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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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공화국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필자가 재학했던 당시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교과서에 등장할 만큼 친숙한 것이다. 주입식 교육에서 이 우화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을 설명하는 우화 정도로만 해석되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주의깊게 생각해 볼 여유는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 이 우화가 좀 더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우의(알레고리)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문제에 대해 기존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설명을 제기한 책 중 필자가 가장 최근에 읽은 것은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이었다)과 더불어 동굴에 묶여 있는 자들과 우연히 바깥세상을 본 후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의 관계가 어떤 양상을 띨 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마침내 빛을 보게 된 사람의 미래는 과연 어떠한 것일지에 대한 생각 등은 이 우화를 주입당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기억 저 편에서 동굴 이야기가 포르투갈의 최고 이야기꾼인 주제 사라마구에 의해 재탄생될 때, 위에서 이야기한 지점들은 독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동굴속에 담긴 동굴 이야기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가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마주한 인간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센터: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공간

동굴의 줄거리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프리아노 알고르(이하에서는 간편하게 줄이기 위해 알고르라는 성으로 부르겠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자기를 굽는 도공인데, 어느 날 센터로부터 더 이상 도자기를 납품하지 말 것을 통보받는다. 졸지에 실업자가 될 위기에 처한 알고르는 딸 마르타와 함께 도자기 인형을 새로 만들어서 센터에 납품하는 모험을 강행한다. 한편 알고르의 사위 마르살 가초는 센터의 2급경비원으로 근무하며 곧 입주경비원으로 승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상주경비원이 되면 아내와 장인을 모시고 센터 내의 아파트로 입주할 계획을 세운다. 센터에서는 도자기 인형을 시험 삼아 납품할 것을 제의하고 알고르 부녀는 열심히 인형을 만들지만, 시장 반응이 좋지 않아 시제품만 거래하겠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 동안 마르살은 승진하고, 계획대로 주인공 가족은 센터에 입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 지하 공사 중에 플라톤의 우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동굴이 발견되고 이를 본 알고르와 마르살은 동굴 속에 결박된 채로 발견된 해골들이 자신의 모습임을 깨닫고 센터를 떠난다. 센터에서는 이를 플라톤의 동굴관광상품으로 써먹는다. 센터 지하에서 동굴이 발견되는 반전 이전의 내용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그 밖에 속하던 사람에게 주는 영향을 알고르의 삶이 변화하는 방식을 통해 이야기해주고 있다. 장인으로서 소규모 가내수공업을 이어가던 알고르는 플라스틱 식기류를 만드는 경쟁사업체와 애시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고객들의 취향도 그의 편이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인형을 만들지만, 역시 그 인형도 시장에서 충분한 반응을 얻지 못하고 센터에서 퇴출될 운명이다. 한편 사위 마르살 가초는 센터의 임시직 노동자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로 승진하지만 그의 계급적 위치가 알고르보다 더 낫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자본주의적 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된 존재이며, 그렇지 못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앞으로도 빠듯한 생활을 해 나가야 함은 변함없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승진의 대가가 객관적으로 봐도 만족하기 힘든 수준의 비좁은 주거지 물론 센터 내의 아파트는 오늘날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그것들과 소름끼칠만큼 닮아 있지만라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센터는 센터가 운영하는 여러 시설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도시 안의 도시지만 오히려 도시를 능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상한 공간이다. 이는 센터가 근대 자본주의적 도시의 핵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초자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도시를 초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무한해 보이는 센터 공간도 막상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이를 배분하기에는 희소성의 원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공간일 뿐이다. 희소성의 원칙을 진리 삼아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현실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으며, 그 제약을 스스로 허물어가면서 자신을 유지하는 현대 경제학과 시장경제체제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살은 센터가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물리적이든, 영향력의 측면이든) 넓혀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 모습,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문자 그대로 지구촌 끝까지퍼져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알고르가 직접 그 단어를 쓰면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센터가 이윤 추구의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다(구매차장이나 구매부장과의 대화에서도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아무리 무심한 독자라도 센터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따로 뗴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상징적 공간을 잘 그려내었다.

 

센터 밖: 인간성이 남아 있는 공간

알고르 일가와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생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센터 밖의 공간은 인간미가 상실된 센터와 달리 인간의 희노애락과 우정, 연민, 사랑의 감정이 남아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곳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체계를 거부하면서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고집센 시프리아노 알고르와 같은 사람도 있고, 센터에서는 이미 금지된 애완동물 키우기에 관심을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가정을 꾸리고 이웃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러한 낭만적인 생활은 결코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한다. 물건을 실은 테러를 판자촌 사람들이 약탈하는 장면에서 물질적인 고통이 점차 인간성을 파괴하는 현장을, 강요된 것 같은 악이 선한 미덕을 조금씩 삼켜버리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단순히 트럭 서리를 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트럭이 불타는 광경에 이르러서 알고르는 각성을 시작한다. 그것이 고의적으로 불태워짐으로써 공권력이 본격적으로 주변적인인물들의 삶에 개입할 빌미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각성의 시작이다. 실제로 이러한 의심이 타당한 것이었는지 소설에서 명시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지만 독자들은 현실에서 이러한 종류의 공작이 무수히 많이 일어나왔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다. 때문에 알고르는 편집증 환자가 아니라 현실에 눈을 뜨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고 나니 몹시 피곤해졌다. 정신을 혹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갑자기 눈에 보였기 때문에. 세상에 거짓이 얼마나 많은지. 어딘가에 진실이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진실은 계속 변한다. 그리고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이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혹시 그럴듯한 거짓말은 아닌지 먼저 확인해 봐야 한다. (p.117)

 

센터 밖의 공간이 센터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을 가진 곳으로, 혹은 센터가 센터 밖의 세상과 대립되는 곳으로 정의되는 것이 꼭 타당한 방법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러한 두 공간의 대립으로만 끝난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갈등이나, 갈등의 비극적 결말이 부각되었다면 소설의 문제의식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센터 내의 동굴이 등장하면서 반전이 일어나고, 주인공의 운명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게 된다(사실 인형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장인으로서의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다가 좌절하는 알고르의 모습은, 몇 가지 조건만 바뀐다면, 그대로 독 짓는 늙은이처럼 가마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결말을 맞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비참했었다).

 

동굴: 깨달음, 그리고 탈출의 계기

알고르가 자신의 호기심을 못이기고 사위의 일터로 달려가 발견한 것은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서 봤던 광경이자, 일전에 가마에서 꾼 꿈에서 봤던 기이한 광경이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조상들이 진짜 의자에 다리와 시선이(목이 고정되어 있으므로) 묶인 채, 해골이 되어버린 광경이며, 뒤편으로는 설화에 나온 경사로와 모닥불을 피운 흔적까지 있는 것이다. 탈출을 감행하기로 한 사람들, 센터의 삶에 아직 완전히 젖어들지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 광경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알고르의 말에 즉각적으로 공감한다. 마치 알고르가 사과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봤을 때, 사과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처럼. 독자 입장에서 알고르가 처음에 동굴을 발견하였던 장면보다 더 전율을 느꼈던 것은 주인공들이 모두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이토록 빠르게 동의하고 센터를 벗어나려고 했다는 점이다. ‘동굴의 우화가 비극으로 끝날 여지가 다분했던 이유는, 처음에 빛을 목격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할 수 있기 때문인데, 직접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알고르의 이야기에 마치 같이 빛을 본 것처럼 행동하는 소설의 전개는 이 지점을 고려할 때 다분히 의도적이다. 사라마구가 우리 인간의 가능성을 믿기에, 비록 그것이 열린 결말일 지라도, 낙관에 좀 더 힘을 실어주려 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동굴의 대발견을 맞이하는 알고르의 심리를 나타낸 것만 같은 구절이 앞부분에서 이미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자기에서 자기인형으로 자신의 종목을 바꾸는 장인의 서투름을 묘사한 부분이었는데 분명히 세부적인 묘사에서 동굴을 처음 내려가는 알고르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있다.

 

첫걸음이 실의 끝자락처럼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첫걸음은 길고 고통스럽고 느린 과정이며, 그 첫걸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첫걸음은 마치 눈먼 사람처럼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첫걸음은 첫걸음일 뿐이다. (p.90)

 

눈먼 사람처럼 길을 더듬어나아간 알고르가 본 것의 충격을 전하는 것은 센터로 벗어나는 움직임의 첫걸음이었으며, 센터에서 벗어난 알고르 가족들은 나름대로 큰 도약을 한 셈이지만, 그들의 긴 인생을 고려할 때(그들의 인생이 길게남아있다는 다소 낙관적인 가정을 할 때), 이 도약 역시 첫걸음일 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인도하는 대로혹은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이헤쳐 나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나가며: 우리에게도 떠날 용기가 있을까?

우리에게도 자신이 속한 모든 익숙한 것들을 떨쳐내고 정말로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기 위해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그리고 세상은 그런 용기를 낸 자들을 받아줄 만한 곳일까? 소설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가 분명히 보여준 것은 자칫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센터에서 공허하게 여생을 보낼 수도 있던 주인공이 자신의 호기심으로 뜻밖의 발견을 했고, 스스로 부정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주저 없이 이를 실천으로 옮긴 결단력이었다. 결국 미래란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주어진 상황을 익숙한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호기심과 호기심의 결과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에 더 나은 내일을 걸어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가 현대판 동굴의 우화를 명시적인 비극으로 마무리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부재함으로써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현실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옮긴이의 지적대로 훌쩍 떠나버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현실의 수많은 구속 속에서 한 치 앞의 발걸음을 내딛기에도 조심스러운 사람들에게 너무 낭만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플라톤의 우화를 뒤집었듯이, 독자들도 이 상황을 한 번 쯤은 뒤집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낭만적인 상상조차 버린다면, 절대로 이 구속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그냥 살다 보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마치 그 흐름에 반항할 힘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강이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와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우리만 그걸 눈치채는 거죠. 누가 우리를 본다면 물 속으로 빠지기 직전이라고 생각할 거에요. 하지만 우리의 항해기술은 절정에 이르러 있죠.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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