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32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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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받지 않을만큼

손님을 대접하는 데 인심이 후하고 마음씨가 넓은 사람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답례받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만큼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인심이 후한) 사람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증여론의 맨 처음에 나오는 이 북유럽 고대 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모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일상생활에서, 일방적으로 주거나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유지되기 힘들다. 아무리 조그만 호의나 선물이라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받고도 되갚지 않는 행위는 마음 한 구석의 부담감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렇게 늘 겪는 일상적인 감정과 상식적인 규범이 낯설지 않다면, 저자의 글이 어렵게 느껴질 이유는 전혀 없다. 저자가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이 현대 문명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과거 인류의 모습을 간직한 문명이라서 그들의 모습이 낯설게 보일지 몰라도, 그들이 규범으로 삼는 증여의 행위와 그 원리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현대인의 눈으로만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오류가 생길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필자가 증여론의 원문을 읽기 전에 가졌던 것이기도 하고, 증여론의 내용을 대학교 입시 논술 준비 과정에서 한 토막의 지문 정도로 접한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오류일지도 모른다(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대학교 입시과정에서 현대경제학의 합리적 경제주체 가설이나 게임 이론과 같은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이러한 오류와 무관하지 않다).

 

 

모스가 이 논문을 통해 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은 본문에 앞서 정리되어 있다. 미개(未開) 또는 태고 유형의 사회에서 선물을 받았을 경우, 의무적으로 답례를 하게 하는 법이나 이해관계의 규칙은 무엇인가?”받은 물건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수증자(受贈者)는 답례를 하는 것인가?”가 바로 그 질문이다. 모스는 여러 부족들의 증여 행위 연구를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거나 또는 현대사회에 직접 선행하는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거래의 성질에 대해 고고학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계약과 판매의 근대적 형태와 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의 거래가 어떤 기능을 하였으며, 이 거래에서 작용하는 도덕과 경제를 검토하고, 이 도덕과 경제가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암암리에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했다. 때문에 증여론의 함의는 현재성을 가지고 실천적 함의를 띤 것으로 보는 것이 저자의 의도에 충실한 것이다. 때문에 저자가 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 이누이트,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 일부의 포틀래치(넓은 의미의 포틀래치로, 모스의 선행 연구자들이 포틀래치로 부르던 것과 쿨라 등의 유사 포틀래치를 포함하여) 문화를 탐색한 후 이와 유사한 것이 로마법이나 게르만법, 힌두법, 중국의 풍습 등에서도 발견되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민족들의 풍습에서 최근까지도 관찰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논의를 확장하는 것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매우 충실한 전개이다.

그렇다면 모스가 연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언가를 주고받는행위는 선물을 받을 의무와 그것을 받을 의무, 그리고 그것에 답례할 의무를 기반으로 하는 행위이며, 이것을 화폐사용 이전의 물물교환 행위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역시 1장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교환하는 것은 오로지 재화와 부, 동산과 부동산처럼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의, 향연, 의식(儀式), 군사적인 봉사, 여자, 어린이, , 축제, ()인데, 이러한 것들의 거래는 훨씬 더 일반적이며 훨씬 더 영속적인 계약의 계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또한 거기에서 부의 유통은 그러한 계약항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급부와 반대급부는 꽤 자발적인 형식 아래 선물·선사품으로 행해지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의무적이며, 그것을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싸움이 일어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전체적인 급부체계 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p.53)

 

 

때문에 물물교환을 통한 부족의 경제적 욕구 충족은 증여행위의 여러 결과 중 하나이며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행위가 부족 간의 전쟁을 막고 구성원들의 결속을 다지는 데 기여한다는, 외교적인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에 의해 직접 언급되지만 이 역시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포틀래치로 대표되는 증여행위는 후한 인심을 과시하고, 지배자의 권위와 지배의 정당함을 인정받기 위한 의식이기도 하며,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거나, 상대방의 지위 혹은 명예를 제압하기 위한 경쟁의 의식이기도 하다. 필자가 읽었던 포틀래치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포틀래치와 신용(信用)의 연관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예를 들면 퀴크(Cuq)는 아직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시 사회에서는 물물교환제도만이 보인다. 더욱 진보한 사회에서는 현금판매를 행한다. 신용판매는 고도의 문명단계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것은 맨 처음에는 현금판매와 대여를 조합한 간접적인 형태로 출현한다.”사실 출발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법학자와 경제학자가 흥미롭지 않은 것으로 제쳐놓고 있는 관습의 범주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증여, 특히 그 가장 오래된 형태, 즉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 전체적인 급부형태의 복합적인 현상인 증여이다.

그런데 증여는 필연적으로 신용 관념을 초래한다. 경제발전이 물물교환에서 판매로, 현금거래에서 신용거래로 이행한 것은 아니다. 주고 일정한 기한 후에 답례되는 증여체계위에, 한편으로는 이전에는 따로 떨어진 두 시기를 접근시키고 단순화하는 것에 의해 물물교환이 세워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매 현금매매와 신용매매와 대여가 세워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기술하고 있는 단계를 넘어선 어떠한 법(특히 바빌로니아법)도 우리 주위에 잔존하는 모든 고대사회가 알고 있는 신용을 몰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pp.137-138)

 

 

현재 파괴하거나 모두 나누어 줘버리는 재화는 낭비라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 보는 것이 좋다는 점과, 포틀래치 경제조직이 부족의 모든 성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가(원문에서는 자본이라고 서술되었지만, 이를 부(wealth)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현재 유통되고 있는 통화의 총량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포틀래치에서 신용 관념의 기능을 아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증여행위를 좀 더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원시사회에는 발달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되었던 관념들(예컨대 신용 관념)의 원천이 된다는 지적 이외에도 저자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각 부족들이 증여의 객체를 대하는 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증여의 객체가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이것은 경제제의 단순하지만 명료한 정의이기도 하다)’를 넘어서 (논의의 편의상 증여 대상을 물건으로 잠시 한정할 때), 대상 자체에 고유한 영혼이 존재한다든지, 대상이 증여자의 영혼이나 마음의 일부분을 수증자에게로 전달해준다는 생각인데, 이는 증여 행위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의사소통행위로 이해될 수 있고, 강하게 이야기하면 의사소통행위로 이해되어야만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증여 행위가 쌍방의 영적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모스가 앞에서 제기한 핵심 질문에 답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래서 책의 많은 부분이 증여 행위를 둘러싼 여러 부족 구성원들의 감정적 반응이나 감정상태의 변화, 증여행위가 그들에게 주는 의미에 할애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부분들이 증여론의 핵심만을 요약하다 보면 누락되기 쉽다. 하지만 증여 행위가 모스의 결론대로 보편적인 것이라면, 결국 오늘날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증여 대상이 되는 객체를 바라보는 관점과, 증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감정적 교류에 두는 비중 아니겠는가? 재화와 서비스를 이윤 창출을 위해 만들어지고 팔리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증여 행위가 사회의 윤리와 질서 유지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스가 역설한 훌륭한 지혜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모스도 이 지점을 결론에서 지적하였다.

 

 

 

이익이라는 말 자체는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서, 그것은 부기용어, 즉 장부에서 징수해야 할 지대 맞은편에 기재한 라틴어의 ‘interest’에서 유래한다. 가장 향락주의적인 고대 도덕에서도 추구되는 것은 행복과 쾌락이지 물질적인 효용이 아니다. 이득과 개인이라는 관념들이 널리 유포되고 원리의 수준으로까지 올라가려면 합리주의와 상업주의의 승리가 필요하였다. (중략) 고전적인 산스크리트로 저술했으며 우리의 이익 관념에 아주 가까운 아르타(artha)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들조차도 행위의 그밖의 여러 범주에 대해서 그랬던 바와 같이이익에 대해서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품고 있었다. 고대 인도의 성전들은 인간의 활동력을 법(dharma)·이익(artha)·욕망(kama)이라는 범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아르타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이익, 즉 왕, 브라만, 대신, 왕국, 각각의 카스트 등의 정치적인 이익을 가리킨다. 니티샤스트라(Nitiçastra, 정치론: 베다의 현실 사회생활에 관한 부분을 정리한 문헌. 처세술부터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에까지 이르고 있다-역자)라는 중요한 문헌은 경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민중 속에서도 또 엘리트 사이에서도 순수한 비합리적인 지출은 관행이 되어 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 귀족 계급에게 남아 있는 약간의 풍습을 특징짓고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우리 뒤에 있지 않고, 도덕적인 인간, 의무를 다하는 인간, 과학적인 인간, 이성적인 인간과 마찬가지로 우리 앞(미래-역자)에 있다.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이 계산기라는 복잡한 기계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pp.270-271)

 

 

다만, 10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오늘날은 모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이 더 철저히 경제동물(animal économique, economic animal)’이 된 상황에서 모스가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직도 이 끊임없는 비정한 공리적 타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이야기한 부분이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라고 보인다. 이제 인간은 계산기라는 복잡한 기계를 넘어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수월하게 해내기 힘든 고차원적인 연산 끝에 항상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걸어 다니는 슈퍼컴퓨터로 거듭나고 있고, 그런 인간들의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의사결정의 집합은 구성의 오류 없이 최적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아직도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런 인식이 이제 제법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주입되는 과정에서 모스가 의도한 증여행위의 포괄성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증여행위가 홉스적 상황에서 부족의 평화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게임상황에서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전략(tit for tat)의 예시 정도로 이해되는 안타까운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원인은 마땅히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겠으나 모스가 그토록 교정하고 싶어 했던 오류 증여를 물물교환과 동일시하며 포틀래치 축제가 시장의 기능을 했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가 개선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남아 있다(지나치게 증여를 경제적 행위로 본다는 점은 단순히 학교 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를 경제 동물로 만들어내는 사회적 분위기와 연관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오독을 피하고 모스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거나,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결국 증여행위의 전체적인 급부로서의 성격과, 감정적 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의사소통행위로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오류는 필자도 고등학교 때 단편적으로 증여론의 내용을 접하고, 그 후에도 해당 텍스트가 다소 부적절하게 인용되는 사례들을 보면서 가졌던 것인데, 이번 기회에 원문을 읽고 온라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평한 내용들을 보면서 다행이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이도, 모스가 이 논문에서 담고자 했던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폭 넓은, 더 실천적인 함의를 띠고 있었음을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바람은 결론의 마지막 단락에 잘 드러난 것 같다.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서 짧은 후기를 마친다.

 

 

 

이런 식으로 하면(아서왕의 원탁의 예시) 오늘날에도 국민들은 강하고 부유해지며 또 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 민중·계급·가족·개인은 부유해질 수는 있지만,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원탁의 기사들처럼 공동의 부() 주위에 앉을 수 있을 때뿐이다. 선과 행복이 무엇인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부과된 평화 속에, 공공을 위한 노동과 개인을 위한 노동이 교대로 일어나는 리듬 속에, 또한 축적된 다음 재분배되는 부 속에 그리고 교육이 가르치는 서로간의 존경과 서로 주고받는 후함 속에 있다.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총체적인 행동과 사회생활 전체를 연구할 수 있는가가 이해된다. 또한 어떻게 하면 이러한 구체적인 연구가 풍습의 과학 및 부분적인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결론, 아니 오히려 오늘날 일컬어지고 있는 바와 같은 예의(civilité)·’공민정신‘(civisime) 옛말을 다시 받아들이자면의 결론에도 이를 수 있는가가 이해된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심미적·도덕적·종교적·경제적인 다양한 동기들과 물질적·인구학적인 여러 요인들을 엿보고 평가하며 비교할 수 있다. 이 다양한 동기와 요인들의 합이 사회의 기초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동기와 요인들의 의식적인 괄 리가 최고의 기술, 즉 그말의 소크라테스적인 의미에서의 정치(Politique)이다. (pp.28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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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인주의 신화
이언 와트 지음, 이시연.강유나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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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명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의 주인공을 통해 살펴본 개인주의의 탄생과 정착 과정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도 존재한다. 3년 전에 내용 이해에 급급해 정신없이 텍스트를 읽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근대 개인주의 신화들을 하나하나 뜯어봄으로써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신화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신화로 굳어진 이야기는 후대에 널리 기억되며 회자되고, 만들어질 많은 이야기들의 뼈대가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원작들의 재창조나 수많은 이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파우스트, 돈 키호테, 돈 후안, 로빈슨 크루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형태가 조금씩 변형되어 여러 이야기 속에서 다시 살아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 영웅들의 모습은 닮고 싶은종류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 매력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매력은 영웅이라기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이 있기에 나오는 매력이며 매력적인 악당을 볼 때 느껴지는 공감대 같은 것이다. 어쩌면 영웅들의 모습을 현대인들은 이미 닮아 있기때문에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정수를 모아 놓은 인물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느끼는 것은 아킬레우스에게 무모함이 느껴지거나 오디세우스에게 소름끼치는 간교함이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우리가 상상하는(때로는 욕망하는)개인주의적 삶의 최고점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개인주의에 반대하며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나 반인륜적인 무엇으로 치부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개인주의는 그러한 오명들을 뒤집어쓴 채 배척받아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던 때가 있었고(우리 주인공들이 원작에서 맞이하는 운명을 기억해보자), 지금도 개인주의라는 말은 부정적인 맥락에서 더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현대인이 개인주의를 완전히 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달한 소유권적 개인주의든, 정치적인 개인주의든, 도덕적, 종교적 개인주의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다른 존재 양식과 사회적 삶의 양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지금보다 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잘 모르겠다. 이에 대해 답변하는 것은 확실히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다. 이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있다. 개인주의가 당연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 조건으로 인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들이 있다. 이를테면 사회를 송두리째 뒤집는 혁명 같은 것이다. 내 생각에, 혁명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모두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면서 이룰 수 있는 혁명은 없다. 때문에 누가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릴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은 진부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질문으로 다가온다. 그 무엇보다도 일단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만큼의 피를 흘릴 수 있겠는가?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져 봐도 선뜻 대답할 용기가 없음을 잘 알기에, 개인주의가 고착화될수록 기존에 알던 방식대로의 혁명은 점점 요원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른 방식의 혁명이 가능하다든지,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어떤 지점에서 다른 것으로 전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다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혁명 이외에도 개인주의를 전제할 때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것들은 많을 것이다. 그것들이 불가능해진 것이 다행스러운 일인지, 인류의 불행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필자의 능력이 충분히 닫지 않아 부족했지만, 개인주의에 대해 한 층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준 저자의 말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저자가 자신이 직접 고른 4명의 영웅들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개인주의의 영웅들이라고 보자면 우리는 그들을 매우 부정적이고,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종류의 개인주의자들로 보아야 한다. 물론 이들은 어떤 개인주의적 사고도 대놓고 선전하지 않는다. 또한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개인주의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단지 이들은 스스로 그것을 취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는 결국 끝이 좋으면 다 좋아 All’s Well That Ends Well』에 나오는 비천하고 반사회적인, 그러나 자신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악한 파롤스의 메시지와 같을 것이다. ‘나란 놈/단지 생겨먹은 대로 살아갈 것이다.’ 파우스트와 돈 후안과 로빈슨 크루소에게 신조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돈 키호테는, 그들과 한패가 아니고 또 그러려고도 하지 않겠지만, 그의 모토 역시 이것이 아니겠는가. (p.394 맺음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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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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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공화국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필자가 재학했던 당시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친숙한 것이다. 주입식 교육에서 이 우화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을 설명하는 우화 정도로만 해석되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주의깊게 생각해 볼 여유는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 이 우화가 좀 더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우의(알레고리)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문제에 대해 기존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설명을 제기한 책 중 필자가 가장 최근에 읽은 것은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이었다)과 더불어 동굴에 묶여 있는 자들과 우연히 바깥세상을 본 후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의 관계가 어떤 양상을 띨 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마침내 빛을 보게 된 사람의 미래는 과연 어떠한 것일지에 대한 생각 등은 이 우화를 주입당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억 저 편에서 동굴 이야기가 포르투갈의 최고 이야기꾼인 주제 사라마구에 의해 재탄생될 때, 위에서 이야기한 지점들은 독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동굴속에 담긴 동굴 이야기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마주한 인간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센터: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공간

동굴의 줄거리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프리아노 알고르(이하에서는 간편하게 줄이기 위해 알고르라는 성으로 부르겠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자기를 굽는 도공인데, 어느 날 센터로부터 더 이상 도자기를 납품하지 말 것을 통보받는다. 졸지에 실업자가 될 위기에 처한 알고르는 딸 마르타와 함께 도자기 인형을 새로 만들어서 센터에 납품하는 모험을 강행한다. 한편 알고르의 사위 마르살 가초는 센터의 2급경비원으로 근무하며 곧 입주경비원으로 승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상주경비원이 되면 아내와 장인을 모시고 센터 내의 아파트로 입주할 계획을 세운다. 센터에서는 도자기 인형을 시험 삼아 납품할 것을 제의하고 알고르 부녀는 열심히 인형을 만들지만, 시장 반응이 좋지 않아 시제품만 거래하겠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 동안 마르살은 승진하고, 계획대로 주인공 가족은 센터에 입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 지하 공사 중에 플라톤의 우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동굴이 발견되고 이를 본 알고르와 마르살은 동굴 속에 결박된 채로 발견된 해골들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고 센터를 떠난다. 센터에서는 이를 플라톤의 동굴관광상품으로 써먹는다. 센터 지하에서 동굴이 발견되는 반전 이전의 내용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그 밖에 속하던 사람에게 주는 영향을 알고르의 삶이 변화하는 방식을 통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장인으로서 소규모 가내수공업을 이어가던 알고르는 플라스틱 식기류를 만드는 경쟁사업체와 애시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고객들의 취향도 그의 편이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형을 만들지만, 역시 그 인형도 시장에서 충분한 반응을 얻지 못하고 센터에서 퇴출될 운명이다. 한편 사위 마르살 가초는 센터의 임시직 노동자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로 승진하지만 그의 계급적 위치가 알고르보다 더 낫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자본주의적 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된 존재이며, 그렇지 못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빠듯한 생활을 해 나가야 함은 변함없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승진의 대가가 객관적으로 봐도 만족하기 힘든 수준의 비좁은 주거지 물론 센터 내의 아파트는 오늘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그것들과 소름끼칠만큼 닮아 있지만라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센터는 센터가 운영하는 여러 시설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도시 안의 도시지만 오히려 도시를 능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상한 공간이다. 이는 센터가 근대 자본주의적 도시의 핵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초자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도시를 초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무한해 보이는 센터 공간도 막상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배분하기에는 희소성의 원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공간일 뿐이다. 희소성의 원칙을 진리 삼아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현실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으며, 그 제약을 스스로 허물어가면서 자신을 유지하는 현대 경제학과 시장경제체제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살은 센터가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물리적이든, 영향력의 측면이든) 넓혀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 모습,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문자 그대로 지구촌 끝까지퍼져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알고르가 직접 그 단어를 쓰면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센터가 이윤 추구의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다(구매차장이나 구매부장과의 대화에서도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아무리 무심한 독자라도 센터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따로 뗴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상징적 공간을 잘 그려내었다.

 

센터 밖: 인간성이 남아 있는 공간

알고르 일가와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생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센터 밖의 공간은 인간미가 상실된 센터와 달리 인간의 희노애락과 우정, 연민,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체계를 거부하면서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고집센 시프리아노 알고르와 같은 사람도 있고, 센터에서는 이미 금지된 애완동물 키우기에 관심을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가정을 꾸리고 이웃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낭만적인 생활은 결코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한다. 물건을 실은 테러를 판자촌 사람들이 약탈하는 장면에서 물질적인 고통이 점차 인간성을 파괴하는 현장을, 강요된 것 같은 악이 선한 미덕을 조금씩 삼켜버리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단순히 트럭 서리를 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트럭이 불타는 광경에 이르러서 알고르는 각성을 시작한다. 그것이 고의적으로 불태워짐으로써 공권력이 본격적으로 주변적인인물들의 삶에 개입할 빌미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각성의 시작이다. 실제로 이러한 의심이 타당한 것이었는지 소설에서 명시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지만 독자들은 현실에서 이러한 종류의 공작이 무수히 많이 일어나왔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때문에 알고르는 편집증 환자가 아니라 현실에 눈을 뜨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고 나니 몹시 피곤해졌다. 정신을 혹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갑자기 눈에 보였기 때문에. 세상에 거짓이 얼마나 많은지. 어딘가에 진실이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진실은 계속 변한다. 그리고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이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혹시 그럴듯한 거짓말은 아닌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한다. (p.117)

 

센터 밖의 공간이 센터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을 가진 곳으로, 혹은 센터가 센터 밖의 세상과 대립되는 곳으로 정의되는 것이 꼭 타당한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러한 두 공간의 대립으로만 끝난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갈등이나, 갈등의 비극적 결말이 부각되었다면 소설의 문제의식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센터 내의 동굴이 등장하면서 반전이 일어나고, 주인공의 운명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게 된다(사실 인형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장인으로서의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다가 좌절하는 알고르의 모습은, 몇 가지 조건만 바뀐다면, 그대로 독 짓는 늙은이처럼 가마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결말을 맞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했었다).

 

동굴: 깨달음, 그리고 탈출의 계기

알고르가 자신의 호기심을 못이기고 사위의 일터로 달려가 발견한 것은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서 봤던 광경이자, 일전에 가마에서 꾼 꿈에서 봤던 기이한 광경이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조상들이 진짜 의자에 다리와 시선이(목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묶인 채, 해골이 되어버린 광경이며, 뒤편으로는 설화에 나온 경사로와 모닥불을 피운 흔적까지 있는 것이다. 탈출을 감행하기로 한 사람들, 센터의 삶에 아직 완전히 젖어들지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 광경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알고르의 말에 즉각적으로 공감한다. 마치 알고르가 사과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봤을 때, 사과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처럼. 독자 입장에서 알고르가 처음에 동굴을 발견하였던 장면보다 더 전율을 느꼈던 것은 주인공들이 모두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이토록 빠르게 동의하고 센터를 벗어나려고 했다는 점이다. ‘동굴의 우화가 비극으로 끝날 여지가 다분했던 이유는, 처음에 빛을 목격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할 수 있기 때문인데, 직접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알고르의 이야기에 마치 같이 빛을 본 것처럼 행동하는 소설의 전개는 이 지점을 고려할 때 다분히 의도적이다. 사라마구가 우리 인간의 가능성을 믿기에, 비록 그것이 열린 결말일 지라도, 낙관에 좀 더 힘을 실어주려 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동굴의 대발견을 맞이하는 알고르의 심리를 나타낸 것만 같은 구절이 앞부분에서 이미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자기에서 자기인형으로 자신의 종목을 바꾸는 장인의 서투름을 묘사한 부분이었는데 분명히 세부적인 묘사에서 동굴을 처음 내려가는 알고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있다.

 

첫걸음이 실의 끝자락처럼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첫걸음은 길고 고통스럽고 느린 과정이며, 그 첫걸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첫걸음은 마치 눈먼 사람처럼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첫걸음은 첫걸음일 뿐이다. (p.90)

 

눈먼 사람처럼 길을 더듬어나아간 알고르가 본 것의 충격을 전하는 것은 센터로 벗어나는 움직임의 첫걸음이었으며, 센터에서 벗어난 알고르 가족들은 나름대로 큰 도약을 한 셈이지만, 그들의 긴 인생을 고려할 때(그들의 인생이 길게남아있다는 다소 낙관적인 가정을 할 때), 이 도약 역시 첫걸음일 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인도하는 대로혹은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이헤쳐 나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나가며: 우리에게도 떠날 용기가 있을까?

우리에게도 자신이 속한 모든 익숙한 것들을 떨쳐내고 정말로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기 위해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그리고 세상은 그런 용기를 낸 자들을 받아줄 만한 곳일까? 소설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분명히 보여준 것은 자칫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센터에서 공허하게 여생을 보낼 수도 있던 주인공이 자신의 호기심으로 뜻밖의 발견을 했고, 스스로 부정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주저 없이 이를 실천으로 옮긴 결단력이었다. 결국 미래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주어진 상황을 익숙한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호기심과 호기심의 결과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에 더 나은 내일을 걸어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가 현대판 동굴의 우화를 명시적인 비극으로 마무리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부재함으로써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현실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옮긴이의 지적대로 훌쩍 떠나버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현실의 수많은 구속 속에서 한 치 앞의 발걸음을 내딛기에도 조심스러운 사람들에게 너무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플라톤의 우화를 뒤집었듯이, 독자들도 이 상황을 한 번 쯤은 뒤집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낭만적인 상상조차 버린다면, 절대로 이 구속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그냥 살다 보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마치 그 흐름에 반항할 힘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강이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와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우리만 그걸 눈치채는 거죠. 누가 우리를 본다면 물 속으로 빠지기 직전이라고 생각할 거에요. 하지만 우리의 항해기술은 절정에 이르러 있죠.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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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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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마구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내는 세계에는 뒤틀림이 있습니다. 이 뒤틀림은 어떤 경우에는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를 뒤흔들기도 하고, 작게는 등장인물들의 일상적인 삶을 흔들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이야기의 핵심인물들에게 잠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우주가 뒤틀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겠죠. 사라마구의 소설이 가진 매력은, 이러한 총체적 뒤틀림이, 그의 소설 리스본 쟁탈전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듯이, 매우 일상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의 결핍이나 변형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변형들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황당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은 소망했거나 무심하게 내뱉었던 가정들이라는 점이,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누구나 생각하는 뻔한 결말로 치닫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인 것이죠. 모두가 맹인이 되는 바이러스의 공포를 그린 눈먼 자들의 도시’, 백지투표가 정치적으로 불러오는 파장을 그린 눈뜬 자들의 도시’, 인생에서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죽음의 중지모두 일상에서 당연히 갖춘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사라졌을 때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인간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그려냈습니다. 도플갱어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신과 똑같은 사람의 존재에 대한 상상은 그리 유별난 것이 아니지만, 막상 그런 존재가 현실에 존재함을 확인했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과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왔을 때 느끼는 위기감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라마구의 필력은 탁월합니다.

 

도플갱어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는 두 주인공의 완벽히 똑같은 육체 속에 둘이 외모는 복사본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작은 상처나 사마귀까지 똑같지만들어 있는 사뭇 다른 영혼 때문입니다. 역사교사인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와 단역배우에서 조연급으로 성장 중인 배우 안토니오 클라노는 자신의 직업에 적합한, 때문에 얼핏 보기에도 다를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닌 인물입니다. 테르툴리아노의 꼼꼼함과 세심함, 우유부단한 모습과 소심함은 계속해서 변신을 시도함으로써 살아가는 배우의 대범하고 다소 즉흥적이며 쉽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성격과 대비됩니다. 둘이 자신에게 닥친 최고의 시련 자신의 도플갱어가 서로의 인생에 점점 짙게 간섭해온다는 것에 대처하는 자세도 성격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테르툴리아노가 자신의 적과 약혼녀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비겁함이 그들을 죽게 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겠지만 사실 그 뒤에는 안토니오의 성급하고 감정적인 복수가 선행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마치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저 깊은 곳에서 고통스럽게 몸을 이끌고 올라오듯이, 망연자실한 표정이 안토니오 클라로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보게 될지 알고 있었으니까.” (p.294)

 

두 주인공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다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지배하는 두려움과 불안감, 혼란스러움의 감정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갑자기) 어려워졌음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외형을 한 사람이 나란히 옆에 선 채, 둘이 동시에 전신거울을 본다면, 누가 자신이고 누가 자신의 도플갱어인지 구분하는 것은 아마 즉각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이 잠깐이라도 주저한 다음에 거울이 상을 반대로 보여준다는 과학적 지식을 동원한 후일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도 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고, 남들과는 다른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보장이 있기 때문인데, 외형으로 나와 구분 불가능한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위의 두 가지 인식의 지름길을 모두 박탈당하는 상황이기에 죽을 만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습니다. 독자는 둘이 외형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육체의 복사가 영혼과 의식의 복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조차 없는 상황이라면 당사자들은 더욱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제일 불안한 건, 그자가 나를 닮았다는 사실, 내 복사판이라는 사실이 아냐, 정말로 불안한 건 오 년 전에 그자와 내가 똑같은 모습이었다는 사실이야.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콧수염을 길렀다는 것까지 똑같았단 말이지. 게다가 오 년이 지난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그자가 여전히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더 불안해.” (p. 32 )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외모가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하게 같은 궤적을 그리면서 변하고 있다는 것은, 개인들이 삶에서 남기는 궤적은 역시 유일무이하다는 우리의 상식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것이 한층 더 무섭고 불안한 사실이 되는 것이죠. 이 점을 테르툴리아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유전자가 거의 서로 일치하는 쌍둥이조차도 고유한 자신의 궤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도플갱어는 이보다 한차례 더 집요하게, 최소한 외형에 있어서는 자신과 동일한 궤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죠(4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삶의 궤적이 외형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현실에서 우리들이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나는 일은, 인간복제가 윤리적 금기를 넘어서 현실이 되기 이전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과 다르게 보이는자신의 외형을 배제할 때, 무엇이 나를 나로존재하게 만드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음을 도플갱어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를 나를 둘러싼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다른 존재로 정의하기 전에, 내 자신이 어떠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며, 답을 찾고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도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야기의 결말에서 또 다른 도플갱어의 존재를 감지했을 때 테르툴리아노가 취하는 행동은 결국 그러한 상황 자체가 다시 발생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결심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겪은 그의 선택입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테르툴리아노와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런 고민들의 무게에 괴로워하면서 등장인물들의 혼란스러움에 같이 공감한다면 책을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겠죠.

적은 적을 갖겠다는 우리의 의지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를 갖겠다는 적 자신의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서 태어나는 것이다(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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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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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하는 여정을 통해 파우스트의 개인적 욕구가 보편적인 대상을 향한 선의지로 전화되는 모습과 함께 `충실하게 방황하는` 영혼이 구원받는 장면을 담은 2부까지 읽어야 파우스트를 읽는 재미가 고스란히 전해질겁니다. 다소 내용이 장황한 부분도 있지만 끝까지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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