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포필리아 - 환경 지각, 태도, 가치의 연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6
이-푸 투안 지음, 이옥진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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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포필리아라는 단어가 생소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저자가 제안한 개념으로 '삶의 터전에 대한 사람의 정과 사랑'이라는 뜻이라는 점을 알게 되고 책에 흥미가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매우 풍부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큰 틀을 한 번에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서론 부분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요약과 결론' 부분을 먼저 읽어본 다음에 저자의 문제의식을 확인하고 본문을 읽는다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인간은 끈질기게 이상적인 환경을 찾아다녔다. 그 모양새는 문화마다 서로 다르겠지만 본질적으로 대조적인 두 가지 이미지로 수렴되는 듯하다. 순수의 정원과 우주이다. 지상의 과실은 안전을 제공하는데, 거기에 웅장함을 더한 조화로운 별자리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움직여간다. 바오밥나무 그늘로부터 하늘 아래 신비의 원으로, 집에서 공공의 광장으로, 교외에서 도시로, 해변의 휴일에서 세련된 예술 향유로 향하면서 평정의 지점을 찾는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평정 말이다. (p.370)

이상적인 환경을 고안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고대 문명에서부터 현대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조망하고, 여러 문명의 시도들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 대해서, 그리고 저자의 성장 및 출신 배경 덕분에(혹은 때문에) 유럽이나 근대 이후의 '서구' 문명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문화권의 이야기를 골고루 다루었다는 점은 모두 흥미로운 요소로 작용합니다. 마치 다양한 전시물들을 한 번에 모아 놓은 박물관에 온 기분입니다. 하지만 처음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 박물관속에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저자도 이 박물관의 가장 적절한 배치를 아직 찾는 중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문화 인류학적 배경지식이나 세계사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이라면 익숙한 내용들이 많을테니 한결 읽기 수월할 것입니다. 

 

저자가 분명히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의 인간 주거 문제나 환경 보존 혹은 생태학적 논의와도 결부될 소지가 많으니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분들도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주장을 얻기보다는 참고할만한 문헌의 하나로 접근하시는 것이 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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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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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분량이 상당해서 언제 한번 읽어보나 했는데 합본을 절반 가까운 가격에 구매할 기회가 생겨서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네요. 합본으로 사는 것이 각각 나누어진 책을 사는 것보다 경제적이기는 한데 여러 분들이 지적해주신대로 휴대성은 매우 나쁘고요 책 자체가 읽기에 부담스러운 크기입니다. 어릴 때 열광했던 해리포터 시리즈의 원서도 이정도로 부담스러운 형태의 제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 합본은 소장가치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읽기'에는 부적절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을 일부러 한 개 감점했습니다(내용만으로 본다면 당연히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습니다만).

 

책의 내용을 논리정연하게 요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겠습니다. 저자가 처음부터 그것이 가능하게 책을 쓰지도 않았고,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탄탄한 전개'를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에서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야기는 산만하다고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산만하고, 개연성은 전혀 없으며 '지금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고 황당함에 소리치게 되는 대목도 있기 마련입니다. 판타지나 SF 소설의 열렬한 팬이 아니다보니 어떤 부분은 힘겹게 페이지를 넘겨갈 만큼 지루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내용 전반에 흐르고 있는 우습지만 씁쓸한 풍자를 읽어내는 맛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건들,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의 대사와 사건 전개, 변덕스러움과 황당함.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 아니었던가요? 그렇기 때문에 복잡해보이는 이름들만 제외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별 거부감 없이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 아닐까요? 소설 속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절대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만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소설 속의 시공간마저 뒤틀린 '저자의 우주'보다 더 심사 뒤틀린 사람들이 더욱 황당한 일을 벌이고 있는 곳이 '우리의 우주'일텐데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어느새 주인공들이 겪는 황당한 모험들이 어쩌면 이미지를 조금 왜곡해서 보여줄지는 몰라도, 그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고요.

 

정리하면, 부조리한 현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에 지치신 분들이라면 잠시 상식이란게 원래 불가능하고 부조리함의 기준조차 세울 수 없는 은하계 이야기 속에서 잠시나마 웃고, 현실의 무게도 조금 덜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오늘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끊임없이 재탕하는 수많은 모티프들의 원천을 찾으려는 호기심에서 이 책을 읽는 것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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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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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요한 것은 "주사위를 던지면 1에서 6까지의 숫자 중 하나가 나온다."는 진리의 표명이 아니라 실제로 주사위 놀이를 하는 것이다.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고루 타당한 말. 그것은 언어의 휴가일 뿐이다. 우리의 비판적 담론들은 현실과 맞물리지 못하고 공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 속에 들어가 그 속의 힘들과 맞물려야 한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 체계 속의 어휘들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표현을 가지고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놀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의 획득을 말한다. 이는 담론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문제는 담론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다. 낱말의 의미가 그것의 사용에 있듯이 담론의 의의도 그것의 구체적 사용에 있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우연의 세계 속에서 닥쳐오는 문제들을 해결해내는 놀이. 이 휴의의 정신이 필요하다. (pp.293-294)

 

2002년에 1쇄가 나온 이 책이 2013년 6월에 21쇄까지 찍어 냈을 정도로 사람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위에서 인용한 구절과 얼핏 모순되는 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 글을 쓴 목적이 '고루 타당한 진리의 표명'이 아니고, 그의 말은 휴가를 간 채 의미 없이 빛바랜 것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건만,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이 여전히 '그것의 사용에서' 충분한 의미를 찾고, 필자와 같은 독자들이 그의 글을 읽을 때 격하게 공감하여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고, 가슴 한쪽이 시원해지거나 뜨거워지는 효과를 내는 것은 어떻게 된 영문인가? 아무래도 그것은 그가 지적한 한국 사회의 모습들이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얽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전망들 중 어떤 것은 분명히 수정되어야 하겠고, 어떤 것은 그가 굳이 예언가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의 짐작이 극대화되어 더 확실하게 실현된 부분들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지배적 망탈리테가 정치적 국가주의, 경제적 자유지상주의, 문화적 보수주의의 세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근본적인 그의 지적은 변한 것이 없어보인다. 물론 우리들을 감싸는 이 지독한 삼발이도 낡아서 금이 갈 조짐들이 보인다. 보수정권의 장기적인 집권 속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누리던 다양한 권리들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어낸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있으며 복지국가 담론은,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게 사용되는지 좀 더 두고 지켜봐야겠으나, 경제적 자유지상주의가 황금열쇠가 아니라는 목소리로 등장하고 있으며 중간에 거대한 유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문화적 보수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는 분명 균열이 가고 있다. 하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게 결별하지는 않았기에, 삼발이는 낡을 대로 낡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 망탈리테'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그의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유쾌한 글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독자들을 찾아갈 것이다. 훗날 '뭐 이런 걸 가지고 진지한 고민을 하며 글을 썼지?' 라고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의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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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에 대한 두려움 - 분노의 지리학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4
아르준 아파두라이 지음, 장희권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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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에 대한 두려움은 전 지구화를 가장 필요로 하지만 정작 지금까지는 이 현상으로부터 가장 혜택을 입지 못한 빈곤층, 무소유자, 약자 그리고 오늘날 주변화된 여타 집단들에게 전 지구화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묻는 장기적인 이는 나의 학문적 관심사이자 개인적 관심사이기도 하다연구에서 일종의 중간 단계에 해당한다. 이 책은 과도기를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희망을 말한다 해도 그것이 전 지구화의 또 다른 결과인 폭력의 영향 아래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 희망은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 지구화가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증오와 종족 학살(ethnocide)·이념 학살(ideocide)을 초래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전 지구화에 대한 희망을 어디에서 품어야 할지, 또 어떻게 이 희망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해나갈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연구의 현 단계에서 독자들이 아무쪼록 나와 함께해주기를 바란다. (머리말 중에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여러 논란을 일으키며 주목받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끊이지 않는 국제적 분쟁과 서로 다른 문화권이 한 국가 안에서 충돌하게 되면서 생기는 국가 내 분쟁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신선한 패러다임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나름대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답을 주고자 한 것 같다. 그가 이야기하는 소수에 대한 두려움은 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적 정책이나 제도부터 인종 청소수준의 대량학살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다루지만, 이런 현상들을 경제환원론적으로 설명하거나 종교근본주의의 광기 혹은 다문화주의의 실패와 같은 흔히 들어오던수사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전 지구화 시대에 근대적 국민국가의 함의가 무색해지고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불확실성과 추상성을 해소하려는 뒤틀린 시도로서 소수자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그 존재마저 부정하려는 부당한 폭력을 성찰한다(이러한 폭력이 부당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겠으나 최소한 피해자들에게는 더없이 부당하지 않겠는가).

 

1920년대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들이 이유 없이 학살당하던 역사를 떠올려보면 광기 어린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은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세기가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한국에 다양한 이유로 들어온 외국인들을 외국인 노동자라는 정체성으로 크게 묶어내며 그들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각종 사회 문제에 책임을 질 가장 유력한 집단으로 규정하려는 시도가 생겨나는 것을 보면 더 이상 한국 독자들이 소수에 대한 두려움의 피해자로서만 저자의 목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러한 폭력의 대상이 한국인외국인의 경계의 불확실함을 존재 자체로 파고드는 조선족에게 점철되는 목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저자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소수자의 육체는 사회적 삶 속에서 친숙한 것에 대한 매력과 추상성의 감소를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매개체가 된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부분이 통찰력의 산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국내 상황에 대해 단순히 다문화 사회소수에 대한 배려만을 외치는 것은 미봉책으로 끝날 위험이 크다. 자유주의적 배경에서 다문화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정치적 수사는 실제로 다양한 문화의 구성원들이 마주하게 되는 통합과 동화의 압력 속에서 빛을 잃게 되며, 더 비극적으로는, 차라리 통합과 동화의 시도를 하는 것이 겉으로만 다문화주의를 표방한 채 다른 문화권의 집단들이 일으키는 다양한 충돌 자체를 중요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방관하는 태도보다 그나마 인도주의적인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어떤 해결책이 옳다고 확신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저자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종교에서 비롯된 갈등을 생생히 기억하면서 소수자에 대한 폭력 문제가 자신의 고유한 관심사이자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이 에세이를 썼듯이, 우리들도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가 정말로 우리의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저자가 하고자하는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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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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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디외에 대해 '핵심'만을 간략하게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정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 중 하나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원한다면 같은 저자가 쓴 '구별짓기'에 대한 안내서 『취향의 정치학』을 읽어보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이 책의 목차에다가 더 필요한 살을 붙여가면서, 그리고 구별짓기라는 부르디외의 대표 저작을 어떻게 읽을 지에 대한 각 장별 해설이 덧붙여져 있는 형태입니다. 개인적으로 둘 다 읽어보았는데, 조금의 시간과 비용만 더 투자할 수 있다면 후자를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비교 대상이 있어서 개인적인 평가는 다소 낮지만 책 자체는 간결하고, 핵심이 명확하게 드러나서 저자도 인정하듯이 '어려운 부르디외'에 관해 첫단추를 채우기에는 좋은 책입니다. 다만 부르디외에 대해 어렵다는 저자의 평가를 무릅쓰고 첫 단추를 넘어 본격적인 '입문'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그 매력을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저자 후기에 들어가 있는 문제의식도 『취향의 정치학』에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부르디외에 대한 설명 자체 만큼이나 이 부분도 눈여겨 읽을 가치가 있기에 더욱 후자의 책을 읽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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