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7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은 곧이어 있었던 나가사키의 경우와 다르게 지표에서 멀리 떨어진 고공에서 폭발했기 때문에 낙진의 문제가 비교적 덜 했다. 그러나 1954년 3원 1일 마셜 군도 비키니 섬에 있었던 수소 폭탄 시험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파괴력을 나타냈다. 폭발 지점에서 150킬로미터나 떨어진 작은 산호섬 롱애러프도 거대한 방사능 구름으로 덮였다. 그 섬의 주민들은 핵폭발이 서쪽에서 떠오르는 태양 같았다고 증언했다. 폭발한 지 수시간 후 방사능 낙진이 롱애러프 섬에 눈송이가 내리듯 떨어졌다. 평균 방사능 조사량이 175래드였는데, 이 값은 보통 체격의 사람이 사망할 수 있는 치사량의 반이 조금 못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 산호섬이 폭발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음식물을 통해 방사능 동위 원소인 스트론튬이 체내에 누적되고, 방사능 요오드가 갑상선에 차곡차곡 쌓였다. 어린이의 3분의 2와 어른의 3분의 1에게서 갑상선 이상, 성장 장애, 악성 종양 등이 발견되었다. 마셜 군도의 주민들은 특수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했다. - P636

637-9 핵 공격에서 비록 몇몇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묘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핵폭발은 지구 상층 대기의 질소와 산소의 결합을 촉진시켜 오존의 상당량을 파괴시킬 것이다. 오존층의 파괴로 태양 자외선이 지구 대기로 침투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지구 표면에 도달하는 자외선의 양이 수 년 동안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태양 자외선은 피부암을 유발하는데 피부암은 특히 백인종에게 위험하다. 더욱 두려운 것은 지구 생태계에 가져올 변화이다. 하지만 변화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대책을 세울 수 없다. 자외선은 곡식의 수확량을 격감시킬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을 죽일 것이다. 미생물의 어느 종이, 어떻게, 어떤 내용의 피해를 우리에게 가져다줄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미생물의 멸종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생물이 거대한 생태계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생태계 피라미드 맨 위층에서 겨우 아장거릴 줄만 아는 지극히 불안한 존재가 아닌가. - P637

642-3 리처드슨은, 자신의 곡선을 M=0까지 외삽한다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살인의 빈도를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추정해 본 결과, 전 세계에는 대략 5분에 한 건꼴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 단위의 살인과 최대 규모의 전쟁이 연속적인 현상의 양끝인 셈이다. 전쟁과 살인은 동일한 성격의 현상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심리적 관점에서 전쟁은 살인이라고 확신한다.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질 때, 자신의 생존이 도전을 받게 될 때 인간의 ㅡ적어도 일부 사람들의ㅡ 분노는 사람을 살인의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종류의 위협이 국가들에 가해질 때, 국가도 겉잡을 수 없는 살인적 분노에 휘말린다. 개인적 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몇몇이 다수의 대중을 부추겨 당면 상황을 국가 간의 전쟁으로 몰아가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의 기록에서 종종 보게 된다. 그렇지만 전쟁에서 사용되는 살인 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피해상은 도를 넘는 처참한 수준으로 치달아 왔다. 이러한 변화는 다수의 사람들이 살인적 분노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고 결국 대규모 전쟁에 여러 나라가 말려들게 한다. 국가가 매스컴의 근간을 틀어쥐고 있으므로, 국가는 국민을 쉽게 선동하여 전쟁으로 몰아갈 수 있다.(이 점에 있어서 핵전쟁을 예외라고 할 수 있다. 핵전쟁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642

643-4 우리는 여기에서도 우리의 열정과 좀 더 바람직한 인간 본성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는 아주 먼 옛날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져서 아직도 우리 머리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파충류의 뇌, 소위 뇌의 R-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편 감정의 중재와 기억의 관장은 진화의 가장 최근 단계에서 발달한 포유류와 인간의 뇌, 즉 변연계와 대뇌 피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갈등은 파충류와 포유류의 뇌가 벌이는 대립의 소산인 셈이다. 인류가 적은 규모의 집단으로 하찮은 수준의 무기만을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는 아무리 분노가 극에 달한 전사라고 하더라도 그가 죽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겨우 한들에 불과했다. 현대로 오면서 기계 문명과 함께 전쟁 수단도 급격히 발달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도 많이 변했다. 이제 우리는 분노, 좌절, 절망 등의 동물적 격정을 이성의 힘으로 달랠 줄 알게 됐다. 인류는 최근에 벌어진 세계적 불의와 지역적 불의를 행성 규모에서 어느 정도는 개선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현대 무기는 수십억의 인명을 한꺼번에 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성숙 정도는 충분치 않단 말인가? 과연 우리는 이성의 기능을 우리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가? - P643

645-6 지구 전역에 걸쳐 공포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핵전쟁을 억지하는 정책을 처음 시도한 나라는 아메리카합중국과 (구)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었다. 양측은 이 정채그이 성공을 위하여 결국 인류 전체를 볼모로 잡았다. 양국은 상대 진영이 취할 수 있는 행동 양식의 경계를 정했다. 어느 한쪽이 정해진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핵전쟁에 즉각 돌입하게 됨을 양측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계의 정의는 때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새로운 경계선을 서로에게 확실히 해 둘 필요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각 진영은 군사적 우위에 서야 한다는 강한 휴혹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유혹의 실현은 항시 상대방이 심각하게 경계할 수준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쌍방은 상대의 인내 한계선을 계속 타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핵 폭격기의 북극 통과 비행, 쿠바 미사일 위기, 대인공 위성 무기의 실험,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그 길고도 슬픈 타진 목록의 일부이다. 전 지구적 공포의 균형은 유지되기 힘든 아주 미묘하고 불안정한 평형이다. 미묘한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하여 쌍방은 범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반드시 피해 가야 한다. 그 어떤 일도 삐끗 어긋나면 안 된다. 무엇보다 인간의 파충류적 열정을 적정 수준 이하로 제어해야 한다. - P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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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그녀에게 내가 말하는 자유는 그런 종류가 아니며 어떤 단체든 토의에 대한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 방향 혹은 저 방향으로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중립을 지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중립을 지키고 서 있는 것보다는 행동을 보여 주는 게 단순히 더 낫지 않냐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모르는 경우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P136

143 이 모든 방면에서 내가 요구하는 것은 비굴하다 싶을 정도의 ‘정직함‘이다. 난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좀 더 확실한 정직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더 자유로워질 거란 것이 내 생각이다. 난 사람들이 정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과학자들 역시 전혀 정직하지 못하다. 영 쓸모가 없다. 아무도 정직하지 않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보통 과학자들이 정직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문제는 더 커진다. 정직함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사실만 얘기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전반적인 상황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적인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분명하게 전달해 주는것을 의미한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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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3 "생물은 바다 속에서 시작된다. 바다 속에서 생물은 대단한 능률화의 높은 수준에 도달한다. 어류는 기능과 외형이 대단히 잘 되어 있으므로, 오늘날까지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존속해 온 형태(예를 들면 상어와 같은)를 그대로 낳고 있다. 그러나 계속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진화의 과정은 없었다. 진화의 면에서 보면 ‘성공만큼 실패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잉그 박사의 경구가 항상 타당한 것 같다. 환경에 완전히 적응한 생물, 그 능력과 생명력의 전부를, 지금 일에 집중하고 소모해 버리는 동물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을 경우에 그 변화에 적응할 여력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된다. 시대가 그러한 동물은 점점 계획된 대로의 현재 기회에 이전의 능력을 습관적으로 맞추어 나간다. 결국에는 전혀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또 불필요한 가외 운동도 하지 않고 생존에 필요한 모든 활동만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반면에 만일 그 장소의 환경이 변화하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그들은 절멸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습관적 기능화에 성공하는 일이 오히려 많은 수의 종류가 절멸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후 조건이 변화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변하기 전의 기후 조건에 자신을 적응하기 위해 생활력의 여분을 완전히 써 버렸다. 여분의 여력이나 자극에의 도전도 없다. 예의 생각이 얕은 처녀(<마태> 25:1~13)처럼 더 이상의 적응을 하기 위한 여분의 기름을 남겨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한 가지에 너무너무나 집착했고 새로운 적응에 여력이 없어 결국 멸망해 버린 것이다." - P402

428 약탈자가 된 변경 태수(일부)
티무르와 샤를마뉴, 그리고 후기 앗시리아 왕들의 생애를 분석한 결과 우리는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모두 동일한 현상이 있음을 관찰했다.
한 사회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변경민들에게 발달시킨 뛰어난 군사력이 본래 영토인 변경 바깥쪽의 주인 없는 지대로부터 자신들의 형제인 내부 동포에게로 향하게 되면 군국주의자라는 도덕적 병폐로 전환하여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런 사회적 해악의 다른 몇 가지 예가 곧 우리들 머리에 떠오른다. - P428

433-5 11세기에 그리스도교 공화제를 수립했고 서유럽 사회를 봉건적 무정부 상태로부터 구출하려고 했던 로마 교회의 창조적 인물은 오늘날 국제적 무정부 상태를 해소하여 세계 질서를 세우려고 한 그들의 정신적 후계자가 빠진 것과 같은 딜레마에 처했다. 그들의 목적의 본질은 정신적 권위에 의해 물리적인 힘을 배제하는 데 있었고, 정신적 칼이 그들의 더할 나위 없는 승리를 거두게 한 무기였다. 그러나 물리적인 힘을 믿는 기성 체계가 정신적인 칼을 무시하고 태연한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정신적 위기에 로마 교회의 투사들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대해 답을 내라는 도전을 받았다. 신의 병사는 비록 그 전진이 정지되는 위험에 부닥치더라도 결코 정신적 무기 이외의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니면 악마에 대항하는 신의 싸움을 위해 상대편과 같은 무기를 써서 수행할 것인가? 힐데브란트는 그레고리우스 6세(재위 1045~46년)로 부터 교황청 재산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을 때, 교황청의 재산이 끊임없이 비적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후자를 택하여 군대를 모집하고 무력으로 비적을 근절시켰다.
힐데브란트가 이런 조치를 취했을 때, 그위 행위의 내적인 도덕적 성격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40년 뒤에 그의 최후의 시기가 오자 마침내 이 수수께끼에 대한 뚜렷한 답이 나왔다.
1058년 힐데브란트가 교황으로서 살레르노(이탈리아 서남부의 도시)에서 망명 중에 숨을 거두려 할 때, 로마 자체는 교황의 정책이 초래한 무거운 재앙 때문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때 로마는 성 베드로 사원 제단ㅡ교황청의 보고ㅡ의 층계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확대되어 마침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를 휩쓸었던 군사적 투쟁에서 교황이 원조를 청한 바 있었던 노르만 인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타 버린 직후였다. 힐데브란트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싸움은 150년이 지난 뒤에 인토켄티우스 4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가장 치명적이고 가장 큰 재해를 초래했던 싸움의 예고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법률가에서 군국주의자로 돌변한 인노켄티우스 4세(재위 1243~54년)의 시대에 이르러서 이미 우리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힐데브란트 자신이 힐데브란트 교회를 결국 그의 적들ㅡ현세·혈육·악마ㅡ이 그가 지상에 세우려고 노력했던 신의 나라를 이겨내는 방향으로 돌렸던 것이다.

정치는 믿지도 믿은 적도 없다.
가르치는 자는 교회조차 믿지 않는다.
교회마저 교권조직이 비밀회의를 거듭하여
성 베드로를 황제의 자리에 앉혀놓고, 그것으로써
그를 위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숭배해 온 약속을 인간을 위해 얻으려고 꾸미며,
교회의 지상에서의 지배권을 확대하기 위해 그리스도
천국의 계율을 늦추었다.

이상으로써 교황청이 어떻게 하여 자신이 물리치려고 노력했던 물리적 폭력의 악마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동시에 교황청의 미덕이 반대의 악덕으로 바뀌게 된 다른 여러가지 이유도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결과가 된다. 물질적인 칼이 정신적인 칼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변화이며, 그 뒤는 모두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황청은 성직자의 재정 문제에 관하여 11세기에는 주로 성직 매매의 근절에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13세기에는 고위의 성직을 사기 위해 부정하게 세속적인 권력에 교회의 수입을 넘기는 악습의 뿌리를 애써 뽑아내고 교황청의 서임된 성직자들을 위해 그 수입을 나누어 주었는데, 14세기에 와서 교황청 자신을 위해 세금을 부과시키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답은 간단하다. 교황청은 군국주의적으로 변했고 전쟁은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 P433

465-7 현재 <마카베오 하후서>(경의 성서 「아포크리 파산」에 수록되어 있는 책) 중에 전해지는 저 온순한 순교자들ㅡ노 율법 학자 엘르아잘과 7인의 형제 및 그들의 어머니(안티오코스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함)ㅡ이 고지식한 바리새인의 정신적 조상이었다. 이 바리새라는 것은 ‘분리하는 자‘라는 뜻으로 그들이 스스로 칭한 명칭이다. 헬라스 사회에서 오리엔트 출신의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2세기 이래 폭력과 비폭력이 서로 사람들의 혼을 지배하려고 다투지만, 결국 폭력은 자멸하고 비폭력만이 남았음을 볼 수 있다.
폭력을 택하느냐 비폭력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었다. 기원전 167년 초기의 순교자들이 취한 비폭력적 태도는 곧 성급한 유다스에 의해 버려졌다. 그리고 이 프롤레타리아의 ‘무장한 힘 있는 사람‘이 거둔 직접적 물질적 성공이ㅡ그것은 표면적일 뿐 가짜요, 일시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ㅡ후세 사람들의 눈을 현혹했다.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그들의 스승이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을 듣고 분개했으며, 그 예언이 실현됨에 이르러서는 일어설 기운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불과 수 개월 후에 가말리엘(국민 전체로부터 존경받은 율법학자)이 처형된 예수의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기운을 회복하는 것을 보고, 신이 그들의 옆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시 그 수년 후에는 가말리엘 자신의 제자 바오로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그리스도교도가 이렇듯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전향하는 일은 물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떨쳐 버림으로써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으로써 예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부활에 대한 신앙과 같은 일이, 기원 70년 예루살렘의 파괴를 기점으로 정통파 유대교의 유대인들 사이에 지켜지는 일로 일어났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막 실현되려는 어떤 외면적 관념‘을 부정한 새로운 유대교의 일파가 나타난다. 유대인의 폭력주의가 문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묵시록적 문서는 <다니엘> 하나만 빼놓고 이제 율법과 예언자의 시로 이루어지는 유대교 정전에서 추방되어 버렸다.
그리고 인간의 활약으로 신의 의지를 이 세상에서 실현·촉진시키려는 일체의 노력을 삼간다는 그와 반대의 원칙이 유대교의 전통 속에 든든하게 뿌리를 박게 되었다. 현재에도 엄격하게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아구다스 이스라엘‘파는 시온주의자의 운동을 옆눈으로 흘겨보고 20세기의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향토‘를 건설하는 시온주의 사업에 전혀 참가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이다.
정통파 유대교도에게 일어난 보수적 믿음이 유대 민족을 화석의 형태로 존속하게 했지만, 예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그와 같은 믿음은 그리스도교를 위해 더욱 큰 승리에의 길을 열어 주었다. 박해의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교회는 엘르아잘이나 ‘7인 형제‘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응전하여 그 대가로서 헬라스 사회의 지배적 소수자를 개종시키고, 또 나중에는 외적 프롤레타리아의 야만족 전투 단체를 개종시킬 수 있었다.
성장하는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직접적 적대자는 가장 새로운 형태를 한 헬라스 사회의 원시 부족 종교였는데, 그것인즉 ‘신성한 카이사르‘의 인격에 의해 대표되는 헬라스 사회의 세계 국가에 대한 우상 숭배였다. 교회가 잇달아 관헌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결국 로마 정부가 도저히 누를 수 없었던 정신적인 힘으로 로마 정부를 굴복시킨 것은, 모든 성원에게 비폭력적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완강하게, 단지 단편적 형식일지라도 우상 숭배를 허용하지 않았던 단호한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 로마 제국의 원시적인 국가 종교는 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유지하고 강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인심을 얻을 수 없었다. 로마 당국자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 어떤 일정 의식을 행함으로써 표명하도록 명한 형식적인 존경이 이 국가 종교의 처음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다. 비그리스도교도에게 있어서는 형식적인 것 이상 아무 의미도 두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의무를 당연한 것으로 실행하였고, 그리스도교도가 어찌하여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별것 아닌 관습에 따르기를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앙 자체에 있어서ㅡ왜냐하면 정치적 강제의 뒷받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천적인 인심을 끄는 힘에 의한다는 의미에서ㅡ유력한 그리스도교의 경쟁 상대는, 이 국가 종교도 다른 어떠한 형태의 원시 종교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자체와 마찬가지로 헬라스 사회의 내적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발생한 몇 개의 ‘고등 종교‘였다. - P465

470 해체기의 사회가 이처럼 외래 건설자에게 자기네 세계 국가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은, 그 사회 고유의 지배적 소수자가 전적으로 무능해져 창조력을 잃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노쇠 현상에 대한 형벌은 굴욕적인 권리 상실이었다. 지배적 소수자의 일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은 극히 당연한 과정으로서 현지에서 지배적 소수자의 특권을 가로챈다. 이리하여 외래자가 건설한 세계 국가의 토착민인 지배적 소수자는 모두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지위로 하락된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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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2 신화를 만들어 낸 고대인들도 잘 알고 있었듯이 사람은 대지의 자녀인 동시에 하늘의 자녀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살아오는 동안 인류는 못된 진화적 습성을 많이 길러왔다.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같이 오랫동안 유전돼 온 못된 요소들은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측은히 여길 줄 아는 좋은 천성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식의 자식도 아낀다.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노력하고 지적인 것을 향한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인류에게 영원한 생존과 번성을 확실히 약속할 도구요 방편이 될 것이다. 못된 습성과 좋은 천성 중에서 어느 쪽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지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미래를 보는 우리의 눈이 지구에 고착돼 있다거나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마음이 지구의 어느 한 지역에만 묶여 있다면 결국 저 못된 습성이 사랑의 마음과 이성의 예지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광막한 코스모스의 바다 속에 감춰진 새로운 세상과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외계 문명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우리는 아직 갖고 있지 않다. 우리와 같은 문명의 운명은 결국 화해할 줄 모르는 증오심 때문에 자기 파괴의 몰락으로 치닫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하지만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우주에서 본 지구는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지구는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 등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별들의 요새와 보루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디 작은 푸른 반점일 뿐이다. 이렇게 여행은 시야를 활짝 열어 준다. - P631

632-3 우주에는 생명이 전혀 서식한 적이 없는 세상이 있다. 우주적 재앙의 표적이 되어 새까맣게 타 버린 불모의 세상들이 우주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우리는 행운아이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고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문명의 미래와 하나의 종으로서 인류의 생존 문제가 우리 두 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지구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그렇게 해 주겠는가? 인류의 생존 문제를 우리 자신이 걱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대신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인가? - P632

633-4 인류는 현재 위대한 모험을 앞두고 있다. 이 모험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우리가 지금 감행하려는 모험은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이 뭍으로 진출한 사건이나, 유인원이 나무 위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땅으로 내려오기로 한 결정 등에 버금갈 만한 위대하고 중요한 사건으로 인류사에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구의 온갖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끙끙거리고 있다. 인류는 이미 지구의 속박에서 일시적 해방을 맛보기도 했다. 우리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내재된 원시성을 잘 길들이며 우리의 원시적 두뇌가 내리는 일방적 지시와 대결함으로써 지구가 사람에게 걸어 놓은 정신적 족쇄에서 탈출하려 하고 있다. 또 인류는 다른 행성들로의 여행을 감행하는 한편, 외계에서 올지도 모르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육체적 족쇄로부터 탈출을 꾀하고 있다. 정신적 해방과 육체적 탈출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전자 없이 후자의 실현이 있을 수 없고 후자의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은 전자의 성공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에게 필요조건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전쟁 수행에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인간은 상호 불신이란 최면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에 대한 염려 같은 것은 아예 할 줄 모른다. 상호 불신의 망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구도 하나의 행성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케 하여, 모든 국가를 죽음을 향해 서둘러 행진케 할 뿐이다. 우리가 지구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들은 너무나 무서운 결과를 불러올 짓거리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초래될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무슨 일을 하든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 일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으며 거기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핵전쟁을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핵기술을 보유한 국가들은 단 한 나라도 빠짐없이 핵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나 핵전쟁이 미친 짓이라고 알고 있지만 국가는 국가대로 핵전쟁의 필요성에 대한 그럴듯한 구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음울한 인과의 고리를 보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독일인들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만들어야 했다. 미국이 갖고 있으니 (구)소련도 핵폭탄을 가져야만 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의 나라들이 가져야 했다. 아마 20세기가 끝날 즈음에는 수많은 국가가 핵폭탄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핵폭탄은 만들기 쉽다. 핵분열 물질은 원자로에서 쉽게 훔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핵폭탄 제조 기술은 거의 가내 공업의 범주에 들었다. - P633

634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블록 버스터라고 불리는 초대형 고성능 폭탄이 위력을 발휘했다. TNT 폭약 20톤으로 만들어진 초대형 고성능 폭탄 하나가 대도시의 구역block 하나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가졌다. - P634

635-6 핵폭탄이 폭발하면서 생기는 충격파는 투하 지점에서 수 킬로미터 밖에 있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한순간에 뭉개 버린다. 핵폭발에 동반되는 불기둥, 감마선 그리고 중성자에 노출되는 즉시 사람의 육체는 내부 속속들이 아주 철저하게 구워진다. 미국은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낼 수 있었다. 이 핵 공격에서 살아남은 한 여학생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지옥의 밑바닥 같은 암흑 속에서 엄마를 부르는 학우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교각 옆에 파놓은 큰 물통 안에는 온몸이 빨갛게 구워진 갓난아기를 한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 위로 높이 쳐들고 힘겹게 흐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어머니는 화상을 입은 자신의 젖을 아이 입에 물리면서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물통 안에 있는 학생들은 머리만을 물 위로 내민 채, 두 손을 애원하듯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며 부모를 찾아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옆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거기에는 성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짝 그슬려 곱슬곱슬 뒤말린 흰 머리카락은 온통 재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 P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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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다른 분야의 아이디어를 다룰 때 가져야 할 네 번째 태도를 말할 차례가 됐다. 그것은 ‘무엇이 가능한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설명이 좀 더 그럴듯한지‘, ‘무엇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비행접시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논박할 수는 없다. 그런 주장을 반복해봤자 영양가 있는 논쟁이 되기 어렵다. 화성인들의 침략에 대해 걱정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 지금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정말 비행접시인지, 타당성이 있긴 한 건지, 정말 그럴듯한 설명인지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냥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할 때보다 더 많은 실제 데이터를 기초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평범한 개인은 그저 가능성이 있기만 한 사건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많은 사건들 중에서 굉장히 많은 수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 가능한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것은 물리 법칙의 일반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누가 무엇을 생각해 내었든, 그건 대개 틀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랜 물리학의 역사에서 올바른 이론은 겨우 5개에서 10개 정도에 불과하며, 그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다. 제기된 모든 이론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언제나 매우 낮다. 나중에 가서 알게 되겠지만. - P108

126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세상은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사람들이 비행기에 타게 될 때 보험에 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보험 회사 직원들은 점성술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의 보험료를 바꾸는 데 아주 관심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성술사들이 가면 안 좋다는 날에 간 사람들이 더 잘못될 가능성이 높은지 테스트해 본 적이 없다. 오늘이 장사하기에 좋은 날인지 나쁜 날인지 하는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뭐를 해 본 거지? - P126

127 그렇다. 그래도 어쩌면 점성술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옳지 않음을 지적하는 정보는 정말 많다. 사물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사람들은 어떤 존재이고, 세상은 또 무엇인지, 별들은 무엇이고, 여러분이 쳐다보고 있는 행성들은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회전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아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다음 이천 년 동안 그 별들이 어디에 있을지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도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점성술사들의 말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수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거 믿지 말자! 그게 옳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순전히 말도 안 되는 넌센스nonsense일 뿐이다. 그걸 믿는 것이 정당하던 유일한 시기는 별들과 이 세상과 나머지 것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뿐이었다. 점성술이 사실이라면 진짜로 존재하는 다른 현상들을 감안했을 때 정말 놀라운 일일 것이며 실질적인 실험, 실제 시험을 통해 누군가가 이를 증명하고, 이를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택해서 시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 말을 들어 봤자 배울게 하나도 없다. - P127

127-8 덧붙이자면, 과학의 초창기에는 이와 비슷한 실험들을 실제로 했었다. 꽤 흥미로운 일이었는데, 마치 이런 실험을 통해서 산소를 발견했던 것처럼 선교사들은 배가 난파됐을 때 바다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더 낮은지 측정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 이를 시험하는 데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보같이 들리는 것일 게다 – 선교사들처럼 착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들이 탄 배가 난파될 가능성이 더 낮은지, 그리고 선교를 하러 먼 나라로 떠나갈 때 그들이 탄 난파선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물에 빠져 죽을 가능성이 더 낮은지 측정해 보았던 것이다. 결과는 ‘선교사라고 해서 크게 차이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난파 확률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게 됐다. - P127

129 나는 신앙 요법이 진실인지 알고 싶다. 이를 위해 면밀히 조사를 해 봐야 한다. 모든 사람은 알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의 치료 능력을 믿음으로써 상처를 입게 되는 사람이 더 많은지 도움을 얻게 되는 사람이 더 많은지, 혹은 신앙 요법으로 인해 치료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지 상처를 입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지 따져봐야 한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조사를 해 봐야 답을 알 수 있다. 조사 없이 사람들이 믿도록 내버려 두면 위험하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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