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실에 있다 보니, 참 다양한 종류(?)의 선생님들을 뵌다.
어떤 선생님은 수업시간에도 걸핏하면 아이들을 도서실로 쫓아(!)버리고 본인의 행정업무를 하시기도 하고, 어떤 선생님은 실기시험 대기실 정도로 사용하신다. 물론 그 반 아이들은 도서실과 휴게실의 구분을 잘 하지 못한다.

모두 그렇다고 하면 선생님들은 억울해하시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아이들을 보면, 어느 반인지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심지어는 특별활동시간에 독서부를 담당하시는 선생님께서, 아이들만 도서실로 보내버린다.
독서지도가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서실에 그 선생님이 계시지도 않으니 다른 지도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대충 한 10분쯤 앉아있다 그냥 가버린다.
아마 특별활동수당(있는지 제가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은 선생님이 챙기시겠지?

많은 선생님들 중에, 내가 정말 존경하게 된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린, 20대 총각선생님이신데, 우리 학교가 첫발령지란다.


6학년을 맡고 계시는데, 이 선생님은 도서실에 아이들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꼭 함께 오신다.
그리고 40명이나 되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맞는 책을 직접 골라주셨다.

막 사랑에 빠진 듯한 여자친구에게는 '첫사랑'을,

책이라고는 죽어라고 읽기 싫어하는 남자친구에게는 셜록홈즈를,

책을 좀 읽었다 싶은 친구에게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공부는 잘 하는데 사회를 힘들어한다 싶은 친구들에게는 역사소설을...

보고 있는 내 마음 속에서 감동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나한테 팍! 찍혔다(!)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선생님을 지켜봤다. 아시나 몰라, 우리 학교에 스토커 아줌마가 있다는 걸...ㅋㅋ

가만히 보니, 그림책을 무지무지 많이 읽고 좋아했다.

우리 도서실에 그림책만 따로 모아둔 서가가 있는데, 항상 그 앞을 왔다갔다 하시는 거다.
여쭤봤더니, 완전히 그림책 전문가이다 ^^ 아이들 데리고 그림책 읽으면서 그림그리기 수업도 한단다. 미술 전공이시랜다.

엊그제는 뭔가를 복사해서 가지고 가시는데, 대장금 노래를 가지고 단소수업을 하기 위해 복사한 대장금 악보였다. 오선지 악보가 아니라 궁상각치우 뭐라고 쓰인 그 국악 악보.

그 반 엄마들에게 물었더니, 그렇다고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그냥 따라가는 선생님도 아니란다. 특히, 공부 못하는 건 봐줘도 예의 없는 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신단다. 그래서인가? 그 반 아이들이 도서실에 올 때는 꼭 깍듯이 인사하고, 떠들지 않고, 의젓하다.

엄마들이 보는 자리에서 아이들을 벌을 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엄마나 아이나 티끌만큼도 선생님을 원망하지 않았단다. 이유가 있었다나?
내가 아이들을 키워봐서, 그리고 학교에 몇 달 근무해봐서 아는데, 아이들도 받을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자, 이쯤에서 본심을 밝힐까?

내가 그 선생님을 찍었던 이유는...
뭐 나한테 시집 안 간 동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
내년에 도서실 담당좀 해주시라고 부탁드리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내가 근무해보니, 일용직 사서교사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도서실 담당교사였다.

담당교사의 의욕이 도서실을 살리고 죽이고... 했다. (물론 교장선생님의 의욕과 '바른' 정신이 더욱 중요하지만 -.-)

그래서 엊그제... 진지하게 부탁했다.
물론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도서실을 맡겠다고 하시고, 의욕적으로 해주시면 안 되겠느냐구...

그랬더니, 그 선생님...
내년에 옮기신단다. 아주 작은 학교를 지원할 거라고 하셨다.

헉, 엄마들 난리 났다.
그 학교가 워디여... 나 따라갈껴...

그리고 또 한 가지, 담당교사는 자기가 맡겠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위에서 정해서 내려온단다.

너 이거 해, 너 저거 해. 그럼 그냥 따라 하는 거란다. 윽~

이래저래 내가 학교를 그만 둘 이유가 계속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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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굼 2004-03-2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으신 선생님이시네요. 일부러 작은 학교로 가시는 것도 그렇고...

호랑녀 2004-03-3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일부러 찾아오셔서 인사하시더군요. 꼭 한번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음... 될까 모르겠습니다.
정년퇴임하실 때까지 늘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처음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