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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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디외에 대해 '핵심'만을 간략하게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정독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 중 하나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원한다면 같은 저자가 쓴 '구별짓기'에 대한 안내서 『취향의 정치학』을 읽어보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이 책의 목차에다가 더 필요한 살을 붙여가면서, 그리고 구별짓기라는 부르디외의 대표 저작을 어떻게 읽을 지에 대한 각 장별 해설이 덧붙여져 있는 형태입니다. 개인적으로 둘 다 읽어보았는데, 조금의 시간과 비용만 더 투자할 수 있다면 후자를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비교 대상이 있어서 개인적인 평가는 다소 낮지만 책 자체는 간결하고, 핵심이 명확하게 드러나서 저자도 인정하듯이 '어려운 부르디외'에 관해 첫단추를 채우기에는 좋은 책입니다. 다만 부르디외에 대해 어렵다는 저자의 평가를 무릅쓰고 첫 단추를 넘어 본격적인 '입문'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그 매력을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저자 후기에 들어가 있는 문제의식도 『취향의 정치학』에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부르디외에 대한 설명 자체 만큼이나 이 부분도 눈여겨 읽을 가치가 있기에 더욱 후자의 책을 읽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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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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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두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저자의 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더 병든 인간은 더 책에 집착한다는 말도 옳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이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 하나의 예시를 들라고 하면 난 20대 남성들 중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집단 중 하나가 군인이라는 점을 자신 있게 내세우고 싶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병적으로남는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고자, 혹은 자유로웠을 때 할 수 있었던 다른 많은 여가들과 차단된 채 그들이 남의 시선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활동이 독서이다. 책의 종류가 복무 형태에 따라 검열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지만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군복무라는 단체생활 속에서 가장 개인적으로 하는 행동 또한 독서일 것이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운동부터 TV 시청까지 군대에서 개인적으로 행하는 행동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굳이 선·후임이 보는 책을 같이 보려고 하지 않는 이상, 독서는 근대 이후로 익숙해진 바로 그 방식(혼자 읽는 묵독의 방식)을 존중받는다. 같은 부대 안에서도 현실에 더 잘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책을 열심히 읽는 것 같다. 내 주위를 들어보면 대부분 그렇다. 물론 군대 문화에 더 잘, 더 빨리 녹아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고 믿는데, 여하튼 그 문화에 더 잘’, ‘더 빨리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책에서 더 큰 위안을 찾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구절 뒤에 더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지만, 이 부분에서 너무 많은 것들이 확 느껴져서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갈 길로 돌아와서 저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 결국 이것은 세계의 불행이며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행이다.

 

현대 철학서적들이 읽기 어려운 것이 과연 독자들의 지적 능력이 나날이 하향평준화 되고 있기 때문인걸까? 그것들이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하였기때문에 점점 독자들은 텍스트를 이해할 현실의 준거점을 찾기 힘들어지고 텍스트에 끌려 다녔던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텍스트들이 그렇다고 말하며 자신 있게 독서를 거부하는 것도 다른 극단에서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닌 것 같지만, 분명히 쓸데없이 어렵게 쓰는 책들의 저자는 그 어려운 문장을 자부심으로 느끼지 말고 저자의 이와 같은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쓸데없이 어렵게 쓴 책을 어떻게든 잘 이해했다고 자부하며 그것이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과연 그것이 정말로 대단한 능력인지 곱씹어보아야 하겠지만. 혹자는 이러한 냉소가 반지성주의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름 높은 학자들의 책이 높은 이름만큼 어려운 말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또한 원래 설명하려는 대상 자체가 너무나도 어려운 경우와, 충분히 더 간단하게 이야기할 것을 포장하면서 난해함이 추가된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핵심은 텍스트를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보지 말고 그것이 탄생한 배경과 그것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책의 중간 내용은 간결했고, 재미있었지만 부분적으로 익숙한 내용들이 많았고,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해석은 관련 분야의 다른 학자들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었기에 끄덕거리면서 읽었지만(그리고 그 해석에 필자도 동의한다), 아담 스미스에 대한 부분은 국부론에 너무 치중하여 최근 각광받는 스미스의 다른 면을 보려는 시도가 누락된 것 같아서 아쉬웠다. 매체에 대한 이야기는 더 들어봐도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짧게 마무리된 감이 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 내용들 자체만으로 책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내용들을 엮어내는 저자의 큰 문제의식이 매력적이었기에, 권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에필로그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어보자(본문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이 몇 군데 있지만 그것들 보다는 시작과 끝이 더 인상 깊었다).

 

  20세기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에릭 홉스봄이다-필자 주) ‘극단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극단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15세기 아래 면면히 준비되어온 것들이 표피를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갈 수 있을 뿐이다. 개념적 파악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파악 불가능을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것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가? ‘놀라운 일이다, 사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말이다.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이런 말투였다. 회의적이지만 딱히 비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한 번 해보시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시게라고 말하는 동네 어르신의 말을 듣는 것 같다. 저자의 목소리가 그가 인용했던 홉스봄처럼 버릴 수 없는 희망(그는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 염원을 담아 극단의 시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책을 내고서야 세상을 떠났다)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모든 것을 놓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걸 매력이라고 해야 할지, 불친절함이라고 해야 할지 살짝 고민되기는 한다. 사실 앞으로도 계속 텍스트를 읽고 싶은나에게는 매력보다는 불친절함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승이 너무 친절하면 제자가 제대로 못 큰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불친절함은 매력은 아닐지라도, 독자가 더 찾아서 움직이게 하는 마력은 될 것이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라도, 한 번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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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리라이팅 클래식 8
권용선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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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해설서를 재미있게 읽어서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같은 시리즈의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를 중고로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중고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3년 전에 한 교양수업시간에 아도르노에 대해 짤막하게 배웠을 때 패기 있게 계몽의 변증법을 잡고 읽었지만, ‘다 읽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을뿐 제대로 이해한 내용이 적었던 과거가 떠올라서 이번에는 이 책의 도움으로 좀 더 알차게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 또한 프랑크푸르트학파나 아도르노에 대한 사전지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의 사상의 큰 틀에 대해 알고 싶거나 계몽의 변증법을 꼭 읽어야 할 사람에게 좋은 가이드가 될 만한 책입니다. 책의 설명은 어렵지 않고, ‘계몽이나 변증법’, ‘부정의 부정’, ‘문화산업등의 용어들이 적절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책을 읽고 단어의 홍수속에서 헤매다가 지쳐버리는 불운을 겪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오디세우스 신화나 사드의 소설 줄리엣 이야기가 계몽이라는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한 부분도 본문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는 만큼 잘 다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산업과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도 무난하게 읽힙니다. 문화산업론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저자가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가 대중문화가 가지는 긍정적 영향을 과소평가하였다고 보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분류되지만 대중예술에서 긍정적 가능성을 더 많이 발굴하려고 노력한 벤야민의 입장과 아도르노(혹은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을 대비시켜보아도 알 수 있는 지점입니다. 파시즘에 대해서는 필요한 정도의 설명만 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 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해석이라기보다는 파시즘에 대한 개론서 수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난한 설명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분명 좋은 입문서이지만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좋은 책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김영사의 지식인 마을 시리즈 벤야민&아도르노에서는 대중문화 혹은 대중예술에 대한 두 학자의 엇갈리는 입장을 대조하는 것을 중심으로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사상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는데, 제 기억으로는 이 책도 아도르노나 벤야민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매우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지금 다시 두 책을 비교해서 읽어봐야 공정한 판정이 가능하겠으나, 서로 보완할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쉽게 접근하기에는 김영사의 지식인마을 시리즈가 수월할 것 같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식인마을 시리즈는 학교 교양 수업에서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을 채워주는 정도라면 이 책은 좀 더 고차원적인 논의를 쉽게 풀어내려고 했으나, 그것이 충분히 전개되지 않아서 원전으로 빨리 나아가야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책의 진정한 가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겠죠. 머지 않은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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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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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업 시간에 다소 분량이 많은 보고서를 쓰다 보면 가끔 부끄러운 일을 벌일 때가 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최소한 중요한 몇 장이라도 읽어보지 않고 대강 내용만 아는 책이라도 중요한 부분 몇 군데가 있다 싶으면 보고서에 인용하고 참고문헌 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도 필자 기억으로는 그런 부끄러운 일에 동원된 책 중 하나였다. 수업 시간에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적은 있었지만 책에 얼마나 풍부한 논의가 전개되는지 알지 못한 채, 몇 구절을 보고서에서 인용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두었어야 할 플라톤의 파이드로스공화국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에 책을 통독한다고 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자의 의도와 빗나간, 혹은 매우 주변적인 서술을 보고서에 핵심적인 내용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자가 좀 더 시간을 투자했어야 했다.

다행이도, 위에서 이야기한 책들을 세미나나 수업 시간의 교재로서 읽어보고, 박승관 교수의 독창적인 커리큘럼의 도움으로 구술성과 문자성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접한 후에 이 책을 정독해서 읽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지식들이 책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이 연설의 내용을 글로 써서 남기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했던 점이나 호메로스 문제라고 불리는 일리아드오디세이아의 원 저자에 대한 논쟁 등이 나온 배경을 알고 나니 이와 관련된 논의들이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구술하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에서 글로 남기는 것(특히 필사의 형태), 인쇄술을 도입하는 것, 컴퓨터를 도입하는 것 모두 기억을 외재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억의 외재화에 있어서 신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인간 기억력의 감퇴 이것은 사실상 인간의 지적 능력 감퇴와 동일시되었던 것 같다-를 우려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인간 커뮤니케이션이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바로 기억의 외재화 과정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기억의 외재화가 고도로 진행될수록 인간 뇌 구조에 변화가 발생하고, 이러한 변화가 디지털 치매등의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들도 단순히 ()기술적인 기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나름의 맥락이 존재하기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디지털 치매등에서 진지하게 제기된 걱정 또한 일리 있는 것으로 들린다. 결국 기억의 외재화와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인간 지적 능력 감퇴를 부추기는 경향 사이에 적당한 절충이 이루어지든지, 기억의 외재화를 진행하는 것과 별도로 인간 뇌를 단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최근의 경향은 기술이 모든 것의 열쇠라는 태도 즉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 등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이 곧 스마트하다는 것-에 편중된 것 같아서 시각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양측의 논의를 모두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저자도 쓰기라는 행위가 등장한 이후 구술문화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식의 재구조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재구조화가 인간 지적 능력의 퇴보인지, ‘문명화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단정적으로 내리지 않았을 뿐이다(저자는 구술문화가 야만, 원시 혹은 야생 등의 수식어와 주로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그들이 그렇다고 비논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볼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책을 다 읽고 필자에게 이 책이 주는 가장 강렬했던 메시지는 쓰기 문화가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인으로서, 한 번도 쓰기 문화 자체를 한 걸음 물러나서 조망해 본 적이 없었다는 그래서 전혀 당연하지 않은쓰기 문화의 관습과 의식 구조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원래 주어진 것으로 느껴졌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었다. 즉 구술문화와의 비교를 통해서 문자문화를 낯설게 볼 기회를 얻음은 물론, 대략 19세기 전까지 쓰인 고전들의(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상관없이) 서술 방식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고, 읽기 어려운 이유까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테두리에 묶이는 대부분 사상가의 글들이 난해하여 필자도 자신 있게 그 내용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공부가 짧은 나로서 알 길이 없지만), 과거의 글들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최소한 과거의 글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구술문화의 의식구조와 관습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보여주는 특징들이 있고, 이러한 특징들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적으로 해석하려고시도하기 때문에 글의 핵심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은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월터 옹이 이 책에서 세심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매클루언과 이니스(이니스는 매클루언의 스승이었고 매클루언이 '차가운 미디어(cool media)'와 '뜨거운 미디어(not media)'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의 저작들과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등의 핵심 저작들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동안 책꽂이 한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이 책이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 앞으로 공부할 책들을 훌륭하게 이어주는 허브(hub)의 역할을 하게 되어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 매우 뿌듯하였다. 이러한 뿌듯함이야말로 책을 읽는 가장 큰 보람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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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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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니체와 친하게 지낼 것은 권하기 위해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동안 다양한 오해와 거리감 때문에 접하기 힘들었던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니체의 모습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친구에게 좋은 니체 입문서로 이 책을 추천받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말이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읽었던 대부분의 책에서 니체를 이야기할때면, 꽤 무게를 잡고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그리고 니체를 직접 인용하는 사람들도 무게를 잡고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이 책은 독자들이 니체와 동류의식을 가지고 '웃으면서' 그의 사상을 접하고, 할 수 있다면 니체와 친해지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물로 니체의 저작을 읽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왕 읽겠다면 부담감으로 읽지 말고 즐겁게 읽으라는 것이지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으로 '웃어넘김'으로서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 니체 사상의 고갱이라면, 니체의 저작들을 통해 해당 글을 썼던 당시의 수많은 니체들을 만나는 일 또한 그렇게 가볍고 명랑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좋을 것은 분명합니다. 최소한 제가 저자의 의도를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물론, 저자가 니체에게 너무나 흠뻑 빠진 나머지, 독자들은 매우 기본적인 물음 즉, 저자가 얼마나 '객관적으로' 니체라는 철학자를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 최소한의 방어막은 유지한 채로 읽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사상가에 대한 입문서를 읽는 목적이 바로 그 사상가'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다보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니체주의자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낄 대목이 종종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책의 독자들 중 누군가는 니체주의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성격 상, 그런 일은 니체의 저작을 더 많이 읽어본 다음에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책의 전체적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니체에 무관심한 사람이 이런 입문서를 쓰는 것도 부조리하고, 니체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 니체 입문서를 쓸 일도 없으니 결국 제대로 쓰려면 니체를 많이 '사랑하기에' 그를 향한 길을 제대로 터줄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 쓰는 것이 훨씬 낫겠지요. 책을 다 읽은 후에 당장이라도 '니체주의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니체의 저작을 읽어볼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건 전반적으로 이 책이 좋은 입문서라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니체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거의 백 년이 다 돼 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니체라는 이름과 몇 가지 소문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니체 이해가 어렵다는 건 어다니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유행과 이해의 괴리가 우리만큼 큰 곳이 또 있을까. '제대로 된 오해라도 하고 싶다!' 니체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철학이라는 영토에 거주하지 않는 주민이라면 누구나 드는 생각이 아닐까.

저자가 철학이라는 영토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다시 철학을 '고상한 영역'으로, 철학의 왕국에 거주할 수 있는 자들을 '고상한 자'들로 만드는 것 같아서 이 인용구를 읽는 마음 한켠에 씁쓸함이 남기는 하지만, 저자가 날카롭게 지적한대로 니체는 우리에게 실체보다는 흐릿한 그림자처럼 다가온 적이 많습니다. 때문에 색이 조금 덧입혀졌다고 하더라도, 니체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쓰고자 한다면, 저도 얼마 전 저에게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 친구는 분명히 어차피 '입문 후'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영역이라고 저를 믿었을 것이로, 저 또한 그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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