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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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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릴 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손에 꼽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큰 여운을 주었던 이야기를 뽑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비밀스러운 행동 끝에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버린 좀머씨는 등장부터 죽음까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여러 번 읽을 때마다 좀머씨는 나에게 다른 인물로 다가왔다. 이해 불가능한 신사에서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으로, 자신이 겉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하는 가련한 영혼의 모습으로도 다가왔다. 나에게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 파트리크 쥐스킨트 본인도 꽤나 신비에 싸인 작가였다. 그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낸 것은 그의 향수가 영화화되고 나서였다. 이 소설 또한 매우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왔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최근에야 읽게 되었다.

 

우연히도 최근 공간에 대한 나의 끝없는 관심과 새로운 탐구가 냄새를 주제로 한 이 소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지금까지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 지금이 향수를 읽기 적기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인공 그루누이가 가장 완벽한 향기를 찾기 위해 필요한 냄새들을 모조리 빨아들이듯, 이야기도 내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흡수될 수 있었다.

 

필자는 향수를 읽고 나서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는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에 대한 성찰이고 두 번째는 그루누이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듯이, ‘후각의 가면무도회를 벌이는 인간의 모습이다.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에 대한 생각은 그루누이가 후각을 사용하는 방식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시각과의 비교과정에서 나왔던 것 같다. 우리는 보통 시각을 이용해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인지하며 이를 근거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의 손실은 여러 이야기들에서 인물이 겪는 불행 혹은 제약의 단골소재 시각의 손실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는 불행도 있겠지만 시각의 손실 혹은 제약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로 등장한다. 우리는 마음의 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남과 진정한 인간관계를 쌓는 데 필요한 자세도 시각에 비유하고, 깨달음의 순간도 의 이미지와 개안의 비유를 이용해 표현한다. 즉 우리의 지각은 시각에 편향되어 있다. 하지만 그루누이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은 그의 탁월하게 예민한 후각이다. 그의 후각은 시각보다 더 선명하며, 더 잘 기억되고, 더 분별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후각으로 단순히 구별을 하거나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후각의 아카이브를 만들어놓는다. 후각 기억의 크기는 파리라는 대도시만큼 거대한 정보를 통째로 저장하고도 거뜬하다. 그리고 우리가 시각으로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듯이, 그는 기존에 맡았던 냄새들을 새로 조합하면서 내면에서 새로운 냄새를 만들어낼 능력도 갖추었다. 오늘날 청각이나 시각적 정보를 디지털화하듯이 후각 정보를 디지털화한다면(물론 그루누이의 작업이 디지털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냄새간의 합성이나 변형이 더 용이하겠지만, 그루누이는 오직 천재적인 후각으로 이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후각은 시각으로 인지하는 세계와는 다른 공간감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 같다. 후각은 그에게 같은 지점을 수많은 다른 공간으로 변형시켜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주고, 그의 후각이 닿는 한 공간과의 거리를 앞당겨준다. 그가 냄새를 맡는 동안 모든 것은 그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은 자신만만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거리 좁힘에서 나오는 것이다(이는 천리안을 가진 채 세상을 관망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지만, 천리안도 투시(透視)가 불가능한 반면, 그루누이의 후각은 냄새의 발생 원인을 모두 지목할 수 있으므로 굳이 투시기능 없이도 꿰뚫는 능력이 있다). 시각은 시선의 제약을 받지만 냄새는 직선적으로 퍼져나가지 않고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에 그루누이의 공간 인식은 직선적이라기보다는 그를 중심으로 둘러싸는형태로 표현된다. 이 지점 또한 후각의 고유한 특성과 관련이 깊은 부분이다. 작가가 본래 후각이 예민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상상력에서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라면 독자로서 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후각의 가면무도회에 대한 것이다. 동물이 후각을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하듯이 사람도 무의식중에 후각적 신호를 이용한다는 점은 과학자들이 열심히 밝히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일반적으로 알려진 성과도 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 사람이 내뿜는 향기로 그의 죄목까지 망각하고, 그를 환희에 차서 받드는장면에서, 또 그루누이가 다양한 상황에 걸맞는 체취의 향수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장면에서 나는 그가 하나의 가면무도회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본질을 따지고 들자면, 우리는 일생동안 가면무도회를 하며 살아간다. 모든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작가가 그루누이의 기괴한 가면무도회를 통해서 삶의 이런 면을 상기시켜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오히려 후각 뿐만 아니라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는 모습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우스워 보이지는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스스로가 이런 가면 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 다소 씁쓸했다.

 

그루누이의 가면무도회를 좀 더 거시적으로 생각해보자면(그는 그리고 그것을 정말 크게한 번 이용했다), 거짓일지도 모르는 정보에 너무나도 쉽게(혹은 자연스럽게) 판단을 내려버리고 모여 있는 자들의 광기가 재고의 여지없이 확산되는 무서운 광경을 읽어낼 수 있다. 필자가 다수로 모여 있는 사람들광기혹은 우매함등을 연결 짓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지만 다수가 그렇다고 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광기가 현실에서 여러 번 관찰되는 것은 그리고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필자를 포함한 다수가 여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사실이다. 이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하면서도 너무 쉽게 말려들게 되는 것을 보면 이런 맹목에 어쩔 수 없는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힘겹게 억누르며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마저 든다.

    

마지막으로 이런 맥락에서 향수를 다 읽어갈 때 쯤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이승열의 가면이었다. 나는 그루누이의 모습과 가면의 내용에서 일맥상통하는 모습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그루누이의 마지막이 뒷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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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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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분량이 상당해서 언제 한번 읽어보나 했는데 합본을 절반 가까운 가격에 구매할 기회가 생겨서 드디어 읽어보게 되었네요. 합본으로 사는 것이 각각 나누어진 책을 사는 것보다 경제적이기는 한데 여러 분들이 지적해주신대로 휴대성은 매우 나쁘고요 책 자체가 읽기에 부담스러운 크기입니다. 어릴 때 열광했던 해리포터 시리즈의 원서도 이정도로 부담스러운 형태의 제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 합본은 소장가치는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읽기'에는 부적절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을 일부러 한 개 감점했습니다(내용만으로 본다면 당연히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습니다만).

 

책의 내용을 논리정연하게 요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겠습니다. 저자가 처음부터 그것이 가능하게 책을 쓰지도 않았고,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탄탄한 전개'를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에서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야기는 산만하다고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산만하고, 개연성은 전혀 없으며 '지금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고 황당함에 소리치게 되는 대목도 있기 마련입니다. 판타지나 SF 소설의 열렬한 팬이 아니다보니 어떤 부분은 힘겹게 페이지를 넘겨갈 만큼 지루하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내용 전반에 흐르고 있는 우습지만 씁쓸한 풍자를 읽어내는 맛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건들,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의 대사와 사건 전개, 변덕스러움과 황당함.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이 아니었던가요? 그렇기 때문에 복잡해보이는 이름들만 제외하면 이런 이야기들이 별 거부감 없이 독자에게 다가오는 것 아닐까요? 소설 속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절대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만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소설 속의 시공간마저 뒤틀린 '저자의 우주'보다 더 심사 뒤틀린 사람들이 더욱 황당한 일을 벌이고 있는 곳이 '우리의 우주'일텐데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어느새 주인공들이 겪는 황당한 모험들이 어쩌면 이미지를 조금 왜곡해서 보여줄지는 몰라도, 그 본질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고요.

 

정리하면, 부조리한 현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에 지치신 분들이라면 잠시 상식이란게 원래 불가능하고 부조리함의 기준조차 세울 수 없는 은하계 이야기 속에서 잠시나마 웃고, 현실의 무게도 조금 덜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오늘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끊임없이 재탕하는 수많은 모티프들의 원천을 찾으려는 호기심에서 이 책을 읽는 것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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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쟁탈전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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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중 한명인 에릭 홉스봄은 역사론에서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그의 태도만큼이나 분명한 역사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매우 간단하다. “있었던 일은 있었던 것으로, 없었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그 이상의 논의는 죄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줄일 수 있겠다. 물론 아직 미확인으로 밝혀진 사실들이 무수히 많은 것은 그도 인정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결과 자체가 영원히 미확인 상태일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한 적이 있고, 조선은 유럽의 30년 전쟁에 개입한 바가 없다(물론 유능한 사학자가 이에 대한 반론을 펼칠 증거를 가지고 나오기 전까지). 조선이 30년 전쟁에 어떤 시각에서 보면 개입하였고, 어떤 시각에서 보면 관계가 없다는 설명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것 같아도 사실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미묘한 문제로 접근해보자. 확정적인 결과가 아닌 과정의 문제이자, 하나의 결과로 가는 수많은 과정들의 존재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 정조는 분명히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가 암살당한 것인지, 다른 이유로 죽은 것인지를 두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의 27명의 왕 중 누군가는 동성애자였을 수 있지만 실록에는 이를 확증하는 기록이 없다. 하지만 27명의 왕 중 누구도 가공의 인물은 아니다. 리스본 쟁탈전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714년부터 1147년까지 리스본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고, 알폰소 1세가 리스본을 쟁탈한 것은 분명한데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슬람 세력이 물러났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을 수밖에 없다. 1000여 년 전 이야기를 사진 찍듯이, 영화 한 편을 보듯이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불명확한일들에 대해 도전적일만큼 단호한 설명을 제공하는 정사(正史)’를 듣고 배운다. 그 누구도 기록된 역사들이 모두 진실만을 담았다고 믿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정사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모든 종류의 창작물의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정사에서 배가 10척이라고 했으면 드라마에서도 배가 10척이어야 만족스러운 것이다. 때문에 역사가도 아닌 한낱 교정자가 리스본 공성전에서 십자군의 도움을 한 펜에부정해버리는 일은, 소설에 묘사된 긴장감 그대로,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당혹스러운 일이 수습되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서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사라마구의 소설이 항상 이런 식이다. 한 가지만 뒤틀어도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끼는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신기한 것은, 실바가 충동적인 실수(?)로 새로 쓰게 된 리스본 쟁탈전의 역사 속에는 그의 상상력이 개입할 빈 공간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의 상상력이 더해져 비로소 사람들이 살아갔던 장면의 이야기로 거듭났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가 보여준 이야기는 알폰소 1세의 영광스러운 영웅담이 아니라 기사의 첩으로 전쟁터에 딸려온 한 여성과 전쟁에 참여한 한 병사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이야기이다. 이들이 실존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이들은 다른 수많은 이름으로, 하지만 같은 처지로 전쟁에 휘말린 많은 이들을 대변할 뿐이다. 그들이 보는 전쟁터는 온갖 구질구질한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대의를 위해서 하나로 뭉치고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해 목숨 걸고 싸우는 결의에 찬 병사들만 있을 것 같은 전장에는 이해관계를 놓고 교묘한 수를 주고받는 지도자층과 순간의 실수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생명들, 그 와중에도 다양한 욕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혼들이 있고, 봉급이 밀리자 충성심도 거둘 준비가 되어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군대와, 공명심에 눈이 멀어 파멸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기사도 있다. 사실 이 전쟁을 종결하는 가장 큰 힘은 저자의 설정에 따르면 리스본 성이 포위를 버틸 수 없게 만든 기근인데, ‘신의 뜻이든 인간의 뜻이든,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뜻이 위대하게 집행되었다는 결론보다는 훨씬 개연성 있는 전개일 것이다.

 

물론 라이문두 실바가 채워 넣은 빈 공간이 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는가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면, 역사는 주로 승리자의 시각에서 기록된다는, 진부하지만 자주 망각되는 사실을, 그리고 승리자중에서도 승리자 집단의 지배분파를 중심으로 작성될 뿐, ‘승리 호에 탑승한 수많은 선원들의 이야기는 기억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라이문두 실바가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면 결코 보려고 하지도 않았을 세밀한 삶의 현장들은 그가 스스로를 제대로 된 고등교육도 받지 않은 평범한 교정자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바로 그 위치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꼼꼼하게 보았기 때문에 비로소 역사책의 한 귀퉁이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들은 아마 사료에 의해 뒷받침될 수도 없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서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고증이 불가능하고, 그것을 역사라는 무거운 이름 속에 포함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그것들을 계속 사소한 문제로 치부할 경우 필자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똑같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남겨지지 않고 우리는 영원한 망각 속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설사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슬픈 일 아니겠는가? 역시 평범하여 영원한 망각 행 열차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는 실바 씨가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상상 속에서 역사책속으로 끄집어내어 한 줄이라도 더 기억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 그것이 내가 그의 지루해 보이는 집필 작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책에는 실바 씨의 책이 성공을 거두었는지, 심지어 제대로 출판되기는 했는지 그 결말이 나와 있지는 않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우리의 교정자는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전해줄지도 모르는 책을 찾기 이전에 자신의 삶을 바꾸어 줄 사랑을 찾았고, 이야기 역시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책의 집필을 마쳤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끝난다. 어쩌면 새로 쓴 리스본 쟁탈전은 나오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실바 씨가 블로그 등을 통해 누구나 부담 없이 글 한편을 써낼 수 있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서 결말이 열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채널이 더 많이 주어진 요즘에도 라이문두 실바가 소설 속에서 행한 것과 유사한 가치를 지닌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 사실 책의 성공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의 작은 모험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들 우리가 지금까지 익히 들어 왔던 역사 이야기가 가지고 있었던 빈틈, 역사적 사실을 남에게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생경한 일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받아들이고, 또 써나갈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내 주위에서 실바와 같은 시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재미있는 사람을 친한 지인으로 둘 만큼 내가 운이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가까이하며 응원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가 쓰는 이야기는 우리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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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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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살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정확한 설명은 불가능하죠, 모든 것이 마치, 단순히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간 것 같은 거죠, 혹은 들어간 것일 수도, , 혹은 들어간 것일 수도 있죠,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p.283

 

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 ‘에게 있어서는 스스로의 마지막이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지만 타자의 마지막, 즉 타자의 죽음은 이미 살아 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나아가서 인간이 살고 죽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책 제목을 보고 이름의 의미에 집중하면서 이번 책을 읽기 시작했던 나는, 책장을 다 덮을 무렵에는 위와 같은 물음들로 무거워진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친 채 결말로 나아가고 있었다. 사라마구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의 결핍이 이번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그것의 결핍 상황이 독자가 고려해야 할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책에서는 주인공 주제 씨를 제외한 그 누구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직장에서의 직함이나 주제 씨와의 관계, 혹은 일반적인 명사로 불릴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유일하게 이름을 가지고 있는 주제 씨는 인생의 절반 넘는 기간을 살고도 별 볼일 없는 말단 등기소 보조 인력에 불과한 사람이므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는 주제만큼 중요한 사람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주제 씨가 살아가는 환경이 원래 남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 상황은 전혀 아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그의 직장인 등기소는 물론이며 그가 유명인들의 신상정보를 수집하는 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 여자를 찾는 여행의 종착점인 공동묘지의 묘비석까지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고 그 자체로 넌센스가 된다. 물론 이것들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덧없고, 말 그대로 넌센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제가 한 여인에게 집착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어쩌면 평범하게 흘러갈 주제의 일상을 바꾸어 놓은 것은 수많은 이름 중 하나가 기존의 분류체계에서 실수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고 우연히 그에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의미 없는 실수가 주제에게 다가와 호기심을 꽃피게해 주었고, 그의 호기심은 결국 소장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등기소 파일을 한 곳에 보관하는 대개혁을 추진하는 배경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대개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지금도 망설여지지만, 명백하게 기존 시스템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앞으로도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할 것 같은 실수를 덮어버리기 위해서 기존 분류체제를 비틀어버리고, 그 틈 사이로 이 실수를 집어넣겠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가 경외심으로 대해 마지않는 전통이 결국 공무원다운 결벽증 속에서 과감하게 포기되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결국 확실히 죽은 한 사람이 살아 있는 상태로 남게 되는 모순이 벌어지고, 이것이 더 큰 실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장과 주제 씨 둘만 침묵한다면 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이는 심지어 새로운 분류체계의 진정한 을 아는 이는없을 것이다.

 

기이한 상황이 공동묘지에서도 벌어진다. 자살한 사람들이 묻힌 땅의 묘비명을 기표라고 한다면 그 어떤 기표도 제대로 된 기의’, 즉 무덤 주인을 가리키지 못한다. 이를 두고 양치기는 자살한 사람은 더 이상 성가심을 받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묘비석을 이리 저리 옮겼다는 황당한 답변만을 주지만 악취미에 가까운 농담 속에서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공동묘지에서는 누구나 눈앞에 거짓을 보고 있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한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불분명하게 말을 흐려버리게 된 등기소와 무덤 주인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버린 공동묘지. 둘은 명목상으로는 엄밀한 규칙 하에 자신들이 맡은 신상정보를 관리하지만 결국 그 관리 시스템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들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제대로 기능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그것들이 진실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지금까지 읽었던 사라마구의 소설 중 가장 난해하다고 할 만큼 이번 작품은 읽고 질문만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어렴풋이 전해져오는 경험들이 있다. 수많은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하는 작업을 할 때, 각 이름표들이 현실에서 의미하는 모든 것은 활자들 너머로 사라져버리고 눈앞에서 보기 좋은 이진법 덩어리로만 남아 편집자의 가벼운편집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작업들.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명단표를 보는 순간 표의 한 칸을 차지하는 이름들에 불과해버렸던 사람들. 이런 경험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관이 있다고 말하기는 아직 생각이 충분히 닿지 못했지만 읽는 내내 그런 광경들이 연상되었다는 점이 다음 생각의 실마리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삶의 경험이 누적되고 한두번 더 읽어보면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P.S. 원제는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가 아니지만 전작들의 인기를 위해 출판사에서 고른 제목이 아마도 이렇게 나왔나보다(영어판 제목은 ‘All the Names’이다). 내용을 읽어 보면 그렇게 어색한 제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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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뗏목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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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읽기의 세 번째 주인공은 돌뗏목이었다.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표류하는 기발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그린 이 소설도 다른 작가의 소설들처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가 갈라질 무렵 기이한 일을 겪은 주제 아나이수, 조아나 카르다, 조아킴 사사, 페드로 오르세는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되고 떨어져나간 이베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여정에 오른다. 여정 도중에는 훗날 콘스탄테라고 이름 붙은 커다란 검은 개와 말 두필 말 두 필이 본격적으로 합류하기 전에는 말 두필이라는 뜻을 가진 되셰보(deux chevaux) 자동차가 이들의 여정을 가능케 하는 교통수단이었다도 함께한다. 같이 여행을 떠나면서 이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힌다. 이들 중 새로운 커플들이 탄생하고, 영원할 것 같은 여행동무들 간의 갈등과 대립도 발생하고, 결국 오르세는 여정 도중에 생을 마감한다. 여행 초반에 잠깐 마주쳤던 당나귀를 끌고 다니는 노인 로케 로사노도 후반부에 여정에 합류하며 집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소 지루한 시골길 여정쯤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동안 세상이 뒤집힌다. 떨어져나간 이베리아 반도와 거북이 머리를 바다로 보낸 유럽은 물론이고 이 역사적인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기위해 골머리를 앓는 모두에게 있어서.

 

소설의 분위기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도입부가 대부분 그렇다는 지적도 있지만, 묵시록적인 느낌을 물씬 준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찌르레기떼의 출현과 목소리를 잃어버렸던 개들의 부르짖음,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는 남자. 무심결에 그어 버린 선이 문자 그대로 공간의 단절시대의 단절을 예고해버린 여자까지. 그 중 압권은 기계로도 감지하지 못한 땅의 진동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페드로 오르세가 아닐까 싶다. 다른 이들은 일회적으로 기이한 일을 겪지만 오르세 노인은 죽기 직전까지 반도의 이동을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여생과 반도의 이동이 궤를 같이할 것이라는 암시는 소설 곳곳에 나와 있다고 봐도 좋다. 꼭 그의 종말이 아니더라도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의 분리가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은 소설 곳곳에 나와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었을 때 오르세가 이 여정을 끝으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복선이 주어질 뿐이다. 그가 지옥에서 왔다고 표현할 만큼 검은 개 콘스탄테와 짝을 이루어 여행을 떠난다는 점, 그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반도가 움직이고 삶이 뒤바뀌는 상황에서의 과도기적 지혜를 보여주지만, 일단 이 상황이 종료되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경우 그와 같은 사람들의 자리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러한 복선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반도의 이동은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동무를 만나는 계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 계기가(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여성들이 임신한다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이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 가까운 미래에 태어나는 계기가, 어떤 이에게는 흔히 여정으로 비유되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마무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움은 반도와 유럽을 격렬하게 뒤흔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은 자리를 잡아간다. 사라마구는 다른 소설에서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시간이 충분한 지물었다. 오르세에게는 어쩌면 남은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이번에는 운 좋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분명히 땅덩어리가 떨어져나가는 상황은 당사자들에게는 물론이고 독자들에게도 비극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사라마구가 이 상황을 묘사하는 과정은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독자들은 어쩌면 이미 결말이 낙관적일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 위에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반도의 이동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사실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일어났던 이베리아 반도 내의 정치적 혼란부터 우리도 이베리아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럽 대륙 내부의 정치적 혼란까지,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지켜보듯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읽어나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언제 세상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은 이런 정치적 투쟁의 상황의 의미와 이를 묘사함으로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고민할 여유를 빼앗을 것 같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결말은 열려 있으며, 낙관적이라고 봐도 좋을 만한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씁쓸함은 줄어들고, 새로운 시대에서 사람들은 어찌어찌 적응해서 잘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볼 수 있는 결말이었다. 혼란스러움이 있었고, 한 시대가 지나갔지만 우리네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결론. 옮긴이도 후기에서 이런 사라마구의 낙관에 주목하고 있다. 이 낙관이 소설의 긴장감을 다소 떨어뜨릴지는 몰라도 점점 찾기 힘든 세상에 대한 희망을 비록 우리 세상이 변화하는 정도를 넘어서 완전히 뒤집어질만한 상황으로 치닫는다고 하더라도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보다는 절망과 좌절, 때로는 환멸감마저 점점 더 자주 경험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는 막연하고, 막연하기에 더 마음 놓고 바랄 수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말을 누구한테든,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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