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더기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먹이를 충분히 공급받았어. 그는 생각했다. 우리가 있었던 곳 어디에서든 넘칠 만큼 풍성하게 먹을 수 있었지.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더기들에게는 황금의 시대였어. 우리는 구더기들에게 썩은 고기를 무더기로 떠안겼던 거야. 병사들의 고기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고기, 아이들의 고기, 그리고 폭탄에 의해 찢어발겨진 노인들의 무른 고기. 모든 것이 너무나 풍성했지. 구더기들의 전설 속에서 우리는 몇 세대에 걸쳐 풍성함을 내려 준 마음씨 좋은 신으로 기억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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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고 하늘의 별들은 더 밝게 빛났다. 그들은 별을 원망했다. 별빛에 비행기의 시계(視界)가 양호해지기 때문이었다. 자연 그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다만 전쟁과 결부되어야만 좋고 나쁨이 결정되었다.
- P80
"(...) 자네는 이런 선물을 받을 만큼 돌격대 간부들을 잘 아는가?" 그래버가 요제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대장하고는 친했어요. 악의도 없고 선량한 사람이었죠." 그가 말했다. 요제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동시에 그런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십니까?" 그래버가 물었다. "자네는 믿는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유부단하거나 근심 걱정이 많거나 마음이 약해서 협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집단 수용소 대장들 중에 유머를 갖춘 사람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동지애를 갖춘 친위대원도 있어. 그리고 애써 세상의 선한 면만을 보면서 끔찍한 일에는 눈을 감아 버리거나 그것을 일시적이거나 엄혹한 필연으로 여겨 버리는 동시대인도 얼만든지 있어. 그들은 말하자면 탄력적인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지." "두려움에 떠는 인간도." "그래, 두려움에 떠는 인간도." 요제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 P423
일선에서는 포성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졌고, 결속된 존재들이 모두 산산이 픝어지는 듯했다. 그래버는 이런 느낌을 알고 있었다. 한밤에 문득 깨어나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를 떄 종종 이런 기분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둠 속에서 완전히 홀로 되어 둥둥 떠다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언제나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될 거라는 나지막하고 이상한 느낌이 남았다.
- P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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