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뗏목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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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읽기의 세 번째 주인공은 돌뗏목이었다.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표류하는 기발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그린 이 소설도 다른 작가의 소설들처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가 갈라질 무렵 기이한 일을 겪은 주제 아나이수, 조아나 카르다, 조아킴 사사, 페드로 오르세는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되고 떨어져나간 이베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여정에 오른다. 여정 도중에는 훗날 콘스탄테라고 이름 붙은 커다란 검은 개와 말 두필 말 두 필이 본격적으로 합류하기 전에는 말 두필이라는 뜻을 가진 되셰보(deux chevaux) 자동차가 이들의 여정을 가능케 하는 교통수단이었다도 함께한다. 같이 여행을 떠나면서 이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힌다. 이들 중 새로운 커플들이 탄생하고, 영원할 것 같은 여행동무들 간의 갈등과 대립도 발생하고, 결국 오르세는 여정 도중에 생을 마감한다. 여행 초반에 잠깐 마주쳤던 당나귀를 끌고 다니는 노인 로케 로사노도 후반부에 여정에 합류하며 집으로 복귀하기도 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소 지루한 시골길 여정쯤으로 들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동안 세상이 뒤집힌다. 떨어져나간 이베리아 반도와 거북이 머리를 바다로 보낸 유럽은 물론이고 이 역사적인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기위해 골머리를 앓는 모두에게 있어서.

 

소설의 분위기는,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도입부가 대부분 그렇다는 지적도 있지만, 묵시록적인 느낌을 물씬 준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찌르레기떼의 출현과 목소리를 잃어버렸던 개들의 부르짖음,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게 되는 남자. 무심결에 그어 버린 선이 문자 그대로 공간의 단절시대의 단절을 예고해버린 여자까지. 그 중 압권은 기계로도 감지하지 못한 땅의 진동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페드로 오르세가 아닐까 싶다. 다른 이들은 일회적으로 기이한 일을 겪지만 오르세 노인은 죽기 직전까지 반도의 이동을 온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여생과 반도의 이동이 궤를 같이할 것이라는 암시는 소설 곳곳에 나와 있다고 봐도 좋다. 꼭 그의 종말이 아니더라도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의 분리가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는 것은 소설 곳곳에 나와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었을 때 오르세가 이 여정을 끝으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복선이 주어질 뿐이다. 그가 지옥에서 왔다고 표현할 만큼 검은 개 콘스탄테와 짝을 이루어 여행을 떠난다는 점, 그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반도가 움직이고 삶이 뒤바뀌는 상황에서의 과도기적 지혜를 보여주지만, 일단 이 상황이 종료되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경우 그와 같은 사람들의 자리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는 점 등이 그러한 복선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반도의 이동은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동무를 만나는 계기가, 어떤 이들에게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 계기가(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여성들이 임신한다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이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 가까운 미래에 태어나는 계기가, 어떤 이에게는 흔히 여정으로 비유되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마무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혼란스러움은 반도와 유럽을 격렬하게 뒤흔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은 자리를 잡아간다. 사라마구는 다른 소설에서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시간이 충분한 지물었다. 오르세에게는 어쩌면 남은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이번에는 운 좋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분명히 땅덩어리가 떨어져나가는 상황은 당사자들에게는 물론이고 독자들에게도 비극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사라마구가 이 상황을 묘사하는 과정은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독자들은 어쩌면 이미 결말이 낙관적일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 위에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반도의 이동에 어떻게 대처하는 지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사실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일어났던 이베리아 반도 내의 정치적 혼란부터 우리도 이베리아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럽 대륙 내부의 정치적 혼란까지,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지켜보듯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읽어나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언제 세상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은 이런 정치적 투쟁의 상황의 의미와 이를 묘사함으로써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고민할 여유를 빼앗을 것 같다).

 

기대했던 바와 같이 결말은 열려 있으며, 낙관적이라고 봐도 좋을 만한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눈 뜬 자들의 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씁쓸함은 줄어들고, 새로운 시대에서 사람들은 어찌어찌 적응해서 잘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볼 수 있는 결말이었다. 혼란스러움이 있었고, 한 시대가 지나갔지만 우리네들의 삶은 계속된다는 결론. 옮긴이도 후기에서 이런 사라마구의 낙관에 주목하고 있다. 이 낙관이 소설의 긴장감을 다소 떨어뜨릴지는 몰라도 점점 찾기 힘든 세상에 대한 희망을 비록 우리 세상이 변화하는 정도를 넘어서 완전히 뒤집어질만한 상황으로 치닫는다고 하더라도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필자도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고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보다는 절망과 좌절, 때로는 환멸감마저 점점 더 자주 경험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는 막연하고, 막연하기에 더 마음 놓고 바랄 수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말을 누구한테든,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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