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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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전하는 외침.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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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는 틀렸다 - '국민총행복'을 높이는 새로운 지수를 찾아서
조지프 스티글리츠 외 지음, 박형준 옮김 / 동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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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탄생 
얼마전 모 방송사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중국 연변출신 조선족 지원자가 1등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생방송 현장에 부모 둘이 모두 와서 방청하길래 중국에서 오느라 부담이 많았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두 분 모두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막이 떠서 저간의 사정을 조금 짐작하게 되었다. 나중에 다른 기사를 보고 안 사실이지만 연변 조선족들 중에는 이처럼 어릴때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아이들끼리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보다 높은 소득을 위해 부모자식간 생이별을 감행하는 많은 가족들중 하나였던 것이다.  어쨌든 그 친구는 1등 상금으로 3억과 중형차를 수상해서 (정확한 가치는 모르겠지만) 중국에 간다면 깨나 잘 사는 축에 속하는 속하는 계층이 되었다.(현금 3억에 중형차면 한국에서도...) 

하지만, 그들은 행복할까?

행복하지 않을꺼라 확신해서 하는 질문은 아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 다만 높은(?) 소득을 위해 포기했던 고향과 친구와 가족과 육아의 문제, 부모 없이 자라면서 마땅히 받아야 했을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시간과 고통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을것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봐도 '많이 가진다는 것'은 기대와 달리 역효과를 불러올때도 많다.)


GDP는 틀렸다

서설이 길었는데,  이 책은 GDP로 환원된 이라는 경제활동의 결과수치만으로 측정되는 인간의 행복과 삶의 질은 더이상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책이며, 그러한 경제위주의 삶의 명과 암을 잘 드러내주는 사례가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어서 잠시 TV프로그램 얘기를 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요 내용은  화폐로 측정되는 것이 삶의 질을 나타내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화폐로 측정되는 것조차 기존 분석 방식은 실제상황을 제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지표를 개발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의 의뢰를 받아 3명의 경제학자가 주축이 되어 연구를 하였고 그 연구 결과 중 일부 내용을 공개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전문 학자들의 보고서답게 책은 연구배경, GDP의 한계,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을 순서대로 차근차근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정부가)귀담아 들을 내용이 많다.  그러나 읽으면서 불만족스러운 면도 없지 않은게 사실이다.  우선 이 책은 일반인을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다. 아예 서론에서 이 보고서가 정치인, 정부, 학계, (관련)시민단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용이 딱딱하고 불친절하게 읽힐수 있다는 단서다.  또한 제목이 주는 도발성과 기대감과 달리 내용은 문제점의 원인과 대략적인 연구방향 제시만 있고 그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 점은 이해가 가기는 한다.  건강, 의료, 교육,환경, 분배, 사회적 연계, 주관적 행복 등등 새로운 지표개발을 위해 고려해야할 분야중 하나만 보더라도 만만치 않은 내용들이니  아무리 노벨상 수상자들이라 해도 언감생심 단시일에 세계 표준을 제시하는 것은 무리었을 것이다.  이제 그 후속처리의 역할과 책임은 이 보고서를 받아든 세계 각국의 정부와 정치인, 시민단체와 학자들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다.


선진국

 다만 부러웠던 점은 이런 연구를 주도해가고 있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역량이다.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국가이기에 이러한 선진국들이 제시하는 질서를 추종하는 것만 가능할 뿐 사실상 먼저 기준을 제시하고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그것은 그나마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보고 정신을 차렸을때나 걱정할 일이고 지금 우리나라는 토건 경제로 간신히 연명하는 후진국 경제구조를 면치 못하고 있을 뿐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아예 747(매년 7%성장 4만달러 GNP, 7대경제대국)이라는 폐기되어가는 개념의 성장률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한 정권인데다가 경제성장률 수치에 얽매여 무리하게 벌이는 환경파괴, 자원 낭비. 그마저 속성으로 하느라 수십명이 죽어나가는 삽질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당분간은 희망이 없어보인다.  이런 일은 GDP가 아닌 새로운 삶의 질 측정방식이 진작에 국제 표준이 될수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 아니었을지...  지구 반대편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고민하는데 이 땅에서는 숫자 올리기용 삽질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삽질'이 아닐수 없다. 


 책 첫머리를 열면서 놀란것이 서문(foreword)를 사르코지가 썼다는 점이었다.  이 책의 기반이 된 연구가 사르코지 정부의 의뢰였다고 하니  이민자에 대한 강경노선, 강력한 경제개혁과 불도저식 정책 추진 등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로 나에게 인식됐던 사르코지 정부를 다시 보게 됐다. (이것만 보면 프랑스는 우파가 우리나라 좌파보다 더 좌측에 있다.) 

 
 로버트 케네디
여기 경제활동의 수치로만 측정되는 '삶의 질'의 허구를 잘 드러내 주는 연설 한 편이 있다. 로버트 케네디가 이미 1968년에 행한 연설이다. (GNP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GDP와 바꿔봐도 무방하다.)
직접 정책 판단에 개입할일 없는 일반인이라면 이 연설이 의미하는 함의만 마음 깊이 간직하는 것으로도 이 책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마음이 투표로 표현된다는 전제하에.

우리 GNP는 한 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 그리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네이팜탄과 핵탄두와 도시 폭동 제압용 무장 경찰차량도 포함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기 위해 폭력을 미화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GNP는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 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이 포함되지않습니다. 우리의 유머나 용기도, 우리의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측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왜 자랑스런운가를 제외하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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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전쟁 - 연금제도가 밝히지 않는 진실
로저 로웬스타인 지음, 손성동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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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소를 금할수 없는 책제목과 책소개. 한경은 책도 신문과 같은 정신으로 만드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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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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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미터 미인'이라는 말이 있다. 장점만 보였던 대상을 자세히 보니 흠이 보인다는 뜻이다.  '제1권력'이라는 책을 보면 러셀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온 레셀이 바로 100미터 미인같은 존재였다.  엄청난 저서와 다방면의 천재적이며 왕성한 활동은 일종의 '영웅'같은 이력를 보여주지만 영국같은 열강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찬동하였기에 나에게는 100미터 미인에 불과해 보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엔 100미터 밖에서도 바라볼 일 없긴했지만.

 식민지 경영 찬성론자라는 말을 반신반의했으나 러셀의 이 책을 읽고나서 그러한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슨 의도였는지 공공연히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그의 글이 베스트 모음집이라는 이 책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 통치자들이 아프리카인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중략)....  아프리카인들이 행정적인 훈련을 받고 책임감 있는 습관을 기르기 전에 갑자기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이식한 문명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p.37)

-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 (1951)

미개한 사람들은 스스로 질서를 유지할수 없으니 자신들이 개입해야한다는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들...  바로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의 신봉자들이 했던 그런 이야기다.  소위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과거의 행적을 미화할때나 쓰던 논리가 러셀의 베스트중 하나라니 참 씁쓸한 일이 아닐수 없다.

 100미터 미인이라는 말이 좀 억울할수는 있겠다. 러셀이 살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야하니까. 우리가 세종대왕을 반천을 구분한 인권파괴자에,  남녀차별을 당연시한 마초로 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가 인종주의적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가져온 주장과 동일선상에 있다는것만으로도 '미인'의 한 꺼풀은 벗겨주는게 옳을듯 싶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니 뛰어난 사회활동과 반핵운동을 펼치기는 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만큼 결함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사실 알고보면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할것이다.) 

 사람은 그렇다치고, 이 책은 어떠한지 한 번 볼까?  이 책은 기존 러셀의 40권의 저서와 10여 편의 연설문 등에서 추려 뽑아낸 베스트라고 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그렇게 됐겠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은 없고 주로 한 쪽 미만의 짧은 글조각들이 책 전체를 채우고 있다. 이 글 속에서 러셀은 시종일관 기존 사회의 불합리한 통념과 가식을 꼬집고 조소한다.  특히 종교(주로 기독교)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은데 기독교에 대한 러셀의 인식을 한마디로 표현한면 이렇다  

"말이 안된다" 

 베스트 선집 편집자는 이러한 러셀의 종교관에 대해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라고 변호(?)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지만 마찬가지로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러셀의 입장은 불가지론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인의 허위와 모순된 성경해석 등에 대한 비판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했던 것으로 보아서는 최소한 기독교에 관해서는 신은 없거나, 있다해도 성경을 통해 우러러 보았던 그런 존재는 아닌것으로 본듯하다. 

 책 내용은 그닥 베스트다운 특별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음식으로 치자면 좀 싱겁다고나 해야할까? 가끔 통쾌한 이야기도 있고 따분한 이야기도 있고 신선한 발상도 있고, 지금은 상식이 된 이야기도 있다. 그런 글들이 이것 저것 섞여 있어서 전체적인 인상은 아주 아주 평범한 글모음집이 되어버렸다.  
 이 책으로는 러셀의 대강만을 느끼고 책 머리에서 권하듯 원출처로 제시된 40권의 책 중에서 관심가는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이 책의 좋은 활용 방법이 아닌가 싶다.  도저히 이 책으로는 러셀이 뭘 봤는지 모르겠다.  실은 저 식민지 옹호 입장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좀 꺼림칙할 정도니까.

 

사족.  책 목차를 보면 각 장 제목 아래에 주저리 주저리 글씨가 많다. 처음엔 해당 장에 대한 개요쯤인가 해서 열심히 읽었는데 알고보니 그냥 그 장 본문 내용중 일부를 중복 게재한 것에 불과했다.  그럴꺼면 목차는 그냥 목차를 알아 보는데 충실할수 있게 단순화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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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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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연애를 하거나 함께 살거나 할때 가장 힘든 일중 하나가 감수성의 수위를 맞추는 일이 아닌가 싶다. 기실 많은 오해나 다툼이 거기에 기인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심드렁하게 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충격을 받기도 하곤 하니 말이다. 이런 감수성의 차이는 으레 남녀차이로 치부하기 쉬우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살아온(살아가고 있는) 환경의 차이가 더 영향을 주는것으로 보인다. 

서경식 교수는 그의 조부때 한국(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주해간 재일교포 3세대(때론 2세대라고도 이야기한다)이다. 일본에서 나서 자라고 살았기에 일본어라는 가해자의 언어로  피식민지인의 아픔을 이야기할수 밖에 없는 남다른 감수성의 인물이다. 그런 그의 감수성은 본토(한반도)인의 둔감함을 헤집고 다니고 아우슈비츠의 유태인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과 베트남의 농민들과도 연대한다.  

   
 

로시 감독의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96년이었다. 대략 프리모 레비 사후 10년의 일이었다. 대중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그 오락영화를 보고, 나는 불과 사후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프리모 레비도 이렇게 화석화 되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유태인학살에서 살아남아 증언을 남긴 프리모 레비에 대한 영화를 보고 쓴 글의 일부인데 '화석화'라는 말이 마음에 와서 '탁'하고 박혔다. 원본은 간데없이 변질된 각질과 뼈만이 남아 해석하는 이가 재단하는대로 평가받는 과거의 유물.  어쩌면 우리는 매일 매일 화석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의 감옥
 '언어의 감옥'이란 표현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느 시인이 '꽃'을 통해 인식(이름 부르기)하기 전후의 존재는 전혀 같지 않음을 이야기했듯, 그런 '인식'의 과정을 우리는 '언어'를 통해 항상 체현하며 살고 있다. 공기 같아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사랑'과 '愛'와 'Love'와 'Amour'는 같은 '사랑'일까?
언어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지 않음은 충분히 안다. 마치 무지개를 실제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정확히 7가지 색깔로 구분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경계와 경계사이의 그 수천가지 오묘한 색깔이란... 그 경계를 나누는 방법은 언어의 수 만큼 다양하기에 나의 언어로 타인의 언어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표현할 언어가 없을때, 나의 언어를 타인의 언어로 온전히 변환할 수 없을때 그것이 바로 감옥이 되는 것이다. 나같은 범인에게도 그러한데 그것이 모어(母語)와 모국어(母國語)가 다른 사람에게야...  

 저자는 일본에 사는 조선민족으로의 불편한(?) 위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언어는 감옥이 되었고 일본은 그들을 타자로, 한국은 일본인으로 인식한다. 분단된 현실때문에 애초부터 돌아갈 고국이 없었던 조선인들은 그래서 3세대가 태어나도 4세대가 태어나도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피곤한 현실을 아무도 바로 보아주지 않는다. 한일 협정때 김종필은 아예 이랬다지?  
"저들(일본)과 동화되라."  

 

개인의 죄, 국민의 책임
책의 상당 부분은 일본이 자신의 과거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이 글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터지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나 '통석의 념'같은 사죄같지 않은 사죄의 표현, 새역모 교사서 등으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일본 내의 과거 식민지배와 전쟁책임에 관한 평가의 흐름을 새롭게 배운다. 
현재 대세는 알려진 대로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데, 그런 흐름의 현장 분위기와 내용을 자세히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들 논리의 빈곤함과 허약한 인식에 통렬한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그 논리적인 반박에 오히려 한국인인 나는 점차 주눅이 들었다. 일본인의 자기중심적인 논리(라기보다는 억지)는 실은 한국의 경우라해서 그닥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덕에 이만큼 발전했다고 하질않나, 취약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급히 한일협정을 하면서 자국민과 동포의 식민지하 피해 파악과 보상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일괄 사면시켜준 정치인과 그들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고, 지금은 그런 자들의 혈연적 정치적 (그런게 있다면)사상적 유산을 물려받은 이가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기까지 하니 어찌 고개를 들수 있을까.
저자가 일본의 책임을 물었던 논리의 결론은 "개인의 책임은 물을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한국)인으로서의 책임은 피할수 없다"는 것이므로 이것은 곧 나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직접 수행한 일이 아니라 해도 한국 국적자로서 그 역사의 공과를 모두 누리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를 휘감고 있다고 느낀 그것을 아마 '경험의 감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참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왠지 쓸쓸하다. 듣는 이 없이 공중에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아마 소수자의 목소리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소수라는 말인가?  그건 경험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감옥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우리)다. 그는 경험을 했고 나는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저자가 '언어의 감옥에서' 받은 것들을 '경험의 감옥에서' 그대로 돌려 받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의 '서시'가 온전히 일본어로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그의 경험은 나에게 온전히 오지 못하고 있다.  더 가까워질 여지는 있지만 아마도 절대 건너지 못하는 선은 영원히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쉽지 않게 읽었다. 그 사유의 깊이가 깊어서, 그가 겪는 불편함이 느껴져서, 그리고 그가 우리를 찔러서...
 리뷰를 쓰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인것 같다. 책의 깊이를 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수많은 오해와(오해는 연인사이나 대통령과 국민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표피적인 이해로 상처를 줄까봐서다. 그러나 변명처럼 항상 외우고 다니는 이 말 '三人行 必有我師'를 도피처 삼아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쓸모가 있지 않을까 나름 가치를 부여해 본다. 

뭐, 어차피 내일이면 화석화될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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