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과 세계 ㅣ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은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두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저자의 말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더 병든 인간은 더 책에 집착한다는 말도 옳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이 말이 그럴듯하게 들릴 하나의 예시를 들라고 하면 난 20대 남성들 중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집단 중 하나가 군인이라는 점을 자신 있게 내세우고 싶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병적으로’ 남는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고자, 혹은 자유로웠을 때 할 수 있었던 다른 많은 여가들과 차단된 채 그들이 남의 시선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활동이 독서이다. 책의 종류가 ―복무 형태에 따라 검열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지만―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서라도. 군복무라는 단체생활 속에서 가장 개인적으로 하는 행동 또한 독서일 것이다. 기상부터 취침까지, 운동부터 TV 시청까지 군대에서 개인적으로 행하는 행동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굳이 선·후임이 보는 책을 같이 보려고 하지 않는 이상, 독서는 근대 이후로 익숙해진 바로 그 방식(혼자 읽는 묵독의 방식)을 존중받는다. 같은 부대 안에서도 현실에 더 잘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책을 열심히 읽는 것 같다. 내 주위를 들어보면 대부분 그렇다. 물론 군대 문화에 더 잘, 더 빨리 녹아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고 믿는데, 여하튼 그 문화에 ‘더 잘’, ‘더 빨리’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책에서 더 큰 위안을 찾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구절 뒤에 더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지만, 이 부분에서 너무 많은 것들이 ‘확 느껴져서’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갈 길로 돌아와서 저자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책 자체가 아닌 세계, 즉 책이 놓인 공간 속에서 책의 의미를 살펴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언명의 비진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책, 넓게 말해서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났다. 즉, 세계가 텍스트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어느덧 텍스트는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거짓을 앞세워 자신에 앞서 있던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텍스트는 그것 자체로 일정한 힘까지 가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세계와 일치하는 점이 전혀 없는 텍스트도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분열인 동시에 세계의 분열이다. 결국 이것은 세계의 불행이며 그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불행이다.
현대 철학서적들이 읽기 어려운 것이 과연 독자들의 지적 능력이 나날이 하향평준화 되고 있기 때문인걸까? 그것들이 ‘세계를 희롱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점점 독자들은 텍스트를 이해할 현실의 준거점을 찾기 힘들어지고 텍스트에 끌려 다녔던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텍스트들이 그렇다고 말하며 자신 있게 독서를 거부하는 것도 다른 극단에서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닌 것 같지만, 분명히 ‘쓸데없이 어렵게 쓰는 책’들의 저자는 그 어려운 문장을 자부심으로 느끼지 말고 저자의 이와 같은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쓸데없이 어렵게 쓴 책을 어떻게든 잘 이해했다고 자부하며 그것이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과연 그것이 ‘정말로 대단한 능력’인지 곱씹어보아야 하겠지만. 혹자는 이러한 냉소가 반지성주의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름 높은 학자들의 책이 ‘높은 이름’ 만큼 어려운 말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또한 원래 설명하려는 대상 자체가 너무나도 어려운 경우와, 충분히 더 간단하게 이야기할 것을 포장하면서 난해함이 추가된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핵심은 텍스트를 그 이상의 무언가로 보지 말고 그것이 탄생한 배경과 그것이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책의 중간 내용은 간결했고, 재미있었지만 부분적으로 익숙한 내용들이 많았고,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한 해석은 관련 분야의 다른 학자들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었기에 끄덕거리면서 읽었지만(그리고 그 해석에 필자도 동의한다), 아담 스미스에 대한 부분은 『국부론』에 너무 치중하여 최근 각광받는 스미스의 ‘다른 면’을 보려는 시도가 누락된 것 같아서 아쉬웠다. 매체에 대한 이야기는 더 들어봐도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짧게 마무리된 감이 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 내용들 자체만으로 책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런 내용들을 엮어내는 저자의 큰 문제의식이 매력적이었기에, 권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에필로그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어보자(본문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이 몇 군데 있지만 그것들 보다는 시작과 끝이 더 인상 깊었다).
20세기는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에릭 홉스봄이다-필자 주) ‘극단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극단은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15세기 아래 면면히 준비되어온 것들이 표피를 뚫고 터져 나온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갈 수 있을 뿐이다. 개념적 파악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파악 불가능을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이론은 현실에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것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가? ‘놀라운 일이다, 사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말이다.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이런 말투였다. 회의적이지만 딱히 비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한 번 해보시게,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 해보시게’ 라고 말하는 동네 어르신의 말을 듣는 것 같다. 저자의 목소리가 그가 인용했던 홉스봄처럼 버릴 수 없는 희망(그는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않았기에, 그 염원을 담아 극단의 시대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책을 내고서야 세상을 떠났다)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모든 것을 놓자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걸 매력이라고 해야 할지, 불친절함이라고 해야 할지 살짝 고민되기는 한다. 사실 앞으로도 계속 ‘텍스트를 읽고 싶은’ 나에게는 매력보다는 불친절함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승이 너무 친절하면 제자가 제대로 못 큰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불친절함은 매력은 아닐지라도, 독자가 더 찾아서 움직이게 하는 ‘마력’은 될 것이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라도, 한 번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