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지속의 사라짐>

죽음에 대한 나의 입장은

닥치는 순간 그냥 맞이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려움이 나를 잠식하지 않게 하자는 것.

그때까지는 내세라는 믿음으로 나의 두려움을 숨기는 것.

이런 책을 읽을수록, 그것 외에는 결국 방법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밑줄을 치고치고 끝없이 쳤는데,

결국은 마지막 장을 읽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썸머 롱><열세살의 여름>

청소년을 위한 그래픽 노블.

여름에 관한 내용이어서 그런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시 한국의 이윤희 작가의 <열세살의 여름>이 더 공감이 많이 갔다. 98년도 즈음의 열 세살 아이를 그렸는데, 교실 나무 바닥을 왁스를 부어가며 손걸레질 하는 장면에서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었다. 책에서처럼 학급에서 쓰는 큰 통의 왁스도 있었지만 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왁스도 있었는데 한때는 비누모양의 왁스도 있었고, 케첩모양처럼 액상으로 되어있어서 짜서 쓰는 왁스도 있었더랬다. 왁스의 유행에 따라 문방구에서 사서 쓰는 재미? 가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 재미를 모른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정신을 차리니, 아이들이 전래동화 듣듯 신기해하며 듣

고 있었다.

 

여하튼 주인공보다는 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아이, 우진이가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아무리 어린 아이의 사랑이라지만 그래서 그 너무나 서툰 마음이  사랑스러웠고, 가슴 아렸다. 그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는 걸까?

주인공의 절친 진아와의 우정도 작가가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둘은 서로 다른 중학교에 배정을 받고도 우정이 계속 지속될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들의 첫사랑처럼 아마도 그들의 우정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그렇게 익숙함과 좋아하는 것들을 다 지나쳐 보내고 다른 세계에 속함으로써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어른이 되는 것임을.

그래도 읽으면서는 나와는 다르게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었으면 하고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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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눈 꾹 감고 잊는다 해도 인간은 죽는다. 그렇게 죽을 운명이지만 수의를 준비해 둔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면 죽음을 감출 수 있을 것만 같다. 요양원에 갈 날짜를 받아놓은 할머니만 사망 진단을 받은 것러첨 죽음을 앞당긴 기분에 사로잡힌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할머니는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평생 같이 살던 자식들과 떨어져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맡겨지는 순간, 할머니의 일상은 정상에서 비정상적인 삶으로 전환하게 된다.
- P14

인간이 동물과 달리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은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쫓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죽음을 삶의 대척점으로 놓으면서 삶을 가장 강렬한 것으로 바꿔 놓는 것에 있다. 생명을 보존하고 본능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삶의 목적을 둘 것인지,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의 한계상황을 뛰어넘는 내적 삶에 몰두하여 실존적인 자기 의식을 충실화할 것인지는 인간이 선택해야 할 존재양식이다.
- P18

우리는 모두 죽는다.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사건이지만 개인에게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사건이다.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은 직접 경험해서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 P18

죽음은 생명의 종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불행으로 죽음을 의식하여 허무주의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존적 삶의 차원으로 죽음을 경험할 것인지에 따라 삶과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죽음은 단지 "실존의 자기의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상황으로서의 죽음 앞에 자신의 의식이 충실화되는 것"이라는 야스퍼스(Karl Jaspers)의 말처럼, 죽음의 인식 방식에 따라 삶이 질적으로 바뀔 수 있다.
- P19

이처럼 나는 나 홀로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죽는다는 사실은 개별적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하나의 운명이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의 바깥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에게 권하면서, 죽음에 처한 타인을 향해 ‘우리‘의 가능성으로 나눔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먼저 오는 타인의 죽음과의 관계에서, 그 죽음에 정서적으로 개입하면서 나는 비로소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그 세계 속의 나, 나의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 두렵지 않게.
- P21

죽음에 대한 고뇌에 찬 인식은 가장 오래된 무덤들에 나타났다. 전기 구석기 시대의 인간에게 죽음은 이미 너무도 무거운 의미의 것이었고, 따라서 오늘날처럼 가족의 시체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기 구석기 시대에 나타난 죽음의 인식에 이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나타난 에로티즘의 인식은 죽음과 희열이라는 상반된 명제를 깊은 연관성 속에 올려놓는다. 죽음과 희열의 결합은 삶을 위한 타협이었다.
삶은 죽음에 위협받으면서, 그리고 비교되면서 초라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드톻였다. 육체의 부패와 죽음의 내새는 삶에 대한 몸서리치는 열정의 대가여야만 했다. 죽음이 반드시 뒤따라야 그 삶은 아름다웠다.
- P53

개체가 부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죽음의 실체인 것이다. 그가 사라진 것은 그의 존재성에서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문제가 될 게 없다. 그 한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고 지속된다. 개별의 죽음이 이엉지는 것처럼 개별의 삶도 이어져 세상은 그대로 남고 변하는 게 없다. 삶 속에 내재해 있는 내밀한 죽음의 질서에 의해 죽음은 또 삶의 내밀한 질서가 되는 것이다.
- P63

반감이나 상호 적대감, 반발심에 대한 대체 태도로서 지적이고 상호 무관심하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냉담한 태도가 나타난다. 대도시에서 적응하려면 이러한 보편적 정서에 적응해야 한다. 비록 군중 속에서 외롭고 쓸쓸하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강물에 휩쓸려가듯이 저절로 떠밀려 가는 삶 속에서 더 편리해진 부분도 있고 그만큼 자유로움도 따랐다. 그 자유로움은 어쩌면 외부로부터 결정되고 조립되었으면서도, 인간은 여전히 스스로가 자율적이며 자발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믿고 있다.
- P108

바타유의 말처럼 출생과 사망, 또는 특정 사건들이 다른 존재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그 사건들에 직접 관계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나는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어야 한다. 우리라고 묶인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죽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니다. 이갈라놓음이 하나의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 뀌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 준다. 이 깊은 간격은 피할 수 없는 심연을, 허무를, 그리고 고독을 자아낸다.
- P109

길이 언덕 위로 내내 구불구불한가요?
네, 맨 끝까지 그래요.
오늘 여정은 하루 종일 걸리나요?
아침에 떠나 밤까지 가야해요, 친구여.
그런데 밤에 쉴 곳은 있나요?
서서히 저물 때쯤 집이 보일 거예요.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나요?
그 숙소를 못 찾는 일은 없을 거예요.
밤에 다른 여행자를 만나게 되나요?
먼저 간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그러면 문을 두드려야 하나요, 보이면 불러야 하나요?
당신을 문 앞에 세워 두진 않을 거예요.
여행에 지치고 약해진 몸이 위안을 찾게 되나요?
애쓴 만큼 대가를 얻을 거예요.
나와 찾아온 이들 모두의 잠자리는 있나요?
그럼요, 찾아오는 모두를 위한 잠자리가 있지요.

(로세티, 「언덕 위로」)
- P136

나의 죽음은 내가 죽는 순간 슬픔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내가 모두 겪어 내야 할 고통과 슬픔을 남겨준다. - P140

인간은 그렇게 유한하며 무의미성 앞에 직면한다. 이러한 자기 생명이 무의미하게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예방하고 연기하고 대비하는 일에 전념한다. 즉 생명 보존의 세속적인 일에 모든 관심을 쏟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보존과 본능적 용망 충족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으로는 죽음의 압도적인 불행을 막을 수가 없다. 그것은 죽음을 더 낯선 것으로 만들고 죽음에 당면한 순간에 더 큰 절망과 몰락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든다.
- P146

(...)삶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의 느낌이란 것이 인간에는 있다. "이게 다일까?"하는 죽음 뒤의 ‘무‘에 대해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인간은 인간을 제약하는 시간성에 대항하는 영원에 대한 충동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에의 의지이다. 죽는다는 한계상황과 마주했을 때 자신의 자유를 의식하고 삶의 과제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유한한 존재가 아닌, 불사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다.
- P146

부모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답이 구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의 위대한 유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출현할 아직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 때문에, ‘지금 넘어질 수도 있다‘는 의식으로 불안에 떨지는 않아도 된다.
- P152

이때 삶이 중요해진다. 이때의 삶은 정신의 삶이다. 헤겔의 말처럼 정신의 삶이야말로 "절대 고통 속에서 자신을 되찾으면서 죽어야 한다는 진실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의 삶이란 죽음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뒷걸음치며 파괴로부터 어떤 상처도 없이 자신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지니고 있는, 그래서 죽음 자체에서 유지되는 삶을 말한다. 이 말은 수동적으로 펼쳐지는 단순한 갊이 아니라 현재를 영원처럼 사는 삶이다. 모든 위험을 받아들이면서 삶을 총체로서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단지 ‘무‘로 만들지 않는 길이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인 것이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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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오웰과 헉슬리에 비견되는 이 소설이

나에게는 오히려 <호밀밭의 파수꾼>의 계보를 잇는듯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혼자를 기르는 법>

읽고나니 혼자 살고 싶어졌다. 간절하게.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우울하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그런 감수성이나마 살아나는 혼자있음이 되려 부럽고 용기있어 보였다.

사회의 부조리, 폭력, 고독에 대해 고민 할 기운도, 능력도 없고 나 스스로를 길러낼 힘도 없이 - 그 와중에 누군가를 기르고 있기까지 한!!! - 그야말로 태엽처럼 굴러가는 나의 삶이라니.

나는 너무 늙어버렸는가보다.

 

<일의 기쁨과 슬픔>

재미있게 읽었다. 직장인의 삶이란, 여자의 삶이란, 삶, 삶, 삶이란, 삶이란.....

그래도 너무 우울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고.

 

<인생은 아름다워>

아주 어렸을 적에 봤던 영화인데, 다시 봐도 좋았다.

아이들과 같이 보니 주인공을 보고선, "저 아빠 너무 불쌍하게 사는 것 같아."란다.

원래 부모란 그런거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또 그런 부모가 못되니 입을 다물밖에.

여하튼 쟁이란 정말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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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도움의 손길‘ 中)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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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이라고 불린 집에서 그날 밤 내가 찢어발긴 종이 위의 이름을 보았어. 그 이름은 무슨 태엽 달린 오렌지에 대한 이야기였지. 바흐를 들으면서 그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해하게 되었고, 그 오랜 독일 거장의 아름다운 갈색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인간들을 더 세게 패주고 갈가리 찢어 마룻바닥에다 내팽개치고 싶다고 생각했지.
- P44

그 일요일 아침 신부는 책을 펼쳐 말쌈을 들어도 눈곱만치도 받아들이지 않는 놈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세워진 집 같아서 비가 퍼붓고 하늘을 찢는 천둥이 내리칠 때 그런 집처럼 끝장이라는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읽었지. 그러나 나는 멍청한 놈들만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또 그런 놈들은 으레 그런 집을 짓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를 말해 주지 않는 아주 냉정한 동무들과 고약한 이웃들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
- P96

착하게 되는 것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6655321번. 착하게 된다는 것은 아주 끔찍한 일일 수도 있어. 말하고 보니 자기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번 일 때문에 며칠 동안 잠 못 들어 할 거야.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 P114

넌 지금 기도의 힘이 닿지 않을 곳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란다. 생각만 해도 아주 끔찍한 일이군.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제거당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때, 넌 진짜로 선을 선택한 것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구나. 신이 우리 모두를 돌보시겠지, 6655321번,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 모든 일이 잘될지도 몰라, 누가 알아? 신은 신비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니까.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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