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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 -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때 한 번도 체계적으로 세계사 공부를 해보지 않은 필자와 같은, 역사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정도의 열정과 게으름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난 한 세기의 일들을 ‘재평가’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재평가는 ‘평가’를 전제조건으로 삼기 마련인데 우리들은 아직 많은 것들을 평가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 일어난 일이 가장 생생하게 다가오고 100년 전에 일어난 일은 그 시간적 거리만큼 모호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말은 너무 순진한 시간관념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어제 정부가 발표한 연금개혁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뉴스 헤드라인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표현이나,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블랙박스에서 방정식의 해를 구하듯이 찍어낸 답이 아닌 꽤 긴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 답을 구하는 과정은 약 한 세기 전의 사건인 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러시아 혁명이 기여한 바를 논하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솔직한 심정으로, 책에서 ‘재평가’하려고 했던 많은 것들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나의 고백 때문이다. 아서 케스틀러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는 전혀 없었고, 이스라엘의 6일 전쟁에 대해서도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거의 아는 바가 없었으며, 토니 블레어의 집권 과정에 대해서도, 그 많은 문헌에서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어떻게 ‘사회민주주의’를 배신했는지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지만, 저자가 보여준 것만큼 명쾌한 답을 듣지 못했었다. 때문에 저자의 재평가가, 순전히 나의 잘못으로 인해, 단지 그 문제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만이 아닌, 유일한 준거점을 필자에게 제공해 준 대목들이 많은 것 같다. 이것들을 올바르게 ‘재평가’의 영역으로 돌려놓으려면 필자가 세계사 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이라는 부담감과 함께.
때문에 나의 책에 대한 평가도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부분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주제들 ―한나 아렌트나 에릭 홉스봄, 알베르 카뮈에 대한 평가, 쿠바 미사일 위기나 『유러피언 드림』에 대한 설명, 키신저의 『디플로매시 diplomacy』가 메테르니히를 어떤 인물로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 등―에 국한되는 것 같다. 그 제한된 범위에 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책이 그 두께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소설책처럼 항상 다음 페이지와 다음 문장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었으며, 저자가 절대로 쉬운 주제만을 다루거나 어떤 주제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접근하려는 마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어려워 보이는 퍼즐도 명료한 문체와 풍부한 지식 하에 과감히 풀어내려는 저자의 글은 너무 식상하거나 너무 비겁한 글쓰기로 작은 분노만을 자아낸 채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하는 흔한 신문 사설들과 너무 달라서 독자로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중학교 때,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신문 사설을 참고해서 보라는 국어 교사의 말을 듣고 열심히 사설을 읽었으나 몇 가지 기본적인 논조와 주제 위에 다양한 사건들이 단지 ‘접목’된다는 사실에 좌절했던 청소년기의 필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생생하다). 사실 명료함에 대한 감동은 필자의 글쓰기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분명히 더 확실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그만큼의 지명도도 전혀 확보하지 않았으면서 온갖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글을 애매모호하게 흐렸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한 반성이었고, 그런 글이 습관이 되어서 문제를 꿰뚫는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에 이른 상황에 대한 반성이었다. 나에게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부분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알튀세르와 그 조수들은 알튀세르의 작업을 마르크스의 ‘징후 읽기’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마르크스에게서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무시했다는 얘기다. 이들은 마르크스가 말하거나 뜻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침묵’을 해석했고 그로써 자신들이 상상한 것에 실체를 부여했다. 알튀세르와 그 수하들이 이를 과학이라고 불렀다. 이 과학은 격자처럼 모든 사회 현상에 적용될 수 있다. (p.164)
에릭 홉스봄은 단연코 규율의 인간으로 그 자신의 표현대로 하자면 ‘토리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 지식인들은 결코 ‘문화적 반대자들’이 아니었다. 포스트를 갖다 붙인post-anything 온갖 방종한 ‘좌파사상’에 대한 홉스봄의 경멸은 레닌주의의 오랜 전통 속에 있다. 그러나 홉스봄의 경우 다른 전통도 발견된다. 홉스봄은 대처리즘을 ‘하층 중간계급의 아나키즘’이라고 멸시하면서 두 가지 저주를 적절히 결합했다. 하나는 통제 없는 무질서한 방종을 혐오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래된 성향이며, 다른 하나는 교양 없고 사회적으로 불안정하거나 경제적으로는 열의가 강한 사무원과 판매원의 서비스 계층을 멸시하는 영국 행정 엘리트의 한층 더 오래된 성향이다. 요컨대 에릭 홉스봄은 자기 계급의 확신과 편견을 모조리 갖춘 보수적인 거물 공산주의자다. (p.181)
오늘날 현대 사회에는 굳은 합의가 있다. 널리 인정된 도덕적 나침반이 없을 뿐 아니라 공통의 선악 관념이 효력을 발할 수 있는 공적 공간에 대한 전망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공동의 ‘운명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너무나 자주 출신 공동체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느낀다. 이는 민족주의와 ‘다문화주의’가 똑같이 범하기 쉬운 잘못이다. 그러나 교황(요한 바오로 2세)은 그답게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태생과 걸어온 길을 보면 교황은 민주주의 체제를 사실상 경험하지 못했으며, ‘영혼 없는 자본주의’를 ‘이기적인 자유주의’와 융합하는 데 탐닉했는데 그러면서 보여 준 방식은 교황이 개방된 사회의 복잡성과 비용에 무감했음을 암시한다. (p. 219)
우리는 기억해야만 하는 대상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나 그 대상의 복제품을 공식적으로 세우면서 추가적인 망각의 위험을 무릅쓴다. 상징이나 유물로 전체를 대표하게 해놓고 안심하고 환상에 빠지는 것이다. 제임스 영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기억에 기념비적인 형태를 부여한 뒤로는 기억해야 할 의무를 어느 정도 벗어던졌다. ……우리의 기념 건축물이 언제나 그곳에 있어서 우리를 일깨우리라는 환상에 빠져 그것들에 작별을 고하고 편리할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다. (P.267)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은 행동을 정당화할 변명을 모조리 빼앗긴 채 가장 오래된 주장에 점차 푸념하듯 의지한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이며, 그래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암암리에 반유대주의적이라는 이 고발은 이스라엘과 미국에서는 이스라엘이 낼 수 있는 최상의 패로 여겨진다. 최근 몇 년간 이 방법이 좀 더 집요하고 공격적으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이 유일하게 남은 패이기 때문이다. (p.374)
토니 주트가 되돌아보려는 지식인들의 행보, 역사적 사건들과 특정 국가의 행동들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것들을 제대로 곱씹어보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지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정확히 인식하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다. 저자가 굳이 ‘재평가’를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가 20세기를 ‘잊힌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20세기에 대한 상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상이 파편적으로만 존재해서 아전인수격 해석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거나, 정말 중요한 파편들의 실종이 방관될 위험에 놓였기 때문일 것이다. 종합적 이해(그것을 내러티브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를 가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이 불필요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역사 인식에서 너무 많은 틈을 당연시할 경우 그 틈새로는 해로운 것들이 슬며시 들어오기 쉽다. 제일 가까운 곳에서 예시를 찾아보자.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각자에게 유리한 역사적 해석을 만들어놓고 진실 공방을 하자는 동북아시아의 역사 전쟁에서 한국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고려할 때 ―물론 무조건 한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사를 둘러싼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20세기의 침략전쟁사에서 방기하는 ‘빈 틈’들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한국의 입장에서 잠시나마 생각해본다면, 역사 인식의 현재적 중요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틈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빈틈에 ‘해로운 것’들이 들어오는 것도 틈을 채워나가는 방법이다), 저자는 그것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사르트르와 대비해서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 에드워드 사이드를 칭찬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평화주의적·비폭력주의적 성향 때문이고, 그가 19세기와 20세기를 풍미한 여러 사상들과 사회 개혁들, 정치적 시도들에 주목하는 것은 오늘날 다시 불거지고 있는 사회 문제들의 해답과 문제들에 대한 ‘잘못된 교정법’을 교정할 근거를 찾기 위함이다. 때문에 각자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찾아 채워야 할 틈에 맞는 파편은 서로 다를지라도, 그것들이 단순한 ‘퍼즐 맞추기’ 이상의 함의가 있음이 분명해진다.
평소에 역사 서술과 역사 교육 등에 관해 꾸준한 관심을 작품에서 표현한 포르투갈 문학인 사라마구는 역사 교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도플갱어』에서 역사를 ‘앞에서 뒤로’ 가르칠지, ‘뒤에서 앞으로’ 가르칠지, 즉 과거로부터 현재로 오는 일반적인 흐름을 따를지, 최근의 일부터 짚어나가는 역발상을 택할지에 대한 논의를 보여준 적이 있다. 책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 논의는 아니지만, 역사를 거꾸로 가르치는 것은 단순한 ‘역발상’이 아니라 바로 직전 세기의 기억을 다양한 이유로 가장 흐릿하게 소유한 21세기 현대인들을 위해서라면 저자 토니 주트도 동의할 교습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이도 직전 세기에 관해 역시 자신이 없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필자는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기는 늦었지만 스스로에게 조금씩 역사를 가르칠 때만큼은 이 점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겠다. 자꾸 시작점에서부터 긁어 올라오려고만 하지 말고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서 정작 놓치고 있었던 것은 없는지 훑어보는 노력 말이다. 이 책이 그런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