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일이다. 설악산은 지방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단골코스였다. 산길로 올라가는 한줄은 대구에서 온 학생들이었고, 내려오는 한줄은 광주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올라가는 대구 학생 1천여명과 내려오는 광주 학생 1천여명이 스쳐지나가는 시간에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까...‘침묵‘이었다.
저쪽 학교 학생에게 말을 걸 필요는 없었겠지만,
흥미로운 것은 앞뒤의 자기 반 친구와도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구 학생들도 그랬고, 광주 학생들도 그랬다.
서로의 사투리를 저쪽 학생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로 스쳐지나갈 때까지.
설악산이 거대한 침묵의 공간이 되었다.
지금까지 겪은 수많은 경험 중 가장 괴이한 일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무엇을 합의했던 걸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저 ‘감‘으로 그렇게 했다.

(33. 8년간의 침묵 中)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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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더기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먹이를 충분히 공급받았어. 그는 생각했다. 우리가 있었던 곳 어디에서든 넘칠 만큼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지.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더기들에게는 황금의 시대였어. 우리는 구더기들에게 썩은 고기를 무더기로 떠안겼던 거야. 병사들의 고기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고기, 아이들의 고기, 그리고 폭탄에 의해 찢어발겨진 노인들의 무른 고기. 모든 것이 너무나 풍성했지. 구더기들의 전설 속에서 우리는 몇 세대에 걸쳐 풍성함을 내려 준 마음씨 좋은 신으로 기억될 거야.


- P42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고 하늘의 별들은 더 밝게 빛났다. 그들은 별을 원망했다. 별빛에 비행기의 시계(視界)가 양호해지기 때문이었다. 자연 그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만 전쟁과 결부되어야만 좋고 나쁨이 결정되었다.


- P80

"(...) 자네는 이런 선물을 받을 만큼 돌격대 간부들을 잘 아는가?"
그래버가 요제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대장하고는 친했어요. 악의도 없고 선량한 사람이었죠." 그가 말했다.
요제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동시에 그런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십니까?" 그래버가 물었다.
"자네는 믿는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유부단하거나 근심 걱정이 많거나 마음이 약해서 협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집단 수용소 대장들 중에 유머를 갖춘 사람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동지애를 갖춘 친위대원도 있어. 그리고 애써 세상의 선한 면만을 보면서 끔찍한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리거나 그것을 일시적이거나 엄혹한 필연으로 여겨 버리는 동시대인도 얼만든지 있어. 그들은 말하자면 탄력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지."
"두려움에 떠는 인간도."
"그래, 두려움에 떠는 인간도." 요제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P423

일선에서는 포성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졌고, 결속된 존재들이 모두 산산이 픝어지는 듯했다. 그래버는 이런 느낌을 알고 있었다. 한밤에 문득 깨어나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를 떄 종종 이런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둠 속에서 완전히 홀로 되어 둥둥 떠다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언제나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될 거라는 나지막하고 이상한 느낌이 남았다.


- P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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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위험한 요리사 메리>를 읽었다.

<바베트의 만찬>는 한 사람의 예술혼에 대한 이야기,

<위험한 요리사 메리>는 의료 윤리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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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자금이 없습니다>  는 기대한 것과는 다른 책이었다.

노후자금을 모으지 못한 채, 부모를 부양하고,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중년 세대의 현 실태를 나름 현실적이고 위트있게 그려낸 책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기대를 넘어 끝부분에는 약간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책을 덥었다.

그냥 쉬엄쉬엄 읽을만한 책이지만 씁쓸한 웃음을 참을 수 없달까?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나는 아무리봐도 예민한 축에는 못드는 사람이라 큰 도움은 못되었지만,

읽으면서 나도 좀 예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 더 날카롭게 삶을 벼리면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물론 저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겠지만 말이다.

 

<매우 혼자인 사람들의 일하기>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인터뷰집이나, 혹은 이런 여러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 놓은 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여하튼 아주 잘 읽었다.

혼자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생활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혼자 잘 살고, 잘 놀수 있는데

일을 할 때는 이상하게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으싸으싸 북돋워가며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일의 결과와는 다르게 그런데서 일의 성취감을 느낀다.

혼자 일하면 무섭고, 내가 잘 가고 있는 지 확인할 길이 없다. 나는 누군가에게 자꾸 묻고, 확인받고, 응원받으며 일하고 싶어하는 스타일인 것이다.

여하튼 그래도 한쯤은 혼자 일하는 직업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대부분 창작을 주로 하는 일이라 단지 그런 면에서 끌리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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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즉흥적으로 재미있게 찍을 만한 영상이 떠올랐을 때 그걸 찍어서 올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런 빛나는 아이디어에만 의존하면 지속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머릿속이 늘 빛나진 않으니까요. 프리랜서는 빛을 믿으면 안 됩니다. 영감은 매일 찾아오지 않습니다. 프리랜서의 생명은 성실성과 끈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일하다보면 영감님이 이 양반은 누구인데 이렇게 매일 문을 두드리냐면서 가끔 얼굴을 비추는 것입니다.

(프리랜서의 시간여행을 위한 학기 가이드 中 / 김겨울)

- P16

능동형 외톨이가 되면 좋은 점은, 외톨이가 될 확률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외톨이니까 외톨이가 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외톨이는 극복해야 하는 문제 상황이 아니다. (...)
다른 예술 장르와 마찬가지로 시도 재능과 함께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잠깐 머문다. 결국 나에게 친구는 나뿐인 건가. 분명한 건, 혼자서는 경쟁할 수 없지만, 혼자 있으면 경쟁력이 생긴다. 글을 쓰는 자는 모이면 소문을 만들 확률이 크고, 흩어지면 글을 쓸 확률이 트다.

(파비앙, 내가 보이니? 中 / 김개미)

- P34

내가 서둘러 하는 일은 오직 글이다. 무언가가 떠오르면 1초도 미루지 않는다. 글을 휘발성이 강해서 나중에 쓰려고 하면 생각조차 안 난다. (...) 그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를 쓸 기회는 한 번뿐이다. 시는 후하지 않다. 나를 택했을지언정,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파비앙, 내가 보이니? 中 / 김개미)

- P39

나는 시에 인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친구보다는 가깝고 애인보다는 먼, 쌍둥이 동생 정도로 설정해놓는다. 그래서 나의 시는 거의 나지만 정확히 나는 아니고, 나의 분신이지만 나에게서 독립된 무엇이다.

(파비앙, 내가 보이니? 中 / 김개미)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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