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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사람이 연애를 하거나 함께 살거나 할때 가장 힘든 일중 하나가 감수성의 수위를 맞추는 일이 아닌가 싶다. 기실 많은 오해나 다툼이 거기에 기인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심드렁하게 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충격을 받기도 하곤 하니 말이다. 이런 감수성의 차이는 으레 남녀차이로 치부하기 쉬우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살아온(살아가고 있는) 환경의 차이가 더 영향을 주는것으로 보인다. 

서경식 교수는 그의 조부때 한국(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주해간 재일교포 3세대(때론 2세대라고도 이야기한다)이다. 일본에서 나서 자라고 살았기에 일본어라는 가해자의 언어로  피식민지인의 아픔을 이야기할수 밖에 없는 남다른 감수성의 인물이다. 그런 그의 감수성은 본토(한반도)인의 둔감함을 헤집고 다니고 아우슈비츠의 유태인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과 베트남의 농민들과도 연대한다.  

   
 

로시 감독의 영화가 제작된 것은 1996년이었다. 대략 프리모 레비 사후 10년의 일이었다. 대중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그 오락영화를 보고, 나는 불과 사후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프리모 레비도 이렇게 화석화 되어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유태인학살에서 살아남아 증언을 남긴 프리모 레비에 대한 영화를 보고 쓴 글의 일부인데 '화석화'라는 말이 마음에 와서 '탁'하고 박혔다. 원본은 간데없이 변질된 각질과 뼈만이 남아 해석하는 이가 재단하는대로 평가받는 과거의 유물.  어쩌면 우리는 매일 매일 화석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의 감옥
 '언어의 감옥'이란 표현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느 시인이 '꽃'을 통해 인식(이름 부르기)하기 전후의 존재는 전혀 같지 않음을 이야기했듯, 그런 '인식'의 과정을 우리는 '언어'를 통해 항상 체현하며 살고 있다. 공기 같아서 특별함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사랑'과 '愛'와 'Love'와 'Amour'는 같은 '사랑'일까?
언어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렇지 않음은 충분히 안다. 마치 무지개를 실제로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정확히 7가지 색깔로 구분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경계와 경계사이의 그 수천가지 오묘한 색깔이란... 그 경계를 나누는 방법은 언어의 수 만큼 다양하기에 나의 언어로 타인의 언어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표현할 언어가 없을때, 나의 언어를 타인의 언어로 온전히 변환할 수 없을때 그것이 바로 감옥이 되는 것이다. 나같은 범인에게도 그러한데 그것이 모어(母語)와 모국어(母國語)가 다른 사람에게야...  

 저자는 일본에 사는 조선민족으로의 불편한(?) 위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한다. 언어는 감옥이 되었고 일본은 그들을 타자로, 한국은 일본인으로 인식한다. 분단된 현실때문에 애초부터 돌아갈 고국이 없었던 조선인들은 그래서 3세대가 태어나도 4세대가 태어나도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피곤한 현실을 아무도 바로 보아주지 않는다. 한일 협정때 김종필은 아예 이랬다지?  
"저들(일본)과 동화되라."  

 

개인의 죄, 국민의 책임
책의 상당 부분은 일본이 자신의 과거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이 글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터지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나 '통석의 념'같은 사죄같지 않은 사죄의 표현, 새역모 교사서 등으로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일본 내의 과거 식민지배와 전쟁책임에 관한 평가의 흐름을 새롭게 배운다. 
현재 대세는 알려진 대로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데, 그런 흐름의 현장 분위기와 내용을 자세히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들 논리의 빈곤함과 허약한 인식에 통렬한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그 논리적인 반박에 오히려 한국인인 나는 점차 주눅이 들었다. 일본인의 자기중심적인 논리(라기보다는 억지)는 실은 한국의 경우라해서 그닥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덕에 이만큼 발전했다고 하질않나, 취약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급히 한일협정을 하면서 자국민과 동포의 식민지하 피해 파악과 보상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일괄 사면시켜준 정치인과 그들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고, 지금은 그런 자들의 혈연적 정치적 (그런게 있다면)사상적 유산을 물려받은 이가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르기까지 하니 어찌 고개를 들수 있을까.
저자가 일본의 책임을 물었던 논리의 결론은 "개인의 책임은 물을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한국)인으로서의 책임은 피할수 없다"는 것이므로 이것은 곧 나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직접 수행한 일이 아니라 해도 한국 국적자로서 그 역사의 공과를 모두 누리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를 휘감고 있다고 느낀 그것을 아마 '경험의 감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참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왠지 쓸쓸하다. 듣는 이 없이 공중에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아마 소수자의 목소리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소수라는 말인가?  그건 경험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감옥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우리)다. 그는 경험을 했고 나는 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저자가 '언어의 감옥에서' 받은 것들을 '경험의 감옥에서' 그대로 돌려 받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동주의 '서시'가 온전히 일본어로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그의 경험은 나에게 온전히 오지 못하고 있다.  더 가까워질 여지는 있지만 아마도 절대 건너지 못하는 선은 영원히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쉽지 않게 읽었다. 그 사유의 깊이가 깊어서, 그가 겪는 불편함이 느껴져서, 그리고 그가 우리를 찔러서...
 리뷰를 쓰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인것 같다. 책의 깊이를 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수많은 오해와(오해는 연인사이나 대통령과 국민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표피적인 이해로 상처를 줄까봐서다. 그러나 변명처럼 항상 외우고 다니는 이 말 '三人行 必有我師'를 도피처 삼아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쓸모가 있지 않을까 나름 가치를 부여해 본다. 

뭐, 어차피 내일이면 화석화될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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