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문화에 대한 태도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주재성에 관한 긍정‘이다. 이것이 인문지학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인간의 ‘주재성‘을 긍정할 때는 반드시 正·反 두 면의 문제에서 언급해야 된다. 정면에서 말하면, 인간의 주재성을 긍정하려면 반드시 이 주재성 자체에 대하여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반면에서 말하면, 인간의 주재성을 긍정할 때 일체의 객관적 제한과 주재성의 충돌에 대하여, 역시 명확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공자는 앞 부분에 대하여서는 仁, 義 두 관념을 통하여 해답하였다. 바꾸어 말해, 인간의 주재성은 인간이 공심을 세우고 올바름을 추구할 수 있는 데에서 나타난다. 이 점에 관하여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둘째 부분의 문제에 관하여 말하면, 인간이 비록 이 주재성을 가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인생의 과정 중에서는 인간이 자각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제한이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제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공자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그의 ‘義命分立設‘에 나타난다.
《논어》 중 공자가 命을 논한 자료는 공자의 명에 대한 견해와 의명분립의 기본 관점에 대하여 표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伯牛가 병에 걸렸다. 공자는 병문안을 가서 창너머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가망이 없는가 보다. 운명인가 보다. 이런 [훌륭한]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伯牛有疾, 子問之自牅執其手曰, 亡之, 命矣夫. 斯人也, 而有斯疾也, 斯人也, 而有斯疾也. <雍也>

공자는 염백우의 병이 위급하다고 여기고 그의 조우를 운명[命]에다 돌 93 렸다. 공자의 뜻은 염백우가 이러한 조우를 당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마침내 이러한 질병을 얻은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命은 뚜렷이 義와 분립된다. 명은 객관적인 제한이니 義가 자각적인 주재성을 나타내는 것과는 다르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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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믿음은 바뀔 수도 있다. 믿음을 바꾸는 데는 바람직한 방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방법이 있다.
대화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강압은 여러 자명한 이유로 바람직하지 않은 데다가 효과 자체도 턱없이 떨어진다. 누구나 답답하면 본능적으로 강압의 유혹을 느끼지만, 원수에게 두들겨 맞는다고 믿음을 바꿀 사람은 없다. 사람의 믿음에 깊이 다가가는가장 좋은 방법은, 거의 언제나 솔직한 대화다. 대화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행위로서(영어 단어 "conversation"에서 "con"은 라틴어로 "함께"라는 뜻이다),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으로 타인의 믿음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화란 본래 협업인지라, 상대방이 믿음을 재고하고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될수 있다. 남뿐만이 아니다. 대화는 나의 믿음을 되살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거나 움직이고,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고, 우정을 지키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상대방에게 호의와 공감과 연민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대방을 존중해주고 품위를 지켜주어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말을 들어주고,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예의를 지키는 사람에게 우호적으로 대하게 되어 있다. 사람의 믿음을 고착시키고 분열과 불신을 부추기는 확실한 방법은 적대적이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악의적이거나, 남의 말을 듣지 않거나, 상대를 무시하거나 예의 없는 사람은 저절로 싫어질 수밖에 없다. 여러분도 살면서 그런 사람을 한 번쯤은 틀림없이 만나봤을 것이다.
다행히도 안전하고 신뢰감 있는 소통 환경을 만드는 방법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서로 ‘대화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을 생산적 대화를 위한 협력 상대처럼 대하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협력 상대가 맞다. 대화를 협력 작업으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대화를 예의 있게 풀어나가면서 인간관계를 망가뜨리지 않고 돈독히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를 취하기는 의외로 쉽다.

이기는 대화에서 이해하는 대화로

가장 먼저 목표로 삼아야 할 일은 상대방의 추론을 이해하는 것이다. 적대적 사고, 즉 맞서고, 다투고, 따지고, 비웃고, 이긴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보다는 손잡고, 힘을 합치고, 듣고, 배운다고 생각하며 협력적 사고를 하자. "이 사람은 내 적이며, 내 말을 알아듣게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접고, 대신 이렇게 생각하자. "이 사람은 내 대화 파트너이며, 그에게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있다. 가령 그가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파트너로 삼고 대화할 수 있지. 하지만 인종차별주의자와는 죽어도 못해!" 아니다, 할 수 있다. 흑인 음악가 대릴 데이비스는 KKK 단원들과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누어 단원들이 KKK에서 탈퇴하게끔 설득했다. 그는 그 증표로 넘겨받은 흰색 고깔 두건을 벽장 가득 보관하고 있다. 우리도 인종차별주의자와 대화할 수 있다. 아니, 어떤 신념 체계를 가진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왜 그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상대와도 충분히 대화할 수있다. 대화란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을 서로 자연스럽게 배우는 기회다. 누군가를 파트너로 삼아 예의 있는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상대의 결론에 수긍하는 것도 아니요, 그의 추론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교양의 척도는 수긍하지 않고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옛말도 있다.) 상대의 사고를 따라감으로써 그 사람의 믿음과 그리 믿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내 추론을 이해하게 될수도 있고, 본인의 추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내 믿음이 그릇되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서로 파트너가 되어 대화하는 일은 의견의 일치나 불일치를 가리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예의와 관용을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고자 하는 활동일 뿐이다.

2. 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대화에 응하지 않거나 질문에 답하지 않거나 대화를 언제든 끝낼 길을 열어준다. 다시 말해, 대화를 불편해하는 상대에게 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3.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라는 의문을 품되, 상대방에게 그렇게 묻지 않는다. 의문을 풀기 위해 진지하게 질문한다. 의아하다는 듯이 묻지 말고 순수한 호기심에서 묻는다. 의문을 해소하려고 애쓰다 보면 대화가 험악해지지 않고 원활히 진행되는 데 도움이 된다.

8. 심각한 잘못이 아닌 한 질책하지 않는다.

커지는 여기서 말하는 질책이란 상대방이 도의적인 선을 넘었음을 알리는 행위를 뜻한다. 보통 상대방이 문제의 발언을 하자마자 강하게 비판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질책 후에는 대개 "이렇게 해야한다", "그렇게 해선 안 된다" 같은 도의적인 지적이 이어진다. 상대방을 질책하는 행위는 라포르를 훼손한다. 특히 상대방의 말을 끊고 하는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기보다는 조심스럽게 때를 봐서 우려를 표명하도록 하자. 아마도 상대방은 자기 생각을 최대한 잘 표현하려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거칠게 표현했더라도 잘못을 질책하기보다는 논점을 이해해주고 진정성을 높이 평가해주자. 물론 상대방이 의도적으로 무례하게 굴거나 폭언을 할 때는 대응에 나서야 한다. 그럴 때는 그런 식으로 굴면 안 된다고 선을 긋거나, 대화를 끝내는 것이 좋다.

9. 예의를 지킨다.

"해주실 수 있을까요?", "고마워요" 같은 말을 꼭 한다. 상대방이 내 말에 반론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면 의견을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나쁜 것을 나쁜 줄 알면서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나쁜 것을 나쁜 줄 알면서도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사람은 가진 정보에 따라 행동하고 믿음을 형성하며, 그에 따른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가진 정보가 다르면 나오는 결론도 다르다. 가령 옛날 의사들은 몸 안에 피가 너무 많으면 병이 난다고 믿어 병을 치료할때 거머리를 썼다. 거머리를 환자의 몸에 붙여 피를 빨게 했는데, 환자를 낫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디까지나 좋은 결과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으며, 현대인과는 가진 정보가 달랐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피의 양과 질병이 무관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우리는 누구나 선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상황의 전모를 보지 못해 올바른 결론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무지하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혹은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마음을 버리고, 이런 마음을 가져보자. 상대방은 문제를 나와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을 뿐이다. 혹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이다. 무지하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악한 사람일 가능성보다는, 선의를 갖고 있으나 의사소통에 서툰 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우리는 대화 상대와 의견이 다르면 상대의 의도와 동기를 실제보다 나쁘리라고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자는 인종차별주의자다‘, ‘진보주의자는 애국심이 전혀 없다‘, ‘공화당 지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 신경 쓰지 않는다‘, ‘민주당 지지자는 국방에 무심하다‘ 등이 그러한 짐작의 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런 결점 때문에그렇게 믿고 그렇게 주장한다고 짐작한다.
대개는 잘못된 짐작이다. 상대방이 품은 의도와 동기는 내 짐작보다 좋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미국 공화당 지지자의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보다는 부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낙수 효과‘로 인해 고용 창출 등 기회가 늘어난다는 생각, 그리고 사람은 ‘엄한 사랑‘으로 대해야 빈곤 탈출 의지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소득자의 세금을 감면할 경우 빈곤층에도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는 것이 맞다. 그 생각이 정말 옳은지 그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화당 지지자도 상황을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고, 민주당 지지자가 흔히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점이다. 상대가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짐작하면 대화는 숨 막히게 답답해진다. 그 순간 협력은 중단되고, 대화를 통해 진실에 도달할 가망은 희박해진다. 또 상대방이 내 말에서 가시를 느끼면서 방어적으로 나오기 쉽다.

설상가상으로, 방어적인 자세가 되면 믿음을 바꾸기도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대화에 더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따로 있다. 바로 나도 상대방의 말을 잘 안 듣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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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공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 처신을 정직하게 하는 자가 있었읍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양을 훔쳤는데, 아들이 그것을 고발하였읍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겨주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준다. 정직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葉公語孔子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子路>

이 귀절은 말이 너무 간단하여 가장 오해를 일으키기 쉽다. 이제 하나하나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원문에 대하여 말하면, 섭공은 父子의 관계를 돌보지 않고도 정직하고 합리적임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공자는 정직과 합리는 父子를 길가는 사람으로 보는 데 있지 않고, 그 父子의 理分을 극진히 발휘하는 데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고발‘[證]과 ‘숨겨줌‘[隱] 두 가지 태도의 다른 점이다.
우리가 만약 이 대화를 겉으로만 본다면, 지극히 공자를 오해하기 쉽다. 공자가 私的인 것을 제창하였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한층더 깊이 파본다면, 이곳에서 드러난 것은 공자의 가치판단 일반원칙에 대한 특수한 긍정인 것이다.
이러한 긍정은 간략하게 말해 ‘구체적 理分에서의 價値‘의 완성인 것 84 이다. 그 이론적 의미에 대하여 말하면, 이곳에는 사실 뒷날 유학 가치이론의 기본원칙이 들어 있다.
이른바 구체적 理分은, 즉 공자가 名을 말할 때는 곧 정치생활 범위에 대하여 理分[합리적 직분]을 말하였다. 이제 도덕생활에서 理分을 말하는 것은 마침내 하나의 순수한 이론문제로 드러나게 된다.
이 문제는 바로 가치의식의 구체화 문제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만약 백명이 돌 나르는 일을 한다고 하자. 추상적인 공평한 관념에 따라서 본다면, 우리는 매 사람으로 하여금 똑같은 작업을 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백 명 가운데 어떤 이는 늙었고 어던 이는 젊었으며, 어떤 이는 힘이 세고 어떤 이는 약하다. 즉, 제각기 능력의 차이가 난다. 만약에 단지 매 사람마다 돌을 100근 운반케 한다면 실제는 결코 公平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돌나르는 작업에서 공평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제각기 그 구체적 조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바꾸어 말해 100근을 운반할 수 있는 자는 100근을 운반하고, 10근을 운반할 수 있는 자는 10근을 운반한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사람은 제각기 그 힘을 다 발휘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 중에서 공평이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추상적 공평과 구체적 공평의 차이점이다. 더 미루어 말하자면, 가치의식의 구체화라는 의미이다.
이에 의거하여 본다면, 돌 나르는 예 중에서 가치판단을 할 때에 한 사람이 돌을 나르는 양은 몇 근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단지 매번의 구체적인 사례 중에서 그 理分[합리적 직분]의 완성(즉, 자기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에 대하여 그 合理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공자가 양을 훔친 예를 논한 상황과 비슷하다. 공자의 뜻은 이와 같다. 즉, 한 사람마다 한 사건마다에는 각기 다른 책임과 의무가 있으므로 ‘양 훔친 것을 고발하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 각자 그의 합리적 직분에 의해 혹 고발하기도 하고, 혹 숨겨주기도 하였을 때 비로소 정직함을 얻을 수 있다. 이 예 중에서 언급한 문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체적인 理分의 긍정이니 이것이 공자의 근본 취지이다. 둘째는 父子관계에서 보는 견해인데, 이것은 공자가 살던 사회와 관련이 있다. 전자는 가치판단의 원칙을 나타내고, 후자는 특수사회 중의 특수한 설법이다.
이론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우리가 설령 다른사회 속에서 이 문제를 보아서 父子관계의 중요함을 승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구체적인 理分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대체로 어떤 사 85 회든지 반드시 구체적인 理分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비유컨대 현대사회를 논한다면, 경찰이 물건 훔친 자를 발견하면 반드시 이 범죄자를 拘禁한다. 이것은 경찰의 합리적 직분[理分]이다. 그런데 만약 국민학교 교사가 아동이 물건 훔치는 것을 발견하면, 훈계로서 그런 행동을 못하도록 가르치는 이치가 국민학교 교사의 합리적 직분이다. 兩者가 다른 까닭은 이 두 가지 理分은 모두 구체적 理分에 속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구체적 조건을 말살해 버리고 단지 추상적인 ‘懲罰‘ 관념만 있게 되면, 국민학교 교사도 역시 훔친 아동을 구금하게 될 것이며 학교에 감옥을 부설하여야 할 것이니 권리와 책임[權責]이 크게 문란해질 것이다. 이것은 현대사회 제도하에서 볼 때 불합리한 것이 될 것이다.
또 미루어서 말하면 謀殺犯은 비록 사형에 처해야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만약 피살자의 친구가 스스로 이 謀殺罪를 범한 자를 죽인다면 오히려 법에 위배된다. ‘사형에 처하는 것‘은 법정의 권한이지, 개인의 권한이 아니다. 이것 역시 구체적 理分문제이다. 개인적 살해[私殺]를 금지하는 것은 결코 謀殺犯을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 의해서 알 수 있듯이 공자가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주고‘라고 말했을 때, 역시 ‘양을 훔친‘ 이 사건은 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의 마음 속에 있는 父子관계는 路人관계와는 같지 않다.이것은 바로 法官과 犯人의 관계와 원수집안끼리의 彼此관계와는 같지 않은 것이나 비슷하다. 이것이 모두 구체적인 합리적 직분[理分]의 문제이다.
총괄해서 말하면, 공자가 정직[直]을 논한 그 본의는 가치, 즉 구체적 理分의 완성을 말한 것이므로 한 사건이 합리적인가의 여부는 반드시 구체적 理分에 따라서 결정해야 한다. 父子와 路人이 같지 않음을 예로 들은 것은 특수사회에서 자료를 취하여 설명을 한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 대하여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을 통하여 표현된 본의는 바로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가치이론에 대하여 말한다면, 구체적 理分의 긍정은 실로 부정할 수 없는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추상적 가치의식은 본래 근본적으로 생활 속에서 실현할 수 없어서 내재적 충돌(예컨대 공평을 주장하여 남녀노소 할 것없이 매 사람마다 100근의 돌을 나르게 한다면, 결과는 바로 불공평을 낳게 되니 내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을 일으키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헤겔(Hegel)의 文化價値論이 權分哲學(Philosophy of Right)으로 돌아가는 것은 역시 이 뜻이다. 우리가 이것에 유의한다면, 비로소 진실한 생활의 가치표준 문제를 86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구체적 理分의 견해는 義 관념의 파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자는 이미 하나의 사건마다 모두 구체적인 理分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인생 태도를 논할 때 자기가 곳곳에서 자기의 직분을 다 발휘하는 것이 그 理想임을 표시하였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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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 되어 어질지 못하면, 禮는 해서 무엇하며, 사람이 되어 어질지 못하면, 樂은 해서 무엇하랴?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八佾>

이것은 바로 仁이 禮의 기초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에 公心이 없으면, 질서를 세울 수 없다. 질서는 올바름[正當性]에 의거하고 올바름을 구하려면 마땅히 공심에 의거해야 한다.
이에 이르러 우리는 孔子학설 중에서 ‘禮과를 義에로 포섭하였을‘ 뿐만 아니라, ‘禮를 仁에다 포섭하였음‘과 義는 ‘仁을 기초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합하여 말하면, ‘仁, 義, 禮‘ 세 관념은 이론적으로 하나의 주요 맥락을 형성하여 공자의 학설을 관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후세 유학사상의 총체적인 맥락이 되었다. 여기서 이 학설의 정신방향은 다음 절에 논술하겠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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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어진 이만이 남을 좋아할 수 있고, 남을 미워할 수 있다.
子曰, 唯仁者能好人, 能惡人. <里人>

‘좋아하고 미워함‘은 정서적인 의미에서 말하면, 모든 사람, 일체의 동물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어진 사람뿐이겠는가? 공자의 뜻은 바로 이치대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仁者는 公心을 세울 수 있다. 이미 사사로운 감정의 얽매임[私累]이 없으니 일체의 외계 사물에 대하여, 이치에 따라 가치판단을 세울 수가 있다. 이것이 이른바 ‘남을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기에 역시 여러 유학자들이 ‘好惡‘를 말한 것은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긍정과 부정을 말한 것이지 心理的인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P74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仁에 뜻을 가지고 있으면 죄악[惡]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也, 無惡也. <里仁>

이 惡자는 罪惡의 뜻이다. 好惡의 뜻과는 같지 않다. 앞에서는 正面(긍정적인 면)으로 말했다. 즉, 우리가 仁德을 갖추고 있으면 大公하여 사사로움이 없다. 즉, 이치대로 긍정과 부정을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反面(부정적인 면)에 대하여 말했다. 우리가 사사로움을 없앨 수 있으면, 일체의 죄악을 초월할 수 있다. 대개 죄악은 사적인 잡념[私念]에 근원을 두고 있으니 사사로움을 없애면, 자연히 악함이 없게 된다.
윗절에서 인용한 義利의 구분은 여기에서 그 실질적 의미가 드러날 수 있다. 私念에 따르면 利를 추구하고, 公心에 따르면 義를 추구한다. 仁은 公心을 가리키니 仁은 義의 근본이 된다. 이론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 이치는 매우 뚜렷하다. 대개 義란 정당성[올바름]을 가리키며, 우리가 올바름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공심을 세울 수 있는 데에 있다. 公心이 서지 못하면, 반드시 利欲에 빠지게 된다. 公心이 이미 세워지면, 저절로 理分에 따라갈 수 있다. 公心을 세우는 것이 仁이요, 이치에 따르는 것이 義이다. 뒷날 맹자가 ‘仁에 머물고 義를 거친다‘(居仁由義)고 말하고, 또 仁은 ‘인간의 마음‘이요, 義는 ‘인간의 길‘이라고 한 것은 공자의 仁義 관념을 가장 잘 밝힌 것이다. 대개 仁은 자각의 경계이며, 義는 이 자각의 發用이다. 公心을 세울 수 있는 자는 실천 중에서 반드시 올바름[正當]을 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은 의의 기초요, 의는 인이 드러난 것이 되는 까닭이다. 의가 인에 의거하는 것은 마치 예가 의에 의거하는 것과 같다.
75 이상은 仁과 義, 두 관념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이제 다시 仁과 私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 P74

顏淵이 仁을 물었다. 선생님은 대답하였다. "自己[사욕]를 누르고, 禮에 돌아가는 것이 仁이다. 하루만 자기[사욕]를 누르고 예에 돌아가면, 天下 사람들이 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仁을 하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은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세목[자세한 것]을 청하였다. 선생님은 대답하였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顔淵問禮.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이것은 전적으로 仁과 禮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어째서 ‘자기(욕심)를 누르고 예에 돌아가는 것이 仁이라‘고 하였는가? 克己는, 즉 사사로움을 제거하는 것이며, 複禮는, 즉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義를 말하지 않는 까닭은 義와 禮는 이론적으로는 비록 차원이 다른 관념이지만 실천적인 면에서 말하면, 사욕에 따르지 않고 禮로 돌아갈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이치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며, 역시 올바름을 구하려는 의지의 방향대로 활동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실천하면 오히려 仁心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 귀절은 원래 실천에 대하여 말한 것이므로 그 다음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예의를 지킴으로써 實踐하는 과정을 지적하였다.
禮는 義를 그 내용으로 삼고, 義는 또 仁을 기초로 삼는다. 이것은 이론적 순서이다. 인간은 예를 지킴으로써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양성한다. 즉 이러한 의지로 말미암아 公心을 환기시키는데, 이것은 실천과정이다. 이론적 순서로 말하자면, 義의 지위는 지극히 뚜렷하다. 실천순서에서 말하면 禮와 義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따로 나누어서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실천순서를 말할 떄 仁으로부터 직접 禮를 언급하였던 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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