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잃어버린 여덟 가지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9월
절판


나는 변함없이 구르고 넘어지고 떨어졌다. 이런저런 실수도 했다. 하지만 허둥대지 않았다. 헛된 발버둥은 치지 않았다. -20쪽

나 지금,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건지 사랑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져. -23쪽

그가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은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나는 그때, 좋아하는 남자에게 평화와 행복을 선사하고 싶을 만큼 이미 어른이었다...
나는 그를 슬픔 속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슬픔에 빠지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 자신을 용납했다. 내가 즐겁기 위해서는 그도 즐거워야 했다.-44쪽

그리운 느낌 어쩌고 하는 건 순 거짓말이었어. 나는 처음부터 그의 그 눈에 끌렸던 거야. 그리고 두려운 나머지 사랑하게 된 거고. -51쪽

그때서야 나는 자신이야말로 텅 빈 뱃속으로 끝없이 울어댔던 매미였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이 공허를 메우기 위해 운다는 것을 안 나는 그저 서럽고 애달팠어요. -73쪽

그렇게 배려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게, 남자를 사랑한다는 거야. 그 사람이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애를 태울 때는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자신의 욕망을 달래기 위해서 남자를 생각하는 거지. 만나고 싶은 마음은 똑같아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달라져. 더 차분해지고, 더 슬퍼지지.-159쪽

나는 우울한 기분에 젖어 변하는 계절을 느꼈다. 죽음을 으식하면서 내 주위에 꿈틀거리는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가령 계절이나 시간 같은 것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색과 의지를 지니고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 주로 가족들이 내 주위메 만들어내는 감정의 모자이크가 마치 나무토막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에 대한 그들의 감정에는 전혀 빈틈이 없었다. 나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손으로 집어 잠시나마 공기 중에서 꺼내 놓으면 그 공백을 아빠와 동생의 감정 덩어리가 보충하고 메우는 식이었다.
나는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는 데에는 진공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 주위는 타자의 농밀한 사랑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렇기에 더욱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행복은 원래 자각이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174쪽

나는 돌과 무덤에 친근감을 느꼈다. 이곳에 있는 무수한 죽은 사람들. 나도 언젠가 이들 사이에 낀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사방을 돌아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떠다니는 공기가 내 몸을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에서는 집에 있을 때처럼 애틋함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는 따스하고 푸근한 것에 싸여, 손 하나 까닥할 필요조차 없고 아무런 필연도 없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걱정하고 겁내고 슬퍼할 필요가 없느. 다만 자신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실감 외에는 모든 것을 잃은 채 그 곳에 있었다. 나는 지금 혹시, 죽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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