요, 비연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dts] - 할인행사
소피아 코폴라 감독, 빌 머레이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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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말을 내뱉고 있지만 그 말을 멈춤 잠시 잠깐 혹은 그 말에서 벗어나 혼자가 된 시간 허무함이나 공허함을 느껴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등 뒤의 봉의 무게와 부피가 커져가는 그 순간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지 않는가. 소통의 부재. 그건 어쩌면 태어나서 부터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인지 모른다. 낙타 등뼈에 볼록히 쏟은 봉처럼 사람들은 소통의 부재, 그 부재에서 상실감과 외로움을 저마다 하나씩 등에 붙이고 살아간다. 등에 불어져나온 봉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그 봉을 보는 경우도 있다. 소통의 부재가 가져오는 그 상실감과 고독이 깊어져 쌍봉인 사람도 있고 하나인 사람도 있다. 혹은 아주 낮은 그 흔적만이 간신히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속 샬롯과 밥.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그들은 소통부재를 넘어선 소통불능을 느낀다. 그로인해 불면의 밤들을 보낸다. 무심히 텔리비전 화면 쳐다보기, 창 밖 쳐다보기, 음악 듣기, 낯선 거리와 사람들 속을 걸어보기. 그들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자신을 소외시키는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가가려고 나름의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하나의 또 다른 소통 부재, 불능이라는 또 다른 봉 뿐이다.

  물론 감독은 소통부재와 불능의 모습을 극적으로(내겐 극단적으로 보였음) 보여주기 위해 영화 속 공간을 자국이 아닌 타국(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과 소외감을 보여줌으로써 혹 밥과 샬롯의 근원적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관객을 조금이라도 이해시키려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런 공간 설정은 어설픈 면이 있었다. 또한 샬롯과 밥이 경험하는 일들이 동양인적 관점(조금은 깐깐하게 생각한다면)에서 보면 불편한 부분도 있었다. 문화적차이를 질적차이 혹은 동양문화(일본)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작가는 소설 속 인물에게 감독은 영화 속 인물에게 자신을 투영한다고 보면 이 감독의 폐쇄성 혹은 서양 우월주의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란, 약간은 격양되고 전투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내게는 그런 의도적 설정이 영화를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 감상적 문제를 뒤로하고서도 영화의 공간과 그 공간의 낯선 경험들은 밥과 샬롯의 근원적 문제가 무엇이었나, 라고 자문하게 될 정도로 영화적 핀트를 자꾸만 어긋나게 하는 장치였다.  밥과 샬롯이라고 대표되는 낙타들의 보여주기 위해 일본이라는 사막의 공간. 그 공간은 영화를 보는 내내 버석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모랫바람 처럼 버석이는 그 것을 감독이 노렸는지도 모르만. 

   밥과 샬롯은 일본이라는 타국의 어느 호텔에서 머루르게 된다. 호텔이라는 장소. 그 장소는 정착이 아닌 유동의 타인들이 머무르고 있는 공간이다. 진흙처럼 질척이지 않게 모래처럼 가벼운 바람에도 쉽게 자신의 존재를 옮길 수 있는 그런 타인들의 집단 거주지. 일본이라는 타국적 공간 만큼 호텔이라는 장소 역시 영화 속 밥과 샬롯에게는 소외의 공간이 된다. 

  소외와 상실감 그리고 소통의 부재와 불능이 모래 바람이 부는 공간에서 샬롯과 밥은 만난다. 아니 서로 알아봤다고 해야 더 옳을 듯 싶다. 상태방 등 뒤에 붙어 있는 커다란 봉을 보았다. 자신의 크기만큼 커다른 그 봉에 그들은 끌렸다. 끌린다는 의미가 이성적 호기심 혹은 성적 호기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듯 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의 끌림은 인간적 끌림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한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막 하고 난 후 거울을 겹쳐 놓는 등의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뒷모습을 볼 경우는 극히 적다. 자신의 등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간, 그 시간의 어느날 샬롯과 밥은 타인의 등을 통해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등에 붙은 쌍봉.  그 커다란 크기는 자신의 소외감과 고독, 상실감인 것이다. 그렇기 떄문에 둘의 관계를 로맨스적 관계라고 명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로맨스 영화,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 우연히 여행에서 만나 7일간의 아름다운 사랑. "이라며 이야기 하는 건 좀 우습지 않나란 생각을 하게 된다.  밥과 샬롯은 어찌보면 같은 사람일 수 있다. 앞면의 영혼이 뒷면의 영혼을 보지 못하다 보게 되는 경우처럼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뒷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일탈적 행위를 한다는지, 농담을 통해 그리고 걸러내지 않고 쏟아내는 말들을 통해 밥과 샬롯은  단절이 아닌 소통을 하게 된다. 며칠 계속되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깊은 숙면에도 이를 수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괴로움보다 그것의 치료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소통의 부재와 불능에서 벗어나 진심어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1분동안의 잠이 1시간의 잠보다 달콤했던 기억. 일본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짧은 만남이 그들에게는 그랬을 것이다.  

  영화 끝 장면, 밥이 샬롯에게 귓속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관객들은 밥이 어떤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귓속말은 그 두 사람만의 이야기이며 어느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되는 둘 만의 비밀이다. 엔팅 크레딧과 자막이 올라가는 내내 관객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그 귓속말.  감독은  통괘하게 관객을 소통에서 부재자로 만들었다. 혹 영화를 다 보았음에도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관객에게 내가 할말은 바로 이런거 였어요, 라고 웃으면서 바이바이, 손짓을 하듯이. 귓속말이 궁금하지요, 소통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 이제야 좀 알겠지요?라고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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