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을 읽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작가 본인의 말처럼 문장 하나하나에 공들였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다. 밑줄치고 읽기엔 밑줄 치지 않은 문장이 더 많아 할일 없는 짓이 될 모양새라 그냥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어가며 읽었다.

 

좋은 글 쓰는 법에 대해서도 새롭게 배운 것이 많다.

짧게 쳐서 쓸 것, 부사는 거를 것, 접속사도 쓰지 말 것. 강약중강약처럼 문장도 사이사이 힘을 빼 줄 것.

읽다보니 그러네, 간결한 문장이 아름답구나, 하게 되었다.

퇴고도 더 성실히 해야 한다는 것도.

 

나중에 은유 작가의 글쓰기 수업에 참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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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어령씨가 이미 40년 전에 발간하여 다시 수정 보완했다는 이 책은 내가 대학 시절 읽어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내 정체성을 인식하고 정립해나가는 문제에 있어서조차 갈등과 혼란이 거듭되는 30대의 어린(?) 나이에 작가는 이웃과 민족에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문화에 애정과 비판의 눈으로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존경심을 느낀다.

 

우리의 추악하고, 어둡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는 것이 처음에는 불쾌하게 여겨졌으나 절망은 애정에서 오는 것이며 자기 환멸조차 자존심을 가진 자만이 느낄 수 있는지라 수긍하고 이해하며,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의 모습으로 그저 우리 민족의 것으로 지나쳐왔던 모습들을 그는 풍경너머로 보여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뒷모습과 상처를 그려내고 있었다.

 

흙과 바람과 구름과 같이 쏠리며 밀리며 살아온 조상들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몇가지 남기고 싶다.

 

새도 울고, 촛불도 울고, 쇠북소리, 여울목소리, 심지어 일목일초도 우는, 잘 울어야 효자요, 충신이며, 열녀였던, 억울해서 울고 배고파서 울었던 슬프디 슬픈 민족은 모든 산천초목도 운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2. 황새야, 황새야 뭘 먹고 사니~

떡 해먹자 부엉. 양식 없다 부엉.

겨울이 오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아침 잡수셨습니까?

가는 손님 뒤꼭지가 예쁘다.

더위도 먹고 공금도 먹고 욕도 먹고.

 

배고픈 설움이 가장 컸던 장구배의 우리 선조들의 먹는 타령은 끝도 없다.

 

3. 홀로의 운명에 맡겨지는 주사위와는 달리 서로 얽히고 연관 지어 전체의 운명을 연결 짓는는 윷놀이는 우리의 파당, 삼족을 멸했던 벌, 현대의 지역주의로까지 이어진 한국사회의 풍토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는지.

 

4. 며느리밑씻개, 여우오줌, 쥐오줌풀, 꼬딱지나물, 개불알꽃, 기생풀, 개똥벌레, 피나무, 가시나무, 구기자나무, 사시나무...... 가냘프고 힘없는 초목에 어찌 그리도 살벌하고 경계에 찬 이름들을 붙이게 되었을까. 서양인들이 애틋한 로맨스를 담아 이름 붙인 달맞이꽃도 우리는 도둑놈꽃이라 부르니, 상상력의 억눌림이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없었을까.

 

5. 눈치만 빠르면 절간에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

일본을 정탐하러 갔던 사신들의 눈치보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채 나는 눈빛을 보니 침략이 예상된다고 한 황윤길. 그들의 눈빛이 쥐새끼 같이 생겨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리라 고했던 김성일.

기본 원칙이나 논리가 통하지 않았던 부조리 사회에서는 과학적 분석보다는 눈치가 필수적 지혜렷다.

 

6. 위급을 당한 경우 주체성을 지닌 내게 힘을 보태달라고 외치는 “HELP ME!”가 아닌, 완전한 절망, 포기, 무력, 자신의 죽음을 선언해버린 사람 살려!”.

원병을 청할 때도 도와 달라가 아닌 살려달라고 매달렸으니 그들의 횡포에 아무런 불평조차 못했던 우리 조상님들.

 

7. 격투가 치열한 서양인들은 악수를 하고 손을 맞잡아야 총을 쓰지 않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했다. 일본인은 피를 봐야 싸움이 끝나는 닭싸움이라면 우리네 싸움은 장죽을 물로 침을 튀기는, 고작 삿대질에 불과한 고양이 싸움이었다. 이웃에게 원조와 동정을 구하는 의존된 싸움. ᄊᆞ움도 아닌 평화도 아닌 우리의 휴전 상태도 민족의 유산인가.

 

8. 서구의 버튼과 우리의 끈

옷고름, 갓끈, 땋아내린 머리, 댕기, 대님. 고립되는 경우를 끈 떨어진 연이라 표현할 만큼 끈의 지배를 받아왔다.

아버지와 아들, 부부간, 임금과 신하, 할아버지와 손자. 칡넝쿨같이 엉킨 사회구조에서 너와 나를 구별할 수 없고 가 없이 우리만 존재하는 의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학연, 지연, ‘줄을 잘 서야 된다는 끈나풀 사회.

 

9. 우리의 화투에는 송죽, 매화, 공산명월, 국화, 단풍 등 자연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서양인들의 트럼프는 퀸, , 다이아몬드(재물 상징), 하트(증식), 스페이드(), 클로버(농업)의 그림이 가득하다. 그들의 인간의식과 우리의 자연 의식.

우리가 사군자가 그려져 있는 병풍 안에 갇혀있을 때 그들은 계급 의식, 상업의식을 가진 진취적 사고를 키우고 있었다.

 

9. 이젠 멍석을 말고 팽이채를 꺾어라.

우리 민족을 다스릴 때 때려야 된다는 비유로 팽이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던 짓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안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억압과 폭력보다 신나게 해 주어야 잘한다. 자유롭게, 흥을 돋우어 주어야 하는 민족이다. 우리가 아직도 이 낙후한 벌판에서 방황하는 것은 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따스한 칭찬이 그리워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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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과 마종기 시인의<마흔 두개의 초록>을 읽었다.

 

시인이란 어찌 저렇게 아름다운 문장들을 뽑아내는 것인지

문장 문장마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일년에 시집이라야 한권을 읽을까 말까 했는데

갑작스럽게 시를 읽게 되어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시집은 결고 빨리 읽을 수 없는 것인데

 

독서란 이렇게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왜 책을 빨리 읽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내가 그 동안 책 읽는답시고 읽고 못알아본 별같은 문장들이 이제야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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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워낙 길눈이 밝지 못했던 나는 두 발을 땅에 딛고 걸어야만 마음이 안정되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골목 골목 갔다가 되짚어 나오고 급기야는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야 했으니까. 그러자니 남의 집도 들여다봐야 했고, 상점도 기웃거렸으며, 전봇대에 붙여진 하숙집 광고에도 의미를 두어야 했다. 누가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줄 것인지 인상을 살피는 것은 기본이고.

그렇게 걷기를 시작했고, 즐기기가 계속되었다. 등산이 취미가 된 것도 이 걷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행의 맨 뒤에 쳐져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재미는 정상에 오르는 모든 이라고 다 누리는 것이 아닌 나만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걷기 예찬>을 읽으며 오랫동안 누렸던 즐거움이 단순한 기쁨만이 아니였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걷기는 헝클어진 삶이나 빗나간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고, 동반자 없이 걷기는 내 존재의 희비, 깊은 사색, 기쁨, 슬픔을 동요 없이 다스리게 해주어 건강한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내 차가 구르고 있는 이 길을 앞서 통과한 차의 뒷모습은 늘 쓸쓸하고, 서로가 소외당한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다가가 말을 걸을 수도 없으며, 눈을 맞추고 웃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내 앞을 걷고 있는 이에게서 느끼는 친숙함, 친밀함은 걸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신선한 느낌이다.

 

재가 마구 써대는 이 습관과 취미도 이 걷기탓 아닐까. 차와 달리 속도감 없이 걸어야만 누릴 수 있는 이미지 퐉. 환상이 뒤따르고, 분노하고, 기억을 상기해야만 하는가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가는 상상력을 그냥 날려 보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비나 눈이 오는 예외의 걷기는 기능적인 몸 자체가 얼마나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두 팔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면서 잠시 잠깐이나마 겸허한 인간적 환원을 느껴보는 순간도 맛본다.

 

길을 따라 걸으며 내면의 길도 잘 찾아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 길이야말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운동이 섭생만큼 중요한 생활로 자리 잡고 있다. 걷는 게 건강을 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니 내겐 천만다행이다. 건강에 해롭다고 금기 스포츠로 낙인찍혀도 나는 역시 율동 공원을 산책 나갈테니까.

 

요즘 반쯤 진행된 백두대간의 가장 큰 불만은 대구팀이 쳐지는 나를 받쳐주기 위해 내 뒤에 바짝 붙어 나를 밀어대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자연과 교감하는 혼자만의 세계를 누리고 싶은데.

 

하산의 시간에 충분한 여유가 있음에도 서두르는 행운이 아빠에게 시 한 수 들려주고 싶다.

 

 

 

가던 길 멈춰 서서

 

                                 W.H. 데이비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난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수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빛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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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과 교수인 김경재 교수는 하나라는 숫자적 개념과 최고신이라는 우리의 집착을 비판하며,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취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지구상의 모든 역사적 종교를 포용할 수 있는 종교 다원론에 대해 긍정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내 종교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종교적 이기심을 버리고 많은 이름으로 우리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진리의 하느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한민족과 함께 역사해 온 무교, 불교, 유교, 동학의 시천주, 원불교의 일원상의 핵심 진리가 하느님의 진리와 절대적일 수는 없다. 역사 속의 현실에 존재한 종교는 문화적, 사회적 영향 속에서 수용되고 이해되어 왔으며 응답하며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사고의 교수의 저서에 동감했던 터라 열심히 읽기는 했으나 많은 부분이 전문적이고 심도 있게 다루어져 소화해내기 어려웠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의 정도를 짤막한 요약으로 정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특정 공동체의 종교는 탄생한 역사, 지리적 조건, 문화, 사회적 제반 조건에 반영되어 있기에 외양 차이는 있으나 추구하려는 내면의 가치는 숭고한 삶의 실현을 지향하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등잔 모양은 다양하지만 비쳐 나오는 불빛은 동일하다라는 은유적 비유가 말해주듯이.

 

궁극적 실재로서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고 이해될 수 있다. 신적 실재에 대해 처한 상황 아래서 서로 다른 인간들의 응답으로 형성된 다양한 인식의 구체적 표현이 각 종교의 이름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일곱가지 다양한 색깔이 모여 무지개를 이룬다고 종교 다원론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종교적 전통은 신적 실재의 순백 광선이 인간 경험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수많은 전통과 교리, 종교로 굴절되어 각 종교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는 표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색깔은 많은 부분을 흡수하고 나머지 반사한 빛 자체이므로 종교의 외견상 형태는 본성의 전부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산의 등정로는 다양하나 호연지기는 서로 통한다라는 비유 또한 용어가 구원, 해탈, 모크샤, 眞人 등의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종교인의 본래적 모습의 공통점은 서로 상통하지 않겠는가.

 

상황이 의미하는 바는 유한하며 한계를 지닌다.

위대한 원래 종교도 그 민족의 고유한 영성 안에서 이루어진다. 전통적 개방성을 허락하며, 생명적으로 이해되고 확장될 수 있다. 마치 농부가 접목을 통해서 더 좋은 과일을 생산하듯이.

 

이 책의 저자는 요한 복음 4장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속에서 한 권의 책을 요약하고 있다. 고달픈 삶에 지친 사마리아 여인이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낮에 우물가에서 솔로 물을 기독 있다. 갈릴레아 지방으로 향하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우물가에서 휴식을 취하게 된다. 예수님은 연민의 마음으로 여인에게 진리의 대화를 건넨다. (여인은 남편이 이미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살고있는 또 다른 남편이 있는 처자로서 구원에 목말라 하고 있는 처지)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 이 산이다또는 예루살렘이다라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19)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24)

 

영적으로 참되게’(in spirit and truth)는 성전 시대 율법종교, 교리종교, 민족종교, 문명신 종교를 벗어나, 즉 종파적 신앙에서 벗어나 바르게 숨 쉬는 사랑의 실천인 생명의 바다로 나아갈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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