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32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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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받지 않을만큼

손님을 대접하는 데 인심이 후하고 마음씨가 넓은 사람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답례받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만큼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 (인심이 후한) 사람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증여론의 맨 처음에 나오는 이 북유럽 고대 시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모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다. 일상생활에서, 일방적으로 주거나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유지되기 힘들다. 아무리 조그만 호의나 선물이라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받고도 되갚지 않는 행위는 마음 한 구석의 부담감 없이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렇게 늘 겪는 일상적인 감정과 상식적인 규범이 낯설지 않다면, 저자의 글이 어렵게 느껴질 이유는 전혀 없다. 저자가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이 현대 문명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과거 인류의 모습을 간직한 문명이라서 그들의 모습이 낯설게 보일지 몰라도, 그들이 규범으로 삼는 증여의 행위와 그 원리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현대인의 눈으로만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오류가 생길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필자가 증여론의 원문을 읽기 전에 가졌던 것이기도 하고, 증여론의 내용을 대학교 입시 논술 준비 과정에서 한 토막의 지문 정도로 접한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오류일지도 모른다(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대학교 입시과정에서 현대경제학의 합리적 경제주체 가설이나 게임 이론과 같은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이러한 오류와 무관하지 않다).

 

 

모스가 이 논문을 통해 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은 본문에 앞서 정리되어 있다. 미개(未開) 또는 태고 유형의 사회에서 선물을 받았을 경우, 의무적으로 답례를 하게 하는 법이나 이해관계의 규칙은 무엇인가?”받은 물건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수증자(受贈者)는 답례를 하는 것인가?”가 바로 그 질문이다. 모스는 여러 부족들의 증여 행위 연구를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거나 또는 현대사회에 직접 선행하는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거래의 성질에 대해 고고학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계약과 판매의 근대적 형태와 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의 거래가 어떤 기능을 하였으며, 이 거래에서 작용하는 도덕과 경제를 검토하고, 이 도덕과 경제가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암암리에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자 했다. 때문에 증여론의 함의는 현재성을 가지고 실천적 함의를 띤 것으로 보는 것이 저자의 의도에 충실한 것이다. 때문에 저자가 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 이누이트,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 일부의 포틀래치(넓은 의미의 포틀래치로, 모스의 선행 연구자들이 포틀래치로 부르던 것과 쿨라 등의 유사 포틀래치를 포함하여) 문화를 탐색한 후 이와 유사한 것이 로마법이나 게르만법, 힌두법, 중국의 풍습 등에서도 발견되며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민족들의 풍습에서 최근까지도 관찰 가능하다는 이야기로 논의를 확장하는 것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매우 충실한 전개이다.

그렇다면 모스가 연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언가를 주고받는행위는 선물을 받을 의무와 그것을 받을 의무, 그리고 그것에 답례할 의무를 기반으로 하는 행위이며, 이것을 화폐사용 이전의 물물교환 행위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역시 1장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교환하는 것은 오로지 재화와 부, 동산과 부동산처럼 경제적으로 유용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의, 향연, 의식(儀式), 군사적인 봉사, 여자, 어린이, , 축제, ()인데, 이러한 것들의 거래는 훨씬 더 일반적이며 훨씬 더 영속적인 계약의 계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또한 거기에서 부의 유통은 그러한 계약항목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급부와 반대급부는 꽤 자발적인 형식 아래 선물·선사품으로 행해지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의무적이며, 그것을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싸움이 일어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전체적인 급부체계 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p.53)

 

 

때문에 물물교환을 통한 부족의 경제적 욕구 충족은 증여행위의 여러 결과 중 하나이며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행위가 부족 간의 전쟁을 막고 구성원들의 결속을 다지는 데 기여한다는, 외교적인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는 저자에 의해 직접 언급되지만 이 역시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포틀래치로 대표되는 증여행위는 후한 인심을 과시하고, 지배자의 권위와 지배의 정당함을 인정받기 위한 의식이기도 하며,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거나, 상대방의 지위 혹은 명예를 제압하기 위한 경쟁의 의식이기도 하다. 필자가 읽었던 포틀래치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놀라운 것은 포틀래치와 신용(信用)의 연관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예를 들면 퀴크(Cuq)는 아직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시 사회에서는 물물교환제도만이 보인다. 더욱 진보한 사회에서는 현금판매를 행한다. 신용판매는 고도의 문명단계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것은 맨 처음에는 현금판매와 대여를 조합한 간접적인 형태로 출현한다.”사실 출발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법학자와 경제학자가 흥미롭지 않은 것으로 제쳐놓고 있는 관습의 범주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증여, 특히 그 가장 오래된 형태, 즉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 전체적인 급부형태의 복합적인 현상인 증여이다.

그런데 증여는 필연적으로 신용 관념을 초래한다. 경제발전이 물물교환에서 판매로, 현금거래에서 신용거래로 이행한 것은 아니다. 주고 일정한 기한 후에 답례되는 증여체계위에, 한편으로는 이전에는 따로 떨어진 두 시기를 접근시키고 단순화하는 것에 의해 물물교환이 세워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매매 현금매매와 신용매매와 대여가 세워졌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기술하고 있는 단계를 넘어선 어떠한 법(특히 바빌로니아법)도 우리 주위에 잔존하는 모든 고대사회가 알고 있는 신용을 몰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pp.137-138)

 

 

현재 파괴하거나 모두 나누어 줘버리는 재화는 낭비라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로 보는 것이 좋다는 점과, 포틀래치 경제조직이 부족의 모든 성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가(원문에서는 자본이라고 서술되었지만, 이를 부(wealth)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현재 유통되고 있는 통화의 총량을 훨씬 넘어설 정도로 발전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포틀래치에서 신용 관념의 기능을 아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증여행위를 좀 더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 원시사회에는 발달하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되었던 관념들(예컨대 신용 관념)의 원천이 된다는 지적 이외에도 저자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각 부족들이 증여의 객체를 대하는 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증여의 객체가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이것은 경제제의 단순하지만 명료한 정의이기도 하다)’를 넘어서 (논의의 편의상 증여 대상을 물건으로 잠시 한정할 때), 대상 자체에 고유한 영혼이 존재한다든지, 대상이 증여자의 영혼이나 마음의 일부분을 수증자에게로 전달해준다는 생각인데, 이는 증여 행위가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의사소통행위로 이해될 수 있고, 강하게 이야기하면 의사소통행위로 이해되어야만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증여 행위가 쌍방의 영적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모스가 앞에서 제기한 핵심 질문에 답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래서 책의 많은 부분이 증여 행위를 둘러싼 여러 부족 구성원들의 감정적 반응이나 감정상태의 변화, 증여행위가 그들에게 주는 의미에 할애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부분들이 증여론의 핵심만을 요약하다 보면 누락되기 쉽다. 하지만 증여 행위가 모스의 결론대로 보편적인 것이라면, 결국 오늘날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증여 대상이 되는 객체를 바라보는 관점과, 증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감정적 교류에 두는 비중 아니겠는가? 재화와 서비스를 이윤 창출을 위해 만들어지고 팔리는 상품으로 취급하고,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증여 행위가 사회의 윤리와 질서 유지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스가 역설한 훌륭한 지혜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모스도 이 지점을 결론에서 지적하였다.

 

 

 

이익이라는 말 자체는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서, 그것은 부기용어, 즉 장부에서 징수해야 할 지대 맞은편에 기재한 라틴어의 ‘interest’에서 유래한다. 가장 향락주의적인 고대 도덕에서도 추구되는 것은 행복과 쾌락이지 물질적인 효용이 아니다. 이득과 개인이라는 관념들이 널리 유포되고 원리의 수준으로까지 올라가려면 합리주의와 상업주의의 승리가 필요하였다. (중략) 고전적인 산스크리트로 저술했으며 우리의 이익 관념에 아주 가까운 아르타(artha)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들조차도 행위의 그밖의 여러 범주에 대해서 그랬던 바와 같이이익에 대해서 우리와는 다른 관념을 품고 있었다. 고대 인도의 성전들은 인간의 활동력을 법(dharma)·이익(artha)·욕망(kama)이라는 범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아르타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이익, 즉 왕, 브라만, 대신, 왕국, 각각의 카스트 등의 정치적인 이익을 가리킨다. 니티샤스트라(Nitiçastra, 정치론: 베다의 현실 사회생활에 관한 부분을 정리한 문헌. 처세술부터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에까지 이르고 있다-역자)라는 중요한 문헌은 경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민중 속에서도 또 엘리트 사이에서도 순수한 비합리적인 지출은 관행이 되어 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 귀족 계급에게 남아 있는 약간의 풍습을 특징짓고 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우리 뒤에 있지 않고, 도덕적인 인간, 의무를 다하는 인간, 과학적인 인간, 이성적인 인간과 마찬가지로 우리 앞(미래-역자)에 있다.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이 계산기라는 복잡한 기계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pp.270-271)

 

 

다만, 10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오늘날은 모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이 더 철저히 경제동물(animal économique, economic animal)’이 된 상황에서 모스가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직도 이 끊임없는 비정한 공리적 타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이야기한 부분이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라고 보인다. 이제 인간은 계산기라는 복잡한 기계를 넘어서,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수월하게 해내기 힘든 고차원적인 연산 끝에 항상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걸어 다니는 슈퍼컴퓨터로 거듭나고 있고, 그런 인간들의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의사결정의 집합은 구성의 오류 없이 최적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아직도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런 인식이 이제 제법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주입되는 과정에서 모스가 의도한 증여행위의 포괄성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증여행위가 홉스적 상황에서 부족의 평화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게임상황에서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전략(tit for tat)의 예시 정도로 이해되는 안타까운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원인은 마땅히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겠으나 모스가 그토록 교정하고 싶어 했던 오류 증여를 물물교환과 동일시하며 포틀래치 축제가 시장의 기능을 했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가 개선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남아 있다(지나치게 증여를 경제적 행위로 본다는 점은 단순히 학교 교육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를 경제 동물로 만들어내는 사회적 분위기와 연관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오독을 피하고 모스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거나,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결국 증여행위의 전체적인 급부로서의 성격과, 감정적 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의사소통행위로서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오류는 필자도 고등학교 때 단편적으로 증여론의 내용을 접하고, 그 후에도 해당 텍스트가 다소 부적절하게 인용되는 사례들을 보면서 가졌던 것인데, 이번 기회에 원문을 읽고 온라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평한 내용들을 보면서 다행이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이도, 모스가 이 논문에서 담고자 했던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폭 넓은, 더 실천적인 함의를 띠고 있었음을 이번 기회에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바람은 결론의 마지막 단락에 잘 드러난 것 같다.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서 짧은 후기를 마친다.

 

 

 

이런 식으로 하면(아서왕의 원탁의 예시) 오늘날에도 국민들은 강하고 부유해지며 또 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 민중·계급·가족·개인은 부유해질 수는 있지만,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원탁의 기사들처럼 공동의 부() 주위에 앉을 수 있을 때뿐이다. 선과 행복이 무엇인가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부과된 평화 속에, 공공을 위한 노동과 개인을 위한 노동이 교대로 일어나는 리듬 속에, 또한 축적된 다음 재분배되는 부 속에 그리고 교육이 가르치는 서로간의 존경과 서로 주고받는 후함 속에 있다.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총체적인 행동과 사회생활 전체를 연구할 수 있는가가 이해된다. 또한 어떻게 하면 이러한 구체적인 연구가 풍습의 과학 및 부분적인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결론, 아니 오히려 오늘날 일컬어지고 있는 바와 같은 예의(civilité)·’공민정신‘(civisime) 옛말을 다시 받아들이자면의 결론에도 이를 수 있는가가 이해된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심미적·도덕적·종교적·경제적인 다양한 동기들과 물질적·인구학적인 여러 요인들을 엿보고 평가하며 비교할 수 있다. 이 다양한 동기와 요인들의 합이 사회의 기초를 이루며 공동생활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 동기와 요인들의 의식적인 괄 리가 최고의 기술, 즉 그말의 소크라테스적인 의미에서의 정치(Politique)이다. (pp.282-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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