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랬다. 그때, 그런 카피가 유행이었다.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20대 초반의, 정말 뇌쇄적으로 이뻤던 채시라가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자신감이 넘치는 프로인 양 나왔고, 그 카피를 썼던 최인아던가? 하는 이름의 카피라이터는 그 여세를 몰아 책까지 냈었다. 혹시 그 책을 보면 프로가 될 수 있을까, 프로의 삶은 어떤 걸까 궁금했던 나는 그 책을 샀던 무수한 독자의 대열에 합류했던 것 같다.
늘 프로를 꿈꿔왔다.
직장에서도 프로이길 바랬고, 집에서도 프로이길 바랬다.
프로 주부이고, 프로 엄마이고, 프로 마누라이고, 거기에 프로 며느리, 딸이길 바랬다.
조금만 기를 쓰면 될 것도 같았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집안이 반짝반짝할 것 같았고, 아이들도 제자리를 잡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결과는, 늘 참담했다.
집은 늘 폭격맞은 베이루트였고, 나는 늘 아이들에게 꽥꽥 고함을 지르는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남편에게, 동료이자 비서이자 안식처가 되기를 바랬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김치냄새 폴폴 풍기는 뚱뚱한 마누라에 불과했다.
지난 방학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폭발했다. 물론 나보다 약자라고 판단되는 아이들 앞에서였다. 아이들 둘이서 연합전선을 펴니, 엄마의 고함소리쯤은 귓등으로도 안 들렸던지 급기야 엄마와의 약속을 제 마음대로 팽개친 채 그저 하루종일 놀아대는 것이었다.
갑자기 선언했다.
그래, 우리 남남으로 살자. 니들도 니들 하고싶은 대로 하고, 나도 나 하고싶은 대로 하고.
호수공원으로 나갔다. 하루쯤 아이들 학원 안 가면 어떠랴, 한끼쯤 굶는다고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리라...
한껏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고, 근처 서점에 들러서 책을 샀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우아한 커피숍에 들러서 차를 한 잔 시켜놓고 책을 펼쳤다. 그동안 늘 소원이었다. 집 근처 우아한 커피숍에서 좋은 음악 들으면서 재미있는 책을 마음껏 읽는 것.
왜 집보다 집 근처 커피숍이 펀안한지는 아마 프로가 되지 못한 나같은 주부들은 알아줄 것이다. 집엔 늘 해야 할 일과 신경써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프로들은 보이지 않아도 그런 일들을 처리하겠지만, 프로가 아닌 나는 보이지 않으면 그냥 잊을 수 있었다.
책을 펴들고 앉아 내내 맞아맞아, 그래 그랬어 하면서 키득거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내가 왜 그렇게 프로의 삶에 목숨을 걸었을까 싶어졌다.
잡기 어려운 공을 잡으려고 애쓰고, 치기 어려운 공을 치려고 애쓰는 삶이 갑자기 무의미해졌다. 그것 좀 놓친다고 굶어 죽겠는가, 그것 좀 못 친다고 세상이 바뀌기라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잡기 어려운 공, 치기 어려운 공을 어떻게든 잡고 때려보라고 애들까지 부추기다니. 그렇게 악착같이 잡으면 뭐하랴. 잡아서, 1등하고, 골든글러브 타고, MVP 되고... 그래서 뭐... 그래서 뭘 어쩔 건데...
나한테 맞는 건 그냥 아마추어다. 플레이 자체를 즐길 줄 아는 행복한 아마추어.
주부로서,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마누라로서... 행복하게 즐기는 아마추어.
이제 나는 저 공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알 것 같다.
자, 플레이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