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손에 꼽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하지만 가장 큰 여운을 주었던 이야기를 뽑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비밀스러운 행동 끝에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버린 좀머씨는 등장부터 죽음까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여러 번 읽을 때마다 좀머씨는 나에게 다른 인물로 다가왔다. 이해 불가능한 신사에서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사람으로, 자신이 겉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하는 가련한 영혼의 모습으로도 다가왔다. 나에게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 파트리크 쥐스킨트 본인도 꽤나 신비에 싸인 작가였다. 그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낸 것은 그의 향수가 영화화되고 나서였다. 이 소설 또한 매우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왔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최근에야 읽게 되었다.

 

우연히도 최근 공간에 대한 나의 끝없는 관심과 새로운 탐구가 냄새를 주제로 한 이 소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지금까지의 내 삶을 되돌아보면 지금이 향수를 읽기 적기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인공 그루누이가 가장 완벽한 향기를 찾기 위해 필요한 냄새들을 모조리 빨아들이듯, 이야기도 내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흡수될 수 있었다.

 

필자는 향수를 읽고 나서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는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에 대한 성찰이고 두 번째는 그루누이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듯이, ‘후각의 가면무도회를 벌이는 인간의 모습이다.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에 대한 생각은 그루누이가 후각을 사용하는 방식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시각과의 비교과정에서 나왔던 것 같다. 우리는 보통 시각을 이용해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인지하며 이를 근거로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의 손실은 여러 이야기들에서 인물이 겪는 불행 혹은 제약의 단골소재 시각의 손실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는 불행도 있겠지만 시각의 손실 혹은 제약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로 등장한다. 우리는 마음의 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남과 진정한 인간관계를 쌓는 데 필요한 자세도 시각에 비유하고, 깨달음의 순간도 의 이미지와 개안의 비유를 이용해 표현한다. 즉 우리의 지각은 시각에 편향되어 있다. 하지만 그루누이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은 그의 탁월하게 예민한 후각이다. 그의 후각은 시각보다 더 선명하며, 더 잘 기억되고, 더 분별력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후각으로 단순히 구별을 하거나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후각의 아카이브를 만들어놓는다. 후각 기억의 크기는 파리라는 대도시만큼 거대한 정보를 통째로 저장하고도 거뜬하다. 그리고 우리가 시각으로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듯이, 그는 기존에 맡았던 냄새들을 새로 조합하면서 내면에서 새로운 냄새를 만들어낼 능력도 갖추었다. 오늘날 청각이나 시각적 정보를 디지털화하듯이 후각 정보를 디지털화한다면(물론 그루누이의 작업이 디지털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냄새간의 합성이나 변형이 더 용이하겠지만, 그루누이는 오직 천재적인 후각으로 이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후각은 시각으로 인지하는 세계와는 다른 공간감을 느끼도록 해 주는 것 같다. 후각은 그에게 같은 지점을 수많은 다른 공간으로 변형시켜 상상할 수 있는 힘을 주고, 그의 후각이 닿는 한 공간과의 거리를 앞당겨준다. 그가 냄새를 맡는 동안 모든 것은 그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것 같은 자신만만함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거리 좁힘에서 나오는 것이다(이는 천리안을 가진 채 세상을 관망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지만, 천리안도 투시(透視)가 불가능한 반면, 그루누이의 후각은 냄새의 발생 원인을 모두 지목할 수 있으므로 굳이 투시기능 없이도 꿰뚫는 능력이 있다). 시각은 시선의 제약을 받지만 냄새는 직선적으로 퍼져나가지 않고 사방으로 퍼지기 때문에 그루누이의 공간 인식은 직선적이라기보다는 그를 중심으로 둘러싸는형태로 표현된다. 이 지점 또한 후각의 고유한 특성과 관련이 깊은 부분이다. 작가가 본래 후각이 예민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상상력에서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라면 독자로서 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후각의 가면무도회에 대한 것이다. 동물이 후각을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하듯이 사람도 무의식중에 후각적 신호를 이용한다는 점은 과학자들이 열심히 밝히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일반적으로 알려진 성과도 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한 사람이 내뿜는 향기로 그의 죄목까지 망각하고, 그를 환희에 차서 받드는장면에서, 또 그루누이가 다양한 상황에 걸맞는 체취의 향수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장면에서 나는 그가 하나의 가면무도회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본질을 따지고 들자면, 우리는 일생동안 가면무도회를 하며 살아간다. 모든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작가가 그루누이의 기괴한 가면무도회를 통해서 삶의 이런 면을 상기시켜준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오히려 후각 뿐만 아니라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는 모습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우스워 보이지는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스스로가 이런 가면 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 다소 씁쓸했다.

 

그루누이의 가면무도회를 좀 더 거시적으로 생각해보자면(그는 그리고 그것을 정말 크게한 번 이용했다), 거짓일지도 모르는 정보에 너무나도 쉽게(혹은 자연스럽게) 판단을 내려버리고 모여 있는 자들의 광기가 재고의 여지없이 확산되는 무서운 광경을 읽어낼 수 있다. 필자가 다수로 모여 있는 사람들광기혹은 우매함등을 연결 짓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지만 다수가 그렇다고 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광기가 현실에서 여러 번 관찰되는 것은 그리고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필자를 포함한 다수가 여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사실이다. 이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하면서도 너무 쉽게 말려들게 되는 것을 보면 이런 맹목에 어쩔 수 없는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힘겹게 억누르며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마저 든다.

    

마지막으로 이런 맥락에서 향수를 다 읽어갈 때 쯤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이승열의 가면이었다. 나는 그루누이의 모습과 가면의 내용에서 일맥상통하는 모습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그루누이의 마지막이 뒷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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