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워낙 길눈이 밝지 못했던 나는 두 발을 땅에 딛고 걸어야만 마음이 안정되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골목 골목 갔다가 되짚어 나오고 급기야는 지나가는 이에게 물어야 했으니까. 그러자니 남의 집도 들여다봐야 했고, 상점도 기웃거렸으며, 전봇대에 붙여진 하숙집 광고에도 의미를 두어야 했다. 누가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줄 것인지 인상을 살피는 것은 기본이고.

그렇게 걷기를 시작했고, 즐기기가 계속되었다. 등산이 취미가 된 것도 이 걷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행의 맨 뒤에 쳐져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재미는 정상에 오르는 모든 이라고 다 누리는 것이 아닌 나만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걷기 예찬>을 읽으며 오랫동안 누렸던 즐거움이 단순한 기쁨만이 아니였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걷기는 헝클어진 삶이나 빗나간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고, 동반자 없이 걷기는 내 존재의 희비, 깊은 사색, 기쁨, 슬픔을 동요 없이 다스리게 해주어 건강한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내 차가 구르고 있는 이 길을 앞서 통과한 차의 뒷모습은 늘 쓸쓸하고, 서로가 소외당한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다가가 말을 걸을 수도 없으며, 눈을 맞추고 웃을 수도 없다. 그러나 내 앞을 걷고 있는 이에게서 느끼는 친숙함, 친밀함은 걸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신선한 느낌이다.

 

재가 마구 써대는 이 습관과 취미도 이 걷기탓 아닐까. 차와 달리 속도감 없이 걸어야만 누릴 수 있는 이미지 퐉. 환상이 뒤따르고, 분노하고, 기억을 상기해야만 하는가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가는 상상력을 그냥 날려 보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비나 눈이 오는 예외의 걷기는 기능적인 몸 자체가 얼마나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두 팔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보면서 잠시 잠깐이나마 겸허한 인간적 환원을 느껴보는 순간도 맛본다.

 

길을 따라 걸으며 내면의 길도 잘 찾아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 길이야말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올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운동이 섭생만큼 중요한 생활로 자리 잡고 있다. 걷는 게 건강을 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니 내겐 천만다행이다. 건강에 해롭다고 금기 스포츠로 낙인찍혀도 나는 역시 율동 공원을 산책 나갈테니까.

 

요즘 반쯤 진행된 백두대간의 가장 큰 불만은 대구팀이 쳐지는 나를 받쳐주기 위해 내 뒤에 바짝 붙어 나를 밀어대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자연과 교감하는 혼자만의 세계를 누리고 싶은데.

 

하산의 시간에 충분한 여유가 있음에도 서두르는 행운이 아빠에게 시 한 수 들려주고 싶다.

 

 

 

가던 길 멈춰 서서

 

                                 W.H. 데이비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난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수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빛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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