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
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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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
맹자는 그것을 仁이라 했다.
자신의 의지가 그렇지 않았는데도, 결국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은..

본성이 작용해서 그런 것인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그런 것인가..

완장의 신성불가침한 권력이
어느날 갑자기 부자의 눈물에 무너져 버린 것은
완장보다 강한 그 무엇을 말하는가
완장보다 강한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완장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었으니 그것과 우열을 가늠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완장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나약함이다.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가면 같은 것
살기 위해서 악착같이 붙잡아 두려는 것
그러나 나의 존재의 조건들과 대면할 수 있다면
완장을 내던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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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조노동자여, 단결하라!

얼마전 '한국SF 100주년과 러시아SF'란 페이퍼를 올린 바 있는데, 기사에서 인용한 내용 중에 카렐 차페크의 <로봇> 얘기가 있었다. 쥘 베른의 <해저여행기담>(<해저 2만리>)가 1907년에 처음 소개되었고 그 뒤를 이어 1925년에 차페크의 <로봇>이 박영희에 의해 <인조노동자>로 번역된 바 있다는 것.

1907년 ‘해저여행기담’에 이어 1908년 이해조가 역시 번안작품 ‘철세계’를 출간했다. 1925년엔 박영희가 세계 최초로 ‘로봇’이라는 말이 나타난 카렐 차페크의 작품 ‘R.U.R’를 번역한 작품을 선보였다(*차페크의 <로봇>이 그렇게 일찍 소개되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한데 이 책 또한 품절이군).

거기에 내가 붙인 코멘트는 보는 대로이다. 이광수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그 번역과 관련한 칼럼을 읽게 됐다.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정선태 교수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연재 중의 한 꼭지이다.

한겨레21(04. 02. 05) 카렐 차페크, <로봇>(RUR) - 계급투쟁이 로봇에 실렸네

“갈군! 갈군! 왜 인조인간을 만들기 시작하였나? 할레마이어군! 파브리군! 왜 자네들은 자네 머리 속에 그런 많은 계획을 생각하였었단 말인가? 왜 글쎄 자네들은 그 비법의 흔적을 남겨놓지 아니하였나? 아, 하느님 ― 나의 기도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 만일 사람을 남겨놓지 않으시려거든 인조인이나 남겨주십시오 ― 아무렇게 하더라도 인간의 그림자뿐만은 남겨주십시오! (다시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다만 잠이나 자고 싶다. (일어나서 창 앞으로 간다) 아직껏 밤이다! 저편에서 아직껏 별이 반짝이고 있구나! 이 세상에는 벌써 한 사람의 인간도 살지 않는데 저 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중략) 모든 것이 소용이 없구나. (시험관을 깨뜨려 부순다. 기계의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린다) 기계! 또 기계로구나! (창을 연다) 인조노동자여, 기계를 정지하여다오! 너희들은 기계로부터 생명을 만들어내려고 생각하느냐?”

소수의 인간과 인조 노동자의 대결

로숨 유니버설 로봇회사의 건축주임인 알퀴스트의 절망으로 가득 찬 독백이다. 그는 이 회사의 대표인 도민, 기술담당 이사 파브리, 생리학 연구부장 갈, 로봇 심리연구소장 할레마이어와 함께 외딴 섬에서 인조인간을 대량 생산하여 세계 각 지역에 판매하던 인간들 가운데 ‘기계들’의 반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였다.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생명체를 복제하는 데 성공하고, 이 ‘영혼도 감정도 없는 인간’을 팔아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던 로숨 유니버설 로봇회사의 인간들은 그들이 만든 ‘로봇들’의 반란에 직면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만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 알퀴스트는 이제 인간을 제치고 인간의 지위에 오른 로봇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스스로 내동댕이쳤던 하느님과 별을 찾으며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공상과학(SF) 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카렐 차페크(Karel Capek·1890~1938)의 희곡 <로봇>(원제는 Rossom’s Universal Robots)은 인조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새로운 아담과 이브로 탄생하면서 막을 내린다.

SF소설의 효시로 알려져 있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하여 올더스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 아이라 레빈의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등 이 분야의 뛰어난 작품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초래한 음울하고도 비극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발전과 , 이에 따른 인간의 진보에 낙관적인 믿음에 빠져 있을 때, 이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만이 야기할 비극적인 결말을 경고하고 나섰던 것이다.

1920년에 발표되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체코 출신의 작가 카렐 차페크의 <로봇>도 예외가 아니다. <로봇>은 화학적 결합을 사용하여 원형질이라고 알려진 생명체를 무한 복제하는 기술을 터득한 인간들이 어떻게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가를 예고하고 있는 희곡 작품이다. 과학기술을 장악한 소수의 인간들과 그들이 만든 인조인간 로봇의 대결,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개념이 결국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버리는 ‘과학의 희극’이 <로봇>을 관통하고 있다.

카렐 차페크(*왼쪽 사진)의 희곡 <로봇>이 이 땅에 처음으로 번역·소개된 것은 1925년 2월호 <개벽>을 통해서였다. 1925년을 전후하여 문단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신흥문학=계급문학의 ‘선봉장’이었던 회월 박영희(1901~?, 오른쪽 사진)가 이 작품을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으로 네번에 걸쳐 완역한다. 이른바 ‘병적 낭만주의’에 빠져 있던 박영희의 사상적 변신은 놀라울 정도인데, 1924년 이후 그는 평론과 소설 등을 통해 계급문학과 사회주의적 이념을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특히 그가 엮은 ‘중요술어사전’은 네 차례 <개벽>의 부록으로 실렸으며, 이는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잉여가치설, 공산주의, 유물사관, 과격파, 자본주의, 제국주의 등 새로운 사회주의적 개념들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소개한 중요한 자료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신흥사상’에 관심을 쏟고 있던 그의 눈에 카렐 차페크의 <로봇>은 어떻게 보였을까?

사회주의 이념 우회적 전파 통로

<인조노동자>라는 제목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번역자 박영희는 이 희곡을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을 그린 작품으로 보았던 듯하다. 자본가에 의해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인조기계’, 즉 로봇으로 파악하고, 기계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취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기계에 불과했던 ‘인조노동자’들이 공포와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여 자신을 지배하던 인간들을 살해하고 새로운 주권자로 변모해가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이야말로, 사회주의를 비롯한 ‘신흥사상’에 대한 감시자들의 검열이 더욱 촘촘해지던 상황에서, 계급사상을 우회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다시없는 통로였을 터이다.

예컨대 인조노동자의 반란을 이끈 로봇 라디우스가 ‘최후의 인간’ 알퀴스트에게 던지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역사를 보십시오. 사람의 서적을 읽어보십시오. 당신도 사람답게 살려하면 주권자와 살육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수는 번식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완전무결한 세계를, 또 없는 세계를 만들고, 남극에서 북극으로 가는 운하와 또한 새로운 화성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해서 우리들은 과학과 미술을 연구하였습니다. 인조노동자는 인간의 문화를 완성하였습니다.” 로봇의 인간선언, 또는 기계와 다름없던 노동자의 인간선언!

<로봇>의 번역 <인조노동자>는 더 이상 ‘SF’가 아니었다. 테크놀로지를 전유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영혼도 감각도 없는 ‘인조인간’으로 내모는 비극적 현실을 타파하라고 ‘선동’하는 팸플릿이었다. 반란의 지도자 라디우스는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서 이렇게 외친다. “전 세계 인조노동자 제군! 전 인류를 우리는 죽여버릴 것이다. 한 사람일지라도 용서함이 불가함. 각 공장, 철도, 기계, 광산과 그 외에 모든 원료를 남기고, 그 외에 것은 모두 파괴할 일. 그러고는 다 각각 노동에 돌아갈 일이다. 노동은 중지함이 불가함.”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저 유명한 ‘공산당선언’의 ‘선언’을 떠올릴 필요조차 없다. 인간, 즉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팸플릿의 기능을 <인조노동자>는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로봇처럼 살았던 식민지 조선인들

유니버설 로봇회사 대표 도민의 말처럼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인 것이 현실이라면,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는 어떠한 공존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라면, 그리고 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피착취자 역시 인간임을 선언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924년 일본에서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을 보았을 조선의 청년 지식인 박영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의 소설들과 평론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박영희는 사회주의에서 그 희망을 찾았고, 그 이념을 담은 작품으로 차렐 차펙의 <로봇>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암울한 식민지 근대를 살고 있던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자를 뜻하는 로봇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처럼 <인조노동자>와 함께 실려온 새로운 사상은 많은 ‘맑스보이’와 ‘엥겔스걸’을 낳으면서 저항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바야흐로 러시아혁명의 성공에서 희망을 보았던 사회주의 사상이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비추는 한 줄기 빛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07. 03. 01.

 

 

 

 

P.S. 참고로, 근대/문학과 번역 등에 관련된 정선태 교수의 흥미로운 논저들은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소명출판, 2003),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소명출판, 2006) 등에 갈무리돼 있다. 더불에 근대에 관한 여러 번역서들도 노작이다. 한달 정도 '큰방'에 간다면 다 읽어볼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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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사건을 해결하느냐 못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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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제자들과 함께 미국에 오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작품은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가 있다. 첫 번째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이 미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의 이론을 실제 사건과 접목시키는 점, 또한 그 이면에서 그와 제자 융의 다툼에 대한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접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아파트에서 일어난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검시관과 경찰, 살아남은 피해자와 그녀의 정신분석을 담당하게 되는 프로이트파 의사가 펼치는 살인에 대한 이야기다. 프로이트를 빼고도 이 사건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세 번째는 20세기 초 뉴욕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류층들의 삶의 방식과 생활환경 등을 엿보는 재미, 그들의 특권 의식 등을 통해 그로부터 미국이 어떻게 거대화 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를 알 수 있게 된다.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여기 어디서 엘러리 퀸과 퀸 경감이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 작품의 살인 사건은 엘러리 퀸과 그 시대 작가들이 만들어 냄직한 고전 추리소설 방식을 따르고 있다. 향수, 그렇다. 이 사건 속에서 나는 고전 추리소설의 향수를 느꼈다. 또한 전에 읽은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에서 애송이 의과과정을 밟고 있던 젊은 프로이트가 거장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니 그 연장선상에서 두 작품을 같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내 눈길을 끈 인물은 프로이트도 영거박사도 아니었다. 사건을 맡아 해결하는 젊은 형사 리틀모어의 활약이었다. 그는 조연으로 출연하지만 내게는 그 어떤 위대한 형사의 캐릭터에도 뒤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1909년에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매력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프로이트가 사건에 대해 영거박사에게 조언을 해주는 부분에서 보면 마치 명탐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안락의자형 탐정의 전형이 프로이트는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이야기만 듣고 분석을 한다. 그것이 정신분석학이겠지만. 그런데 작가는 융을 아주 싫어한 것 같다. 사실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주인공이 프로이트라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진짜 융이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너무 노골적이라 작가의 사심이 들어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나 융이나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적으로는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니까 말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에 대한 영거의 해석이다. 이것은 작가의 해석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해석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햄릿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해석의 반박은 마음에 든다. 사실 성적인 면만 너무 강조한 프로이트적인 꿈의 해석은 이 작품 속 사건을 보며 에드 맥베인의 매슈 호프 시리즈를 떠올리게 만든다. 매슈 호프 시리즈는 전형적인 콤플렉스, 그것도 성적 콤플렉스를 작품화한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살인의 해석은 누가 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가 있느냐 있지 않느냐로 번역이 되던 해석이 되던 이 작품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을 찾아내는 것, 범인을 잡는 것, 그리고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리틀모어의 행동은 이 작품에서 프로이트보다 더 빛이 나는 것이다. 비록 프로이트가 더 지명도가 높은 유명한 실존 인물이고 그의 해석이 도움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프로이트에게 조여오는 미지의 인물들에 대한 음모도 리틀모어가 해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어떤 면으로 봐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프로이트와 융이 등장한다고 해서 어려운 것도 아니고 살인 사건이 있다고 해서 잔인한 점만 부각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독자도 만족시킬만한 작품이 이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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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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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사는 사람들.
한비야 같은 사람들을 보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람들이란 말이 떠오른다.
왜 그래야 하는 지는 나중에 한가할 때 생각해 볼 일이고- 물론 그런 사람들은 한가할 때라는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보이기도 전에 들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가고 가슴이 먼저 느끼는 사람들..

그는 아프가니스탄, 말라위.잠비아, 이라크, 시에라리온.라이베리아, 네팔, 팔레스타인, 인도네시아, 북한 등등에서 긴급구호요원으로서의 임무에 몸을 내던졌다.
사실 나는 냉소적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뜯어고치는게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그렇게 구호의 손길을 보낸들 난민문제 빈곤문제가 해결되는가. 오히려 부조리한 구조를 더 온존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게 냉소하면서도 그 구조를 고치는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고 그 구조가 만들어낸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보내지 않았다.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가식없는 그를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가슴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가식은 머리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나 한가로이 행하는 것일 뿐. 비야처럼 더욱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가식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고 끝내 그는 나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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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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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촘스키가 세계 정세에 대해 어떻게 발언해 왔는지 그 윤곽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책.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정의하고 그에 맞게 어떠한 압력하에서도 진실 말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촘스키. 비판적 사유를 멈춘다면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존재를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한 껍질만 남은 지식인은 당연히 발언하기도 멈출 것이다. 지배적 질서를 스스로 합리화 하면서 스스로 동의한 것처럼 생각하며 오히려 지배적 질서를 정당화하는데 일조하거나 지배구조를 강화하는데 앞장설 수도 있다.

해적과제왕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처럼 촘스키의 발언은 과연 미국에 대해 위험한 것인가.. 우리나라의 경우 독재시절에 정권에 대해 핵심을 건드리는 비판적 발언은 발언자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행위였고, 또한 그것이 정권에 위협적인 것이라 간주되고 탄압되었을 것이다. 정권의 기반이 취약하다면 그 정권을 건드리는 모든 행위는 위험한 것으로 판단되고 탄압될 것이다.

미국의 패권에 대한 촘스키적 인식은 사실 아주 약간의 상식만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 증거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골목대장 마빡이를 누가 몰라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에 대해 발언할 수는 있지만 저항에는 한계가 있다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도 참 한심한 일이지만, 이를 빌미로 대북제재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미국에 그저 개성, 금강산은 어쩌고 저쩌고 할 수 밖에 없는 남한의 처지.

촘스키의 작업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언론,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작업, 조작된 동의에 대한 분석. 민주주의에 질문하기.
최규하 전 대통령이 운명했다. 군부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려났음에도 무덤까지 그 과정의 비밀을 지고 간다. 그가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당대의 인물 하나가 떠남에 따라 당대는 역사가 되가고 있다. 이제 역사를 심판의 주역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역사에 저항하는 지배세력은 아직도 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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