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참 억지스러웠다. '나의 한국문학 편력기'라는 제목으로 레포트를 써야 했는데 막상 내가 읽은 책들을 들춰보니 올해들어 읽은 약 60여 권의 책 중에 한국인이 쓴 소설은 다섯 권이 채 되지 못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난 '번역문학'도 문학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야 했고, 그 김에 평소에 눈도장 찍어두고 계속 뒷전에 놓았던 이 책을 읽기로 하고 도서관에 갔다.

 사실상 외국어로 쓰여진 글을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누가 뭐래도 원서를 펼쳐들고 그 나라의 언어로 직접 읽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언어를 원어민처럼 잘 해야 할텐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한 권 읽자고 프랑스어를 공부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게다가 온 나라가 영어에 미쳐 날뛰는데도 정작 외국인과 말 한 마디, 원서 한 문단 읽기도 힘겨울만큼 외국어 배우기는 녹록치 않다. 그렇다고 외국의 그 수많은 명서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번역'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시야가 얼마나 넓어질지, 안대를 하고 어둠 속에 서 있다가 안대를 벗고 몽골 초원의 저 먼 산까지 보이는 그런 모습. 짜릿해질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그 중요한 번역을 우리는 얼마나 천대하고 무시하고 있는지.

 저자는 단지 번역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처음에 '번역의 역사'도 말하고 사전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번역과 관련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도, 번역가의 고충이나 조건, 나아가 번역을 경시하고 책을 외면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우리가 서점에 가거나 인터넷 사이트를 열어서 보고 고르는 책은, 원저자가 외국인일 경우 당연히 번역이 되어있는 책이다. 과정을 보지 못하고 결과만을 손에 쥐기 때문에 난 번역을 외면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이없는 이 현실에 얼마나 분노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일본보다 1백년이나 늦은 번역의 역사에다가 일본인들이 수없이 고민하고 시행착오해서 겨우 한자로 옮긴 단어를 홀랑 따온 꼴이라니. 23년간 살면서 아무 거리낌없이 써온 단어들이 일본의 땀과 결실을 훔쳐온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외국어를 들여올 때 우리나라만의 단어로 새로이 옮기고자 하는 노력이 많은 것도 아니다. 웬만한 소리는 모두 표기할 수 있는 한글 덕분에 외국어 발음 그대로 우리나라 말이 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현실의 번역 문화는 어떠한지. 과장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손 치더라도 이 책에서 말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는 이중번역에서 오역이 난무하는 날림번역, 교수가 대학원생 몇을 시켜 얼기설기 엮어놓고 자기 이름을 내서 출판하는 매춘번역까지. 이름을 걸고 한다면서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사례가 허다하다. 외국어 하나 못하는 나의 무지함을 탓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노력이 나 같은 사람에게는 외국의 지식과 문학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번역에 임해줄 수는 없는 건가?

 오늘날 번역이 이런 상황에까지 온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번역을 업적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좋은 번역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고 책을 읽지 않는 현실이 문제라고 했다.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책을 고를 때 번역가의 이름에는 눈이 가지 않았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원서를 최대한 충실히 잘 번역하고자 노력해서 원작을 뛰어넘는 번역을 하더라도 그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다면 그 허탈함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번역의 시대인 12세기에 프랑스의 수도사 사르트르의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와 같아서, 그 어깨로부터 거인들보다 더 멀리 많은 사물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우리의 시력이 예민하거나 우리의 재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거인다운 위대함에 의해 지탱되고 고양되기 때문이다. (p.52)

 거인 위의 난쟁이여, 제발 내려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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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7-11-2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잘 읽었어요.
망설일 필요도 없이 추천 누르고 갑니다.

2007-11-20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1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