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평점 :
절판


 

학교 수업 시간에 다소 분량이 많은 보고서를 쓰다 보면 가끔 부끄러운 일을 벌일 때가 있다.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고, 최소한 중요한 몇 장이라도 읽어보지 않고 대강 내용만 아는 책이라도 중요한 부분 몇 군데가 있다 싶으면 보고서에 인용하고 참고문헌 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도 필자 기억으로는 그런 부끄러운 일에 동원된 책 중 하나였다. 수업 시간에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적은 있었지만 책에 얼마나 풍부한 논의가 전개되는지 알지 못한 채, 몇 구절을 보고서에서 인용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읽어두었어야 할 플라톤의 파이드로스공화국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에 책을 통독한다고 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자의 의도와 빗나간, 혹은 매우 주변적인 서술을 보고서에 핵심적인 내용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자가 좀 더 시간을 투자했어야 했다.

다행이도, 위에서 이야기한 책들을 세미나나 수업 시간의 교재로서 읽어보고, 박승관 교수의 독창적인 커리큘럼의 도움으로 구술성과 문자성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접한 후에 이 책을 정독해서 읽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지식들이 책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많이 되었는데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이 연설의 내용을 글로 써서 남기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했던 점이나 호메로스 문제라고 불리는 일리아드오디세이아의 원 저자에 대한 논쟁 등이 나온 배경을 알고 나니 이와 관련된 논의들이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구술하고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에서 글로 남기는 것(특히 필사의 형태), 인쇄술을 도입하는 것, 컴퓨터를 도입하는 것 모두 기억을 외재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기억의 외재화에 있어서 신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인간 기억력의 감퇴 이것은 사실상 인간의 지적 능력 감퇴와 동일시되었던 것 같다-를 우려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인간 커뮤니케이션이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바로 기억의 외재화 과정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기억의 외재화가 고도로 진행될수록 인간 뇌 구조에 변화가 발생하고, 이러한 변화가 디지털 치매등의 현상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들도 단순히 ()기술적인 기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나름의 맥락이 존재하기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디지털 치매등에서 진지하게 제기된 걱정 또한 일리 있는 것으로 들린다. 결국 기억의 외재화와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인간 지적 능력 감퇴를 부추기는 경향 사이에 적당한 절충이 이루어지든지, 기억의 외재화를 진행하는 것과 별도로 인간 뇌를 단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최근의 경향은 기술이 모든 것의 열쇠라는 태도 즉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입는 컴퓨터(wearable computer) 등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이 곧 스마트하다는 것-에 편중된 것 같아서 시각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양측의 논의를 모두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저자도 쓰기라는 행위가 등장한 이후 구술문화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의식의 재구조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재구조화가 인간 지적 능력의 퇴보인지, ‘문명화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을 단정적으로 내리지 않았을 뿐이다(저자는 구술문화가 야만, 원시 혹은 야생 등의 수식어와 주로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하지만 그들이 그렇다고 비논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이라고 볼 근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책을 다 읽고 필자에게 이 책이 주는 가장 강렬했던 메시지는 쓰기 문화가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인으로서, 한 번도 쓰기 문화 자체를 한 걸음 물러나서 조망해 본 적이 없었다는 그래서 전혀 당연하지 않은쓰기 문화의 관습과 의식 구조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원래 주어진 것으로 느껴졌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었다. 즉 구술문화와의 비교를 통해서 문자문화를 낯설게 볼 기회를 얻음은 물론, 대략 19세기 전까지 쓰인 고전들의(문학이든, 비문학이든 상관없이) 서술 방식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고, 읽기 어려운 이유까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테두리에 묶이는 대부분 사상가의 글들이 난해하여 필자도 자신 있게 그 내용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공부가 짧은 나로서 알 길이 없지만), 과거의 글들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최소한 과거의 글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구술문화의 의식구조와 관습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보여주는 특징들이 있고, 이러한 특징들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적으로 해석하려고시도하기 때문에 글의 핵심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은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월터 옹이 이 책에서 세심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매클루언과 이니스(이니스는 매클루언의 스승이었고 매클루언이 '차가운 미디어(cool media)'와 '뜨거운 미디어(not media)' 개념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의 저작들과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등의 핵심 저작들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 동안 책꽂이 한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이 책이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 앞으로 공부할 책들을 훌륭하게 이어주는 허브(hub)의 역할을 하게 되어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 매우 뿌듯하였다. 이러한 뿌듯함이야말로 책을 읽는 가장 큰 보람 중 하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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