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 - 엄마의 전쟁 일기 33일, Reading Asia
림 하다드 지음, 박민희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나에게는 내 의지와 상관 없이 흘러가는 일들에 대한 두려움, 일종의 강박증이 있다. 다른 사람이 시작한 일에 공감하여 뒤따라 시작했지만 나중에 보면 내가 앞장서 있다거나,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고 내가 그 중심에 서 있게 되는... 그런 경우들을 유난히 잘 못 견디고 괴로워한다.

내가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유도 이런 거다. 특별히 내가 평화를 갈구하거나 평화적이어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은 몇몇 정치논리에 의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죄없이 어떤 의도도 없이 그저 휩쓸려서 죽고 죽이고 황폐해진다.

그래서 나는 전쟁이 나오는 영화도 잘 못 본다. 내키지 않는다. 웰컴 투 동막골도, 태극기 휘날리며도..몇 번을 망설이다 못 봤다.

이 책, '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도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해가며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로는 내심 전쟁터에 핀 사랑이나 전우애 같은 건 줄 알았다. 표지에 그림이 그랬다. 총알이 빗발치는 그림 속에서도 아이는 맨발로 뛰어다니고 총을 든 병사는 웃고 있으니까.

아, 그런데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이 책은, 나와 똑같은 나이의 여자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33일간의 전쟁 기록이다. 2006년 7월과 8월. 나는 한 초등학교 도서관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한편으론 리모델링 업자와 싸우면서 또 한편으론 책을 만권 넘게 등록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 그래. 지구 한편에서 전쟁이 일어났단 얘길 들은 것도 같다. 레바논이라는 나라, 그저 중동의 어느 시끄러운 곳이라는 인식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레바논에서 태어났다는 얘길 듣고 어? 정말? 했던 나라, 그리고 우리 아이가 한참 세계 국기 외우기에 골몰했던 시절, 이 나라 국기는 참 인상적이다. 국기 한가운데 나무가 있구나... 성경에 자주 나오는 백향목이라네... 하고 스쳐 지나갔던 나라일 뿐이었다.

아, 한가지 더 생각난다. 유엔이 개입해 이스라엘에게 물러나라고 했을 때도 이스라엘이 쉽게 물러나지 않자 당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임기 만료를 앞둔 상태라 말발이 안 먹힌다는 그런 기사를 본 기억이 있다. 유엔도 레임덕이 있구만... 했었다. 그 기사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기사의 초점은 전쟁이 아니라 유엔 사무총장의 말발이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아무런 죄가 없는 레바논 사람들은, 단지 레바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단지 레바논이라는 나라가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183명이 죽었다. 세상에... 그 중 3분의 1은 열세 살도 안 된 아이들이란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을까. 아마 그 나라 나름대로 자구책이라고 주장하겠지. 호시탐탐 자기들을 노리는 헤즈볼라 때문이라고 주장하겠지. 병사 2명을 죽이고 몇 명을 납치했던 헤즈볼라가 먼저 시작한 전쟁이라고... 하겠지.

그러나 엠뷸런스를 폭격하고 불을 끄고 있는 소방차와 소방대원을 폭격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기들이 죽인 사람들 중 3분의 1이 아이들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군인들이 집단 마약중독상태가 아닐 텐데 왜 그런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가.

마약중독상태가 아닌데도 전쟁 막바지에 집속탄을 4백만 발이나 쏘았나? 집속탄 1발에는 소형폭탄 백개가 들어있다니, 집속탄 4백만 발이면 폭탄 4억개다. 그 중 90%는 종전시간이 예고된 마지막 72시간 안에 발사되었단다. 그 불발탄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레바논은... 미국보다 넓은 나라가 아니다. 겨우 경기도만한 나라이다. 그 안에 집속탄 4백만 발이라니.

언제 어디에 폭탄이 떨어질 지 모르는 속에서 하루하루 사람이 죽어가고, 아이들 먹일 우유가 떨어져가고 있는 그 중에도 미국은 즉각적인 정전 이라는 유엔의 결의를 거부한다. 즉각적인 정전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콘돌리자 라이스는 얘기한다. 이 여자야... 네가 전쟁터 속에서 살아봤니?

이스라엘과 미국제 폭탄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증오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새로운 '테러티스트 세대'로 자라난다. 이것이 테러리즘이 생겨나는 진짜 이유다.

이 책의 저자인 림 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쩌면 라이스로 대표되는 미국은 이렇게 되어도 손해볼 것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전쟁이 일어날수록 미국 경제는 특수를 누릴 것이며, 이런 아이들이 테러리스트가 된다면 또다른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일 테니.

림은 책의 말미에

하지만 내 소중한 아이들아,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다고 믿자. 용기를 내자. 그 누구도 증오해선 안 된다....(중략) 무엇보다, 아랍인과 유대인이 친구가 될 수 있으며, 레바논과 이스라엘도 언젠가는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 정의롭고 공정한 평화 말이다. 내 사랑하는 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

라고 썼다.

하... 나는 못 믿는다. 이 책을 읽고 나는 더욱 평화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평화보다는, 그 평화를 지킬 힘을 믿겠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군대를 지휘할 지휘권도 없는 나라, 저런 말도 안 되는 전쟁에 오히려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 나라, 옆집에 식량을 나눠줄 때도 다른 나라 눈치를 봐야 하는 나라, 그런 형편인데도 믿고 따를 지도자도 없이 그 안에서 또 동서로 갈라져서 치고받고 싸우는 나라... 내 나라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어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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